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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5화 (86/86)

외전 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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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것도 없는 제가 대접을 받네요.”

문질러 주는 손길이 기분 좋은 모양이었다.

사혜가 운혁의 뺨에 입술을 대었다. 고개를 살짝 비틀자 엇갈리듯 코끝이 닿으면서 숨결이 부드럽게 섞였다. 사혜의 턱을 쥐고 입술을 머금자 배어 나오는 향기가 더없이 달콤하다.

이제는 진한 접촉을 자중해야 하는데 입맞춤 한 번에 흔들리는 꼴이라니.

목덜미에 코를 묻고 사혜의 살 내음을 양껏 빨아 마시고 싶다가, 탐스런 살을 손아귀 가득 쥐고 싶다가, 흠뻑 젖도록 지분거리고 싶기도 하고. 마냥 품에 넣고 어화둥둥 해도 좋다. 이 여자는 모르겠지.

운혁은 입술을 떼고 사혜의 눈을 보았다. 곡선의 눈매와 촉촉한 눈. 홍사혜의 눈은 언제나 속을 투과하는 것처럼 맑고 선한 느낌을 주었다.

이전에는 상투적인 표현이 우습기만 했다. 한데 저 곧은 시선이 온전히 자신에게로 쏟아지면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라서.

다시 여자의 뒷머리를 끌어당겨 입술의 결합을 깊게 했다. 이불을 꾹 쥔 손이 귀여워서 운혁은 웃으며 움찔거리는 사혜의 손등을 손으로 덮었다.

“저, 운혁.”

어깨까지 빨갛게 물들인 사혜가 운혁의 어깨를 저지하듯 잡았다. 옷 속으로 들어온 손을 곤란해하는 눈치라 또 웃음이 났다.

“응.”

“범씨 아주머니 오시면 할 말이 있어요.”

범씨 댁이 주려고 한 것은 새하얀 아기 신이었다. 태어날 날은 한참 남았는데 벌써부터 호들갑 떨며 하나라도 더 챙겨 주려는 마음이 고마웠다.

느지막한 오후에나 아주머니가 도착할 듯싶어 기다렸다. 아기 신을 내밀면서 깜짝 선물처럼 운혁에게 임신 소식을 전하고자 계획했는데…….

아, 초기엔 조심하시라고 의원이 당부했었지.

“할 말?”

“네.”

운혁은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삼켰다. 남편이 살살 쓸어 주는 건 좋고, 내버려 두자니 불이 붙을 낌새고, 받아들이자니 몸 상태가 염려스럽고.

한순간 골똘한 눈동자에 스치는 십수 가지 생각을 읽은 운혁이 손을 물리고 사혜의 옷고름을 여며 주었다.

구겨진 이불까지 펴 주자 의아한 눈초리가 따라붙는다. 웬일이시람. 그 속마음까지 고스란히 드러나는 표정에, 함께 시치미를 떼고 있던 운혁이 결국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남편을 안달 나게 하려면 이러이러하라고 범씨가 귀띔해 주었어?”

“그런 게 아니라요―”

다 이유가 있어서 거부하는 거라고 중얼거리는 사혜를 무릎에 앉히고 등허리를 쓸었다. 한 줌도 안 되는 몸이 내어 주는 온기가 참 따스하다.

이제는 한 몸처럼 익숙해진 체온과 영영 익숙해지지 않을 간질거리는 설렘. 머리카락 한 올마저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는 나의 사혜.

“오늘따라 왜 이러실까.”

운혁이 새하얀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오늘이 대수인가. 매일 이러고 싶은 마음을 누르는 중인데. 차마 부인 앞에서 속 편히 내보이지 못한 욕망을 알아주길 바라면서도 그러지 않았으면 싶다.

질려 하면 어쩌지. 진저리치다 떠나 버리면 어쩌지.

인간의 사랑은 유구하지 않다는 걸 안다. 숨 막혀 하고, 끝내 식은 눈으로 사혜가 나를 보면. 그러면.

‘잡스런 요귀 주제에 누굴 속이려 드느냐, 지금까지 저 무녀 옆에서 꽁꽁 잘도 감추며 살았구나. 피는 못 속이지, 악랄한 요귀 새끼야.’

처음부터 속이려던 것은 아니었다. 미물이 은덕을 쌓으면 영토를 관활하는 토지신이 될 수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한 오천 년 정도.

그러나 운혁은 기다릴 수 없었다. 먼 시간을 돌아 또 사혜가 환생하기를 기다리며 홀로 피를 말릴 순 없는 법이었다. 하루빨리 홍사혜를 보고 싶은데.

다시 해후했을 때는 저도 모르게 거짓을 입에 담았다. 잡스런 요귀 주제에 토지신 운운하며 사혜의 경계를 풀었다.

그가 요귀이고, 사혜를 헤쳤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미움받을까 두렵지 않다면 거짓이다. 겉으론 다정히 아껴 줘도 자신의 몸을 가른 요귀가 불쑥불쑥 떠오를까 봐. 사혜가 그를 죽을힘 다해 싸워야 했던 요귀로 보는 순간이 올까 봐.

“운혁?”

아픈 그림자가 될까 두려웠다.

언젠가 말해야지. 이런 나라도 사랑해 줄 수 없겠느냐며 진실을 털어놓아야지. 애정을 갈구해야지, 하면서도 뒷걸음질 치게 된다.

그는 홍사혜가 무엇이든 사랑하겠지만 사혜도 그러할까. 확신할 수 없었다. 투기 많은 요귀로 남은 까닭은 그 때문인가 보다.

어느 먼 훗날에 사혜가 자신을 버리고 떠나갈까 봐 두려워하면서, 사혜의 사랑이 활활 타서 심지가 까매지면 치워 두는 양초가 아니라 길이길이 뜨겁게 타기를 바랐다.

나를 더 많이 사랑해 주었으면. 내 전부를 내어 주고 바라는 건 네 애정 하나뿐이니.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들어.”

“어떤 것을요?”

“이대로 단둘이 세상에 남아도 좋을 것 같다는.”

아무도 방해할 수 없는 곳에서 오로지 너와 나만.

가벼운 농쯤으로 여기는 모양인지 푸스스, 웃는 소리가 들렸다.

웃는 입술에 시시때때로 닿고 싶었다. 고운 살결에 입 맞추고 싶고, 여자가 자신 때문에 행복했으면 좋겠고, 다른 무엇도 필요치 않고 저만 바라봐 준다면 더 좋았다.

“질려서 서로를 돌 보듯 보는 날이 오겠지요.”

사혜 역시 장난스레 받아쳤으나 그는 웃지 못했다. 사혜에게 얼굴을 묻고 고개를 저었다.

하루 종일 여자의 생각으로 웃는 그인데, 차게 식은 눈으로 일갈하는 사혜를 떠올리자 입술이 갈라지는 기분이었다.

돌? 내가 돌이면, 그래. 끝없이 네게 굴러가야지.

모나지 못한 돌부리가 되어 네 앞을 차지할 거고, 인생의 어느 길로 나아가든 뒤따라가 단단히 내 존재를 박아 둬야지. 네가 나를 다시 사랑해 줄 때까지.

결국 자신은 절대로 사혜가 바라는 착한 사람이 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가끔은 스스로의 집요한 망상과 이기심에 혀를 내두르게 될 정도니까.

추악한 마음을 엿본 사혜가 정떨어진다며 거리를 둘지도 모르겠다. 자신은 그조차 좋다며 품에 안을 테지만.

그런 속마음을 대신하여 사혜를 힘주어 안았다. 여자의 체온, 향기, 작은 숨소리까지 모두 가슴속에 스미어 온몸을 저미는 기분이었다.

아, 좋아.

신음처럼 내뱉자 사혜가 그의 뺨을 손등으로 쓸었다. 얼굴 좀 보여 주시지. 고운 목소리로 종용하면서 운혁의 귀를 만지작거린다.

부끄러워하면 귀부터 뜨거워지는 사내를 놀리기를 좋아하는 아내였다.

“……연모해, 사혜야.”

어르신과 약조했다. 너를 죽을 때까지 내 곁에서 행복하게 해 주겠다는 다짐 말이다.

곱씹는데 마음이 저릿거렸다.

“저도 연모합니다.”

수줍게 웃는 사혜의 미소가 어여뻤다.

그러니 이 고백이 네게 무뎌지지 않고 매일 새롭기를 바라.

그러지 않으면 퍽 억울할 것 같았다. 자신은 일평생 사혜에게 연정을 속삭여도 질리지 않을 것 같으니 말이다.

* * *

그리하여 문석후는 어찌 되었느냐 하면.

“이제 저한테 손을 뗄 거라고요?”

그게 웬 말이냐며 사혜가 고운 미간에 주름을 잡는다. 오만가지 핑계를 붙이며 추근덕대던 작자가 하루 만에?

“어째서 일이 그리되는 게지요?”

“네가 준 서책을 읽고 정신을 차렸나?”

처음엔 반신반의하던 사혜도 하루, 이틀, 사흘……. 달포를 기다려도 왕의 시비가 없자 맥이 풀린 눈치였다.

그럴 리 없는데.

곰곰이 턱을 어루만지다가 미심쩍은 눈초리로 운혁을 보았다.

“무슨 짓 하셨어요?”

내가 무얼.

태연히 어깨를 으쓱이는 기운혁을 꽁지에 매달고 사혜는 직접 왕도를 방문했다. 변복을 한 채로 저잣거리를 나돌아다니니 어렵지 않게 환골탈태한 왕의 소문을 접할 수 있었다.

한데 그 소문의 내용이 괴이쩍다.

“귀신 성현이 눌러 붙었나. 옥안이 푸르딩딩 죽은 게, 기가 아주 팍 눌려 보이더라니까. 머리가 회까닥한 건지 정신을 차린 건지 모르겠지만 그게 대순가? 왕이 사람 된 게 중요하지.”

문석후가 춤판을 접고 조회에 꼬박꼬박 나간다더라. 구휼미를 풀고 부정부패를 단속하고…… 이러쿵저러쿵. 기가 막힌 소문이 무성했다.

귀신 성현은 또 무슨 말인가 하였더니, 바른 일을 하는 것 치고 문석후는 늘 잠을 설친 사람처럼 눈이 검고 얼굴 거죽은 백지장보다 희게 질려 있다는 거다. 멀거니 허공을 보고, 손톱 끝을 닳도록 물어뜯는 등 없던 습관이 생겼단다.

버럭 소리를 지르거나 깨갱 움츠리는 등 퇴행한 면모도 빈번하다던데 다행히 정신은 멀쩡하다고.

“그렇습니까?”

“예, 어느 고마우신 귀신 성현이신지.”

깔깔대는 행인의 웃음소리가 볕이 쏟아지는 저잣거리로 활기차게 퍼져 나갔다.

왕도를 돌며 감찰을 마친 사혜는 운혁과 함께 산가로 돌아왔다. 의심을 떨치지 못한 사혜와 달리 그는 궁금할 것도 없는 얼굴이었다.

“정신을 차렸다면야 뭐, 다행인 일이지요.”

산의 초입에 들어섰을 땐 날이 저물고 있었다. 비탈에 길게 걸린 노을이 나란히 걷는 두 사람의 발끝을 비추었다.

자박자박, 신 밑창으로 돌 굴러가는 소리가 따스한 저녁 풍경에 녹아든다.

아, 그러고 보니.

“운혁.”

성가신 문제도 해결되었겠다, 이제는 말을 해야지.

배를 톡톡 도닥인 사혜가 빙긋 웃으며 입을 열려던 차였다.

“사혜야, 날이 더워지기 전에 우리 여행이라도 갈까?”

운혁이 사혜의 손을 꼭 잡으며 웃었다.

“어디 먼 곳으로, 오래 떠나 본 적은 없었잖아.”

“가고 싶은 데라도 있어요?”

글쎄. 많긴 했다.

절벽 위의 보름달이 장관이라던 만월 폭포, 신선과 노루가 어울려 논다는 금자강 산, 아기 치마처럼 화사한 복사꽃이 만발한 수목원과 매년 꾸준히 찾아가는 나비들의 보금자리인 서래 들판.

모두 사혜가 가고 싶어 하는 장소들이었다.

그러나 장소가 중요할까. 함께 가는 이가 너라서 어디든 좋은 것이지.

“서래 들판부터 순회할까 싶은데.”

방방곡곡 유람이라도 다니자는 거냐며 사혜가 웃는다.

“이맘때쯤 가면 딱 좋겠네요.”

“가서 짐부터 싸야겠어.”

웃으며 말하니 노을이 담긴 붉은 눈동자가 기대로 어여쁘게 빛난다. 훈기를 머금은 바람이 사혜의 머리카락을 뒤로 길게 휘감았다.

여자의 주위에는 언제나 바람이 분다. 그 바람을 따라 운혁은 어디든 가고, 어디로든 찾아올 수 있었다. 기우는 버들잎처럼, 바람을 붙잡고 흘러가는 구름처럼.

네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었어요. 태…….”

운혁의 손을 꼭 잡고 재잘거리던 사혜가 아차, 싶었는지 입을 다문다.

태교 여행? 알면서도 모르는 척을 해 주었다. 아내는 언제 이 깜짝 선물을 남편의 품에 안겨 줘야 할지, 선물을 받은 남편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한껏 부푼 기대로 눈을 빛내고 있었으니까.

“정말 제가 가자면 다 가려고요?”

눈을 도륵 굴린 사혜가 애정 어린 목소리로 묻는다.

“네가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운혁이 사혜의 손깍지를 끼며 부드럽게 화답했다. 음, 그러면― 하고 말꼬리를 늘어뜨린 사혜가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으며 점찍어 둔 곳을 줄줄이 읊는다.

만월 폭포, 금자강 산, 보현 수목원…….

참다가 웃음이 터졌다.

“너무 많나요?”

“아니. 네가 가고 싶은 곳, 전부 가 보자. 오늘부터 하나씩 전국을 유람해야겠네.”

고개를 갸웃 기울인 사혜도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웃는 운혁을 따라 환한 미소를 띠었다.

맑은 웃음소리가 꽃망울 대신 푸른 잎사귀로 옷을 바꿔 입은 나무 사이로 퍼져 나갔다. 무르익은 봄을 지나 새 계절이 돌아오고 있었다.

* * *

범씨 아주머니는 약초를 담은 소쿠리를 옆구리에 낀 채 흥얼거리다 발걸음을 멈추었다.

낮은 돌담이 둘러쳐진 사혜의 집 앞이었다. 지나가다 생각이 나 들른 것이다.

“오래 떠나 있을 거라고 했지.”

새하얀 아기 신을 소중히 챙겨 넣던 부부의 모습이 그려진다. 옆에서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 언뜻 무뚝뚝해 보이는 남편의 얼굴도.

처음엔 마을 사람들에게 벽을 치길래 제 아내에게도 무정한 이인 줄 알았는데 웬걸, 웃기지도 않은 착각이었다.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 하며 어깨를 감싸는 손이며. 저만한 팔불출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아내만 보는 배꽃 같은 사내였다.

지켜보면 어찌나 부럽던지. 범씨는 집으로 돌아가 엄한 남편 등짝을 두들기곤 했다.

“언제쯤 돌아오시려나.”

일전에도 부부가 말없이 훌쩍 떠난 적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한바탕 난리가 나서는, 무녀님이 영영 떠나셨다며 사혜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과 작은 절을 뚝딱 지어 놓았다.

그 절이 지금은 어머니의 사당으로 쓰이는 모양이나.

범씨는 오색 끈이 매달린 사당의 처마를 바라보았다. 다시 돌아오겠다는 사혜 나름의 표현이었다.

오래 걸릴 것 같으니 기다리진 마시라고 했다. 그래도 저 오색 줄 하나에 안심이 된다.

무녀님께서 아기를 위해 좋은 것만 보고 듣고, 먹고 오시려나 보다. 좋은 사람과 함께.

돌아오실 땐 둘이 아니라 셋이겠구나. 부부를 닮아 아기는 어여쁘겠지.

그리고 사랑도 많이 받을 것이다. 베풀고 나누는 것이 일상인 부모의 덕을 보는 경우라 할 수 있겠다.

마을 사람들 중 부부를 싫어하는 이는 찾아볼 수 없으니, 틀림없이 너도나도 사혜의 아이를 제 아이처럼 귀애할 것이다.

범씨 아주머니의 입이 귀에 걸렸다.

아기 신뿐일까, 제 자식도 아닌데 해 주고 싶은 것이 어찌나 많은지. 사혜에게도, 운혁에게도, 아이에게도 말이다.

흥얼거리는 범씨의 목소리가 산길 아래로 오래도록 이어졌다.

<청연의 괴물 외전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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