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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4화 (85/86)

외전 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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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혜야, 잠깐.”

저 귀신과 오늘 끝장을 봐야겠다.

숲길을 빠져나온 운혁은 의아해하는 사혜의 양 뺨에 가볍게 입술을 대었다. 요 며칠 맥을 못 추는 듯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아내를 조심히 방에 들이고 따뜻한 이불을 펴 주었다.

“어딜 가세요?”

“음식은 내가 내려가서 나눠 주고 올게. 아까부터 곤해하던 거 알아. 그러니 한숨 자고 있어.”

“사람들이랑 말 섞는 거 안 내켜 하시면서.”

“정 많은 네 옆에서 산 세월이 몇십 년이게.”

부듯이 웃은 사혜가 음식 장만하느라 고생한 운혁의 손등을 문지르며 말했다.

“예, 한 것도 없는데 자꾸 졸음이 쏟아지네요……. 그럼, 부탁 좀 할게요.”

“푹 쉬고 있어.”

손가락에 감기는 머리칼을 쓸어 준 뒤 운혁은 마당으로 나왔다.

댓돌에 둔 신 뒤축을 밟고 일어서자마자 담장에 철썩 붙은 귀신과 눈이 마주쳤다. 훔쳐본 것이 찔렸는지 히죽대다가 바로 입을 연다.

“허란위. 그 여자 죽은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무덤 안에 웅크리고 있어. 망령 된 충격에 들들 떨고 있더라고.”

“…….”

“목소리만 웅얼웅얼. 그래도 60일 안에는 무덤 밖으로 나올 테니 기다리든가. 다들 거치는 일이니까.”

“늦어.”

싸늘한 시선에 귀신은 나보고 어쩌라고? 했다.

빤히 뚫어 보는 운혁의 시퍼런 눈동자가 가늘어진다. 본디 귀신은 저보다 영력이 강한 상대 앞에서 찌부러지기 마련인데, 이 여자는 운혁의 앞에서도 주눅 드는 법 없고 빈정대는 게 보통 담력이 아니다.

운혁은 돌담에 양팔을 걸치며 떠보듯 물었다.

“옥수댁?”

귀신은 분명 자신을 그렇게 소개했었다.

“내가 그리 말했던가?”

한숨을 내쉬자, 똑같이 건방진 태도로 여자가 되물었다.

“망령들은 그쪽을 토지신으로 알던데. 아니지? 잡스런 요귀 주제에 누굴 속이려 드느냐. 저 무녀 옆에서 지금까지 꽁꽁 잘도 감추며 살았구나. 피는 못 속이지, 악랄한 요귀 새끼야.”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더라 싶더니.

공중에서 빙그르르 춤추는 귀신을 무덤덤히 보니 여자는 되려 못마땅한 기색이었다.

“별 잡스런 것이 꼬여서는.”

“생전에 굿판 좀 벌였어?”

객사한 망령 따위가 그의 정체를 간파할 린 없고.

“무녀였나.”

그러나 그 대단한 홍사혜조차 그의 본질을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하잘것없는 귀신 따위가 무어라고 알겠는가.

날카롭게 벼린 시선으로 귀신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벌레 먹은 옹이처럼 우묵하게 팬, 섬뜩하나 어째서인지 슬픔이 어룽진 눈동자를 오래도록 보았다.

여자의 으깨진 얼굴이 안개에 감싸이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든 것 없이 꺼먼 눈두덩에 붉은 이채가 서렸다. 피를 뒤집어쓴 얼굴은 고운 살가죽으로 덮인다.

이건 또 무슨 재주인가 싶어서 관망하던 운혁의 미간에 세로줄이 그어졌다.

하.

“어르신.”

“쯧, 어릴 때……. 그걸 어릴 때라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너 따위 것을 못 알아보고 병든 환자라고 생각하며 정성스럽게 돌본 걸 생각하면 나도 퇴물이었지.”

사혜의 어머니였다.

“계속 지켜보고 있으셨나.”

“곧 떠날 거다.”

사혜의 얼굴을 제외하고 기억에 남는 사람들의 얼굴은 많지 않다. 하물며 아버지 얼굴도 기억 못 하는 그인데.

다행인 건, 사혜를 닮은 사혜 어머니의 용모가 기억 속에 어렴풋이 남아 있다는 점일까.

하나 이런 모습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왜 골통 깨진 용모를 하고 나타났는지 모를 일이었다.

한순간 맥이 풀린 운혁은 돌담에 기댄 몸을 바르게 폈다. 노인은 사혜가 들어간 방문을 빤히도 지켜보는 중이었다.

“한번 인사해 주시지. 많이 그리워하는 것 아실 텐데.”

주저하던 노인이 느릿느릿 고개를 휘젓는다.

“끝까지 매정하시네.”

“그 애가 행복하길 바라. 내 초상화 보고 엎드려 우는 걸 봐도 가슴이 녹는데, 내가 눈앞에 나타나면……. 날 보고 우는 사혜를 보면 미련이 남아 이곳을 못 떠날 거다.”

잠시 침묵한 운혁이 사이를 두고 말을 이었다.

“그 모습은 뭐고요.”

“네 놈이 내 딸한테 어쩌는지 봐야지. 네가 알던 생전의 모습대로 접근하면 사혜에게 잘해 주는 척을 할지, 그게 진심인지 어찌 알아.”

별것을 다 걱정하신다.

지켜보니 어떻냐고 묻자, 노인은 또 묵묵부답이었다.

“진원은 만나 보셨나?”

그때까지도 사혜가 잠든 방에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던 노인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얼른 아들 있는 곳으로 가셔야지. 기다릴라.”

“가야지.”

쓰게 웃는다.

형형한 심지가 수그러든 여자의 눈발은 늙고 지친 짐승 같았다. 툭 건들면 굵은 눈물이 힘없는 살가죽 위로 하염없이 흘러내릴 것 같기도 하다.

주름진 눈가가 일그러지도록 웃는데, 사혜 대신 노인을 볼 수 있어 차라리 다행이었다. 감정의 변화가 적은 그조차 외면하기 어려운 울음 같은 미소인지라.

그런 어머니의 얼굴을 본 사혜는 틀림없이 슬퍼할 테니까.

“너 같은 놈이 사혜의 곁에 있는 게 마음에 안 차지만.”

“나 같은 놈이 뭔데.”

“무어긴. 후려쳐서 봉인할 잡스런 요귀지.”

투박한 말투에 웃어 버렸다. 어머니께 섭섭한 일이 많았다고 입버릇처럼 얘기하던 사혜가 이해되는 순간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혜에게서 눈을 못 떼는, 소 같은 노인의 눈은 분명 딸을 아끼는 어머니의 것이었다. 퍼 주지 못했던 가없는 사랑, 그래서 더욱 후회되는 사랑과 죄책감. 그런 것들이겠지.

“사혜는 내 전부야.”

걱정 말라는 말에도 노인은 여전히 못 미더운 표정이었다.

“누구처럼 마음고생 안 시키고 죽을 때까지 아껴 주다가 나중에 같이 어르신 찾아가려니까 걱정 놓으시지.”

그러니. 노인이 개미처럼 중얼거리더니, 흘흘 웃으며 또렷이 입소리를 낸다.

“내 손주의 아비이니 믿어야지.”

손주? 운혁이 가늘게 눈을 찌푸리자, 노인은 애 아빠가 눈치를 개밥 말아 먹었냐며 타박이었다.

“눈치가 참. 말하지 않아도 눈치껏 챙겨 주어야 아내한테 오래오래 어여쁨 받지.”

사고가 잠깐 뚝 끊긴 기분으로 운혁은 입술을 달싹였다. 머릿속으로 쳐들어온 말을 열 번쯤 곱씹고 나서야 그 의미가 와닿았다.

“사혜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살짝 벌린 입을 다물고 뻐근한 가슴께를 짚는데, 그 순간 무어라 형언 못 할 감정이 밀려들었다.

“하.”

퇴물 다 되었네.

뺨을 쓸어내린 운혁이 기가 막히다는 듯 실소했다. 자신의 무심함에 혀를 씹게 된다.

왜 몰랐을까? 아니, 사혜의 임신을 모를 수가 있나. 늘상 곁에 끼고 살아 티끌만 한 변화도 귀신같이 감지한 그이거늘.

하물며 사혜의 아이라면 당연히…….

“그것이지. 아기가 신기가 없거나, 자네까지 속일 정도로 대단하거나. 무녀 피는 어디 안 가. 그러니 후자에 가깝겠지.”

어느덧 부드러워진 노인의 말투와 변화한 호칭까지 알아챌 겨를이 없었다.

아기. 사랑하는 사혜와 나의 아이.

둥둥 뛰는 심장 소리가 먹먹한 귀로 점점 크게 울렸다. 귀부터 시작해서 발끝까지 번지는 북소리가 어지러워 크게 심호흡했다. 뻐근한 안쪽에서 무언가가 부풀어 터지는 기분이다.

운혁은 이 감정을 무엇으로 정의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노인은 아는 눈치였지만.

후우우, 긴 숨을 뱉으며 입가를 매만졌다. 입꼬리가 휘어지다 못해 찢어질 것 같은 와중에 마른침을 삼켰다.

“누구 자식 아니랄까 봐.”

얼마나 대단한 아이가 세상 빛을 보려고 이러나. 벌써부터 기대가 되어 밤잠을 설칠 것 같다고 하면, 사혜는 설레발이라고 웃으려나.

당장 달려가 이불에 감싸여 세상모르고 자고 있을 고운 아내를 꽉 부둥켜안고 싶었다.

“여자아이, 남자아이?”

“그건 자네가 맞춰 봐. 마을 하나 뒤집어엎을 요기를 가졌으면서 이름값을 너무 못하는 것 아닌가?”

“퇴물이라서 그래.”

“해서 이제 작정하고 사람 행세하며 살겠다고? 못난 것. 무엇이 됐든 사혜 마음 아프게만 하지 마. 문석후 그놈은 내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걱정 말고.”

“……어쩌시려고.”

“요귀야. 내가 아직 안 죽었단다.”

실력을 두고 하는 말이겠으나, 귀신이 죽느니 마느니 하는 농이 웃겼다.

“둔갑술 보고도 느끼는 바가 없어? 허란위 거죽을 덮어쓰고 문석후의 꿈을 헤집어 놓는 건 식은 죽 떠먹기보다 쉬워. 상놈의 새끼를 호되게 찔러 주어야지. 어딜 내 딸을 건드려.”

얼마 못 가 공손한 자세를 갖추게 되었지만 말이다.

“부탁드려요.”

“그 애를 위해 무언들 못 하겠어. 살아 있을 적엔 해 준 것도 없으면서 죽은 뒤에나 이런 말 우습지만.”

사혜의 어머니보다 믿음직스러운 이가 또 있을까. 무얼 하실 작정인지는 모르겠으나 앞으로 문석후가 감시 운운하며 사혜에게 치근덕댈 일은 없을 것이다.

진짜 허란위를 찾아, 삐딱선 타는 자식 앞에서 불구덩이에 끌려 들어가는 허상이나 보여 주려 했는데. 사혜 어머니는 더 억세고 가차 없는 방식으로 문석후의 정신머리를 교육해 줄 게 분명했다.

“이제 나는 가야겠구나.”

눈가를 일그러뜨리며 웃던 노인이 고개를 돌려 운혁을 보았다.

“왔다 갔다고. 내가 오지 않았다고 슬피 울지 말라고 사혜에게 전해 주어. 내 아가, 멀리서 언제나 지켜보고 있겠다고.”

“예.”

“우리 사혜 행복하게 해 주렴.”

운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는 모습 못 보겠다며 끝까지 딸 앞에 나서지 않고 떠나는 게 노인다웠다.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에 실린 노랫소리가 두 사람 사이로 맑은 물처럼 흘러들었다. 잠에서 깨어난 사혜가 배 속의 아기에게 노래를 불러 주는 모양이다.

앙상한 손으로 나풀거리는 치맛자락을 쥔 노인은 사혜의 노래를 오래 귀담아들었다. 어여쁘다, 쓸쓸히 중얼거리는 목소리도.

“어여쁘지, 그럼.”

그래, 누구 딸인데. 세상에서 제일로 곱지.

흘흘 웃으며 속삭이는 소리가 점차 흐려진다. 아름다운 가락에 홀려 있던 운혁은 헛헛한 느낌에 뒤를 돌아보았다.

텅 빈 마당과 부연 햇살 조각. 향긋한 봄바람에 실려, 노인은 머나먼 곳으로 떠난 후였다.

* * *

삐걱, 문을 밀고 들어서자 배 위에 양손을 얹고 흥얼거리던 사혜가 반갑게 맞이했다.

“벌써 음식 돌리고 오셨어요? 애들이 그때 맛있게 먹었던 게 생각나서 간식도 챙겨 넣었는데요. 밑에 끼워 둬서 혹시 못 보셨음 어쩌나 싶어서.”

“전병 사이에 둔 메밀떡이랑 과편? 다 나눠 줬으니 걱정 마. 좋아하더라. 왜 무녀님은 안 내려오셨냐며 날 잡아당기는 통에 소매도 튿어졌어.”

버선발로 들어온 운혁이 키들대는 사혜의 옆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사혜를 찾는 아이들에게까지 질투했다는 말은 차마 못 했다. 애들뿐일까. 어여쁜 건 알아 가지고 사혜에게 수작 부리려는 귀신들을 쫓아내려는 본질 역시 투기였다.

매일 부대껴 익숙해지기는커녕 나날이 조바심이 나니 중증이구나.

한숨처럼 웃은 운혁이 사혜의 손등을 감싸며 물었다.

“몸은?”

“자고 일어났더니 개운해요.”

푹 자고 일어난 얼굴이 보얗게 피어 있었다. 해시시 웃는 그 뺨에 운혁은 입을 맞추었다.

끝부터 빨갛게 물이 드는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겨 주며 생각했다.

그래서 언제쯤 내 아내는 기쁜 소식을 전해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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