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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3화 (84/86)

외전 3화

제사 음식 준비도 막바지였다. 사혜의 어머니가 좋아하셨던 산채전, 뽕잎밥과 울금백합죽, 그리고 참모싯잎떡까지. 마지막으로 조기와 꼬막을 올린 뒤 운혁은 귀신에게 돌아섰다.

새파란 눈이 가늘어진다.

저것을 언제까지 지켜봐야 하나. 번들거리는 눈으로 사혜를 훔쳐보는 꼴을 보니 곧 사달을 낼 것 같은데.

스무 날 동안 가만 지켜보면서 무얼 노리는 것인지 모르겠다.

“냄새 한번 기가 막히네. 직접 한 거야?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산 공자처럼 생겼는데.”

건들대는 귀신을 무시하고 말했다.

“왕후 허씨 좀 데려와 줘. 정승 치백의 여식 허란위. 문석후의 어미인데, 아들 이름 석 자 꺼내면 펄떡 튀어올 테니.”

꿍꿍이를 모르니 냅다 윽박지를 수도 없고.

요귀야 퇴치하면 그만이지만 생에 미련이 많은 귀신은 성가시다. 수틀리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꿈속에서도 달라붙어 고혈을 짜낼 테니까.

“허란위?”

도포를 털며 일어난 운혁이 귀신을 빤히 보았다. 알겠다며 히물쩍 웃고 떠난 귀신이 찝찝하기 이를 데 없었다.

* * *

사혜는 비뚤어진 초상화를 바로 세우고 제단 뒤로 물러났다.

“잘 지내시죠?”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향불 연기에 섞여 퍼져 나간다. 사혜는 조용히 타오르는 향초를, 그 너머에 걸린 어머니의 초상을 한참 보다가 싱긋이 웃었다.

“어째 한 번도 찾아오질 않으셔요.”

귀신 보는 무녀야 특별할 것도 없다. 신기가 강한 만큼 시야도 넓어지고, 알고 싶지 않은 것도 깨닫게 되고, 무뎌지다가 때로는 날카로워지다가. 그렇게 살아가는 법이니까.

운혁은 귀신의 훈수 같은 건 무시하라며 사혜의 눈 귀를 닫아 주었다. 하나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까지 막을까.

사혜는 기다렸다. 수많은 방랑 귀신들이 영기에 끌려 신당을 찾았고, 기꺼이 쉼터를 내어 주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모습을 한 귀신은 없었다.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참, 어머니답다고 해야 할지.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메마른 땅에 붙박인 귀신이야말로 한이 넘친다는 증거이니.

제 몫을 해내며 잘 살아가는 딸을 먼 곳에서 보고 계신가 보다. 얼마나 다행인가. 걱정을 훌훌 떨치고 편히 눈 감으신 것 같아 마음은 가볍다.

그래도 오시면 전해 드릴 말이 있었는데. 고생만 하고 떠난 진원에게도, 끝까지 증오 속에서 사람을 등진 어머니께도 할 말이 있었다.

당신은 그러지 못하셨으나 나는 이 땅과 사람을 사랑한다고. 살아 보니 팍팍하기만 하지는 않더라. 물론 문석후처럼 눈꼴 시린 인간들도 껴 있으나 여전히 기쁘게 구명을 업으로 삼는다고 말이다.

“이제 혼자도 아니고요. 챙겨 주는 이도 많고, 고맙게도 저와 운혁의 복을 바라 주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 것은 해 주는 것만 익숙했는데.”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며칠 전에는 산 아랫마을 범씨 아주머니가 다녀가셨는데요.”

갓 찐 시루떡과 향긋한 봄나물, 젊은 부부가 힘쓴다고 고생한다며 굴과 장어 한 토막, 잣으로 쑨 보양식까지 살뜰히 건네주고는 초롱한 눈으로 떠나갔다.

“저랑 운혁이 좋아하는 음식이 한 보따리였는데. 저는 입에 대지도 못했지만요.”

범씨 아주머니 말로는 입덧이 조금 심한 편이라고 했다. 물 내음뿐일까, 가리는 것 없이 툭하면 헛구역질이 치미니 보통내기가 아니라고.

언제까지 어미를 고생시킬 셈이냐며 사혜의 뱃속에 든 아기에게 밉지 않은 타박을 놓기도 했다.

그래도 버틸 수준이었는데, 근래엔 심해져서 더 숨기기가 어렵겠다는 판단이 섰다.

좋아하시겠지.

기뻐할 운혁의 모습이 그려지자 웃게 된다. 염려도 배로 늘 테고, 제 발로 걷지도 못하게 업고 다닐지도 모른다.

해서 든 생각은 우선 문석후부터 해치우고 임신 소식을 알려야지 싶었다.

매해 함께 준비해 온 제사 음식도 이번에는 운혁 홀로 도맡았다. 사혜가 그저 아픈 줄로만 아는 사내는 염려스러워하며 제사상 차리기에 열심이었다.

“사위가 참 든든하지요? 어머니.”

사혜가 배 위에 손을 올렸다.

시간이 아주 느리게 풀어진 실타래 같다. 그 속에서 나른히 눈을 감자, 흐트러진 감각이 하나로 모이며 선명해졌다.

포근한 바람, 지저귀는 산새 울음, 그 속에 스며든 기운혁의 두런거리는 말소리. 무릎을 따뜻하게 적시는 햇살과 익숙한 향불 냄새.

“어머니.”

조심히 운을 띄웠다. 입술을 달싹이다가 다물기를 반복한 사혜는 무릎에 둔 손을 꽉 맞잡았다.

마른 입술을 몇 번이나 적시고서야 속에 오래 묵혀 둔 마음을 꺼냈다.

“태어나려면 한참이 남았고 느껴지는 것도 아직은 아무것도 없지만, 뱃속에 든 게 어찌나 소중하고 애틋한지 몰라요.”

시들 일 없이 무한히 그 사랑은 자라겠지.

그래서 이해해 보려고 했다. 이제 사혜 자신도 어머니가 되었으니 되돌아가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해 보고자 했으나 한 꺼풀, 한 꺼풀 벗길수록 씁쓸함만 남았다.

아들 잃은 슬픔으로 딸까지 방치한 어머니는 왜 내게 그리할 수밖에 없으셨는지.

많은 것을 비우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살아온 삶이다. 돌아가신 어머니는 귀신으로도 찾아오는 법이 없으니 그 의문은 늘 꼬리를 문 채 가슴을 허하게 맴돌 것이었다.

속이 허해지는 슬픔이지만,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매해 어머니의 기일이 되면 속풀이 하고자 다짐해도 때가 되면 엄한 말만 늘어놓으니, 이것은 원망이 아닌 투정쯤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사혜는 한숨을 내쉬며 웃었다.

“책임질 이가 하나 더 늘었다고 부쩍 어머니 생각이 자주 나네요.”

불씨가 사그라든 향초를 거두어들였다.

“저는 행복하게 잘 살고 있어요.”

들쑥날쑥한 감정 탓일지도 모르겠다. 어머니 얼굴을 물끄러미 보는데 어쩐지 목이 메는 기분이라 한참을 뜸을 들였다.

멀리서 사혜야, 하고 부르는 운혁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밀려들었다.

“그러니 다시 만날 때까지 어머니도 그곳에서 행복하셔요. 진원 오라버니께 안부 전해 주시고요.”

이것이 우는 건지, 웃는 건지. 그녀를 뿌리처럼 이 땅에 붙들어 주는 기운혁의 목소리에 미소가, 쌓인 감정이 눈물로 맺혔다.

떨어지지 않고 아슬하게 매달린 설움은 곧 햇살과 함께 눈꼬리 안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고 산전수전 겪으며 살아온 생이 긴데, 어머니 앞에서만 영락없이 열세 살의 홍사혜로 돌아가니 큰일이다.

사혜는 마른 소매로 눈가를 눌러 닦고 세 번 절을 올렸다. 어머니께 술잔도 채워 드리고 생전 좋아하셨던 음식 위에는 젓가락까지 올려 두었다.

크게 심호흡한 뒤 어머니의 눈을 보고 웃었다.

“사실은 누구보다 제 행복을 바라신 거 알고 있어요.”

그것이 아마도 표현하지 못한 당신의 마음일 테니.

찰랑, 술잔에 담긴 술이 흔들렸다. 잔을 가져가 부딪치자 쨍하고 맑은 소리가 난다.

따스한 바람을 맞으며 어머니와 대작을 한 사혜는 이만 무릎을 짚고 일어났다. 밖으로 기운차게 나아가는 사혜의 뒤로 맑은 풍경 소리가 선율처럼 울려 퍼졌다.

* * *

올해에도 음식을 너무 많이 해서 남는 게 반이었다.

새처럼 적게 먹으면서 무얼 이리 많이 준비했느냐고 물으면, 사혜는 아랫마을 이웃들 몫이라 우겼다. 그 심지 굳은 목소리가 운혁을 웃게 했다.

내 아내는 손도 크지.

없어도 그만인 이들에게 꼬박꼬박 찾아가 교류하고, 담소를 나누고. 기분 좋은 날엔 술잔을 나눠 마시며 두런두런 살아가는 얘기도 한다.

처음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어느 날 보니 운혁도 사혜의 곁에서 이웃들과 말을 나누고 있었다.

‘범씨 아주머니 오신대요. 제사 음식 돕겠다고 하시길래 말리니 치우는 거라도 돕겠다며……. 와서 음식이나 가져가시라 했죠. 아주머니도 줄 것이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무얼까요?’

아내는 특히 범씨 댁과 친했다. 부부가 함께 찾아오기도 하는데, 처음엔 오십 줄 넘은 영감이 내 아내를 노리는가 했으나 알고 보니 그저 정 많은 영감이었다.

솔잎주가 기가 막히다는 영감의 넉살에 못 이겨 한잔 걸쳐도 보았다. 알근하게 취하는 기분에 긴장이 풀려서 몇 마디 나눴던가.

사혜 앞에서만 풀어지던 미소를 그때에는 조금 보였던 것 같기도 하다.

날카로운 가시가 깎이며 뭉툭해진다. 웃는 날도 착실히 쌓여 갔다. 그런 기분을 사혜의 곁에서 하나씩 알아가는 기분은 무어라고 해야 할까.

옛적 사람을 동경하던 시절, 그가 간절히 알기를 바라고 또 그리워하던 느낌과 같아서.

“여기 있었어요?”

듣는 것으로 애틋해지는 목소리가 있다.

그릇을 내려놓은 운혁은 고개를 들어 사혜를 보았다. 걸음마저 나비처럼 춤을 추듯이 우아한 여인. 햇살에 감싸인 얼굴에 초승달 같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넋을 놓고 한참 동안 보았던 것 같다.

“꼼꼼히도 닦으셨네. 음식 하느라 고생했어요.”

가지런히 정리해 둔 제기가 만족스러웠나 보다. 사혜가 그의 뺨을 쓸며 웃어 주었다.

아내의 관심에 늘 목이 마른 사내는 여인의 손에 짐짝처럼 들린 소쿠리를 빼앗고 다정히 입을 맞추었다.

손깍지를 끼고 나란히 어깨를 맞댄 채 숲길을 걷기 시작했다.

“아주머니 안 오셨지요?”

“대낮부터 취한 남편 수거하러 가야 한다고 조금 늦으신다네.”

“언제 한번 일 치르실 줄 알았지. 술 좀 줄이셔야 한다고 골백번은 말한 것 같은데. 아주머니가 얼마나 속을 썩이시는지 몰라요.”

한참을 웃고 떠들며 걸었을까. 운혁은 문득 스산한 기척을 느끼고 걸음을 늦추었다. 뒷덜미를 베는 익숙한 감각에 뒤를 돌아보자 사혜도 덩달아 멈추었다.

“운혁?”

또다. 망할 놈의 골통 깨진 귀신.

그것이 시켜 둔 일은 안 하고 나무 뒤에 숨어 사혜와 운혁의 뒷등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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