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화
꽁꽁 싸매고 혼자 보기도 아까운데 인간, 귀신 할 것 없이 꼬여 드는 파리 떼가 갈수록 늘어나니 운혁은 골이 아팠다. 사혜의 천성이 고운 걸 알아서 그러는 거다.
제발 손 좀 빌려주십쇼, 한 번만 도와주십쇼, 억울함 좀 풀어 줍쇼.
이 한마디면 사혜는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이니까.
먼젓번에는 남부의 군수였다가, 전쟁통에 다리 잃은 귀신이었다가. 이번에는 난군(亂君)이라 소문난 왕이던가.
턱을 괸 운혁이 독서 중인 사혜를 바라보았다. 어느덧 길게 자란 머리카락과 흰옷에 감춰진 아담한 몸태, 팔락거리며 종이를 넘기는 소리.
한 폭의 그림 같은 광경을 눈으로 쓸면서 자연히 입에 걸린 미소는, 얼마 못 가 일자로 굳었다. 책 옆에 놓인 왕의 전교 탓이다. 두말할 것 없이 사혜의 도움을 청하는 내용이다.
저걸 모르는 척 찢어 버릴 수도 없고.
“이번엔 며칠 만이지?”
“보름이요.”
“근성 한번 대단하네.”
사혜가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왕의 청을 벌써 두 번이나 거절한 참이었으나 이 까막눈 걸주께서는 포기를 몰랐다.
“좋은 의도로 나를 부른 것이 아니란 건 압니다. 한데 소문 때문에라도 가지 않을 수가 있어야지요.”
사혜가 미간을 찌푸리며 서신을 펼쳤다.
친필 전교의 끄트머리에는 문씨 왕조 21대 왕 문석후의 수결이 찍혀 있었다. 내용은 새로 태어날 왕자를 축복하기 위해 풍수지리를 고려한 지역에 법굴을 지었는데 달포도 못 가서 요귀 떼가 출몰했다는 것이다.
갖은 공을 들인 터라 때려 부수는 꼴은 못 보겠고, 근방의 무녀들을 불러 봉인진을 쳤으나 무소용이란다.
그러니 홍 무녀님께서 친히 걸음 해 주시고, 겸사겸사 왕자의 앞날에 축사도 내려 주면 이 은혜 길이길이 잊지 않겠다고.
겉보기엔 문제가 없지만 뜯어보자면 참 수상쩍은 내용이었다.
“한번 기어 나오면 줄줄이 꿰이는 게 요귀인데. 차라리 장소를 옮기지, 구태여 너를 불러? 속이 훤하구나.”
“아니까 더 성가신 겁니다.”
사혜가 봉투를 접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 자그마한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이 마음에 탐탁지 않다.
가뜩이나 요즘 체력이 달리고 잠이 많아진 사혜인데. 밥도 참새처럼 깨작깨작 씹으며 밤에도 뒤척이는 사혜인데.
곤란해하는 사혜의 눈을 들여다보는데 속이 끓었다. 빌어먹을 왕 같으니.
서신을 받은 첫날엔 이전처럼 서로가 대수롭지 않아 했다. 모자란 왕이 불로의 몸을 가진 무녀를 꾸역꾸역 불러내 또 시비를 털려 드는구나. 무시하면 그만이지.
사혜도, 그도 왕의 전교는 뒷전이고 평소처럼 다정히 시시덕댔다.
개나리가 만발한 뒷산을 거닐고, 미래 계획을 세워 보다가 아이 얘기가 나오면 좋아하고. 꽃이 오종종 핀 들판이라면 어디든 자리부터 잡고 정다운 잉꼬처럼 노닐었다.
꽃놀이하기 좋은 봄이었다.
그러다 둘째 날엔 힐끔 시선이 갔다. 방 귀퉁이에 뒹굴고 있는 서신을 애써 무시했는데, 셋째 날엔 신경 줄이 긁혔다.
“이거, 모르쇠로 넘기니 뒤가 찝찝하여서요.”
“나랏돈 받아먹고 일하는 치들은 귀양이라도 보냈나. 부리는 수족들은 어디에 팔아먹고 부득불 너를 찾으니 오죽 수상해?”
“벌써 세 번쨉니다. 이번에도 흘려 넘기면 나도 가만있지 않겠다, 뭐 그런 협박으로 들려서요.”
사혜가 옆에 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며 담담히 말했다.
“염려 마세요. 별일 아닐 겁니다.”
운혁은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렸다.
별일 없을 거라곤 하지만, 문석후가 누군가? 탐욕이 지네처럼 득시글대는 자가 아니던가.
백성은 나 몰라라 하고 나랏돈은 어디로 새는지 모르고. 주야장천 연회에 춤판에, 주색은 또 어찌나 밝히시던지. 이름난 기생은 물론 지아비 있는 아리따운 아낙까지 탐을 내며 궁으로 불러들였다.
천하의 난봉꾼 주제에 욕심보가 두둑한 왕은 제 자리를 위협하는 존재에 치를 떨어 했다.
왕이 다음으로 의심의 불씨를 던진 것은 늙지 않는 나비 무녀였다. 왕은 거절의 뜻을 비친 홍사혜를 아득바득 연회에 초청하더니,
‘홍 무녀께서 백성들의 존경을 받으신다고 소문이 자자하시더라. 이리 모시게 되어 영광이오. 하여 무녀님께서는 신년을 기준으로 몇 해를 사셨는지, 정녕 영생의 몸인지 물어도 되겠소? 산속에 틀어박혀 사니 알 길이 있어야지.’
얇은 피륙으로 얼굴을 가리고 온 사혜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데 여전히 얼굴을 보여 주지 않으시는군. 아하, 귀한 몸이시다? 그래, 일리 있소. 내 홍 무녀 같은 존재는 처음이라 호기심이 많으니 무람없는 질문도 이해해 주시구려.’
그리곤 사혜의 답을 받고 첨언했다.
‘고작 그런 대가를 받고 백성들을 돕다니. 과한 노고와 희생정신을 높이 사는 바이나 항간에 이런 소문이 돌더랍니다. 홍 무녀야말로 하늘이 내려 주신 왕이 아니냐고. 무지렁이 같은 백성들이 살길 찾았답시고 내던지는 우스갯소리겠지만. 안 그렇소?’
웃는 꼬락서니가 가관이었다.
흥 나는 척, 비뚤어진 입술과 꿍꿍이가 담긴 눈동자는 사혜를 샅샅이 훑어보기 바빴다.
‘사람이라고 볼 수도 없고, 불로의 속성은 요귀와 같은데……. 미련한 백성들이 미신에 심취할까 우려되오만, 왕궁 소속의 무녀도 마다하고 홍 무녀를 찾으니. 거참!’
그거야 네 놈이 풀어 둔 왕성의 무녀가 부적값을 후려치고 별것도 아닌 굿에 반년 치 품삯을 받아 가니 그렇지, 모지리 같은 왕아.
요귀가 시들해졌다곤 하지만 깔끔히 사라진 것도 아닌지라 백성들은 여전히 무녀들을 필요로 했다. 이게 수탈이 아니고 무언가? 사혜는 혀를 내둘렀다.
그런 주제에 왕은 술잔을 부딪치면서 무언의 압박을 보낸 것이다. 나서지 말고 얌전히 살라는, 뭐 그런 뜻이려나.
‘그러는 전하께서는 밤낮 마시는 이 술이 무엇으로 빚어졌는지, 수탈에 못 이겨 고향 버리고 떠난 화전민들이 무엇을 성토하는지 아시는가? 덕목을 잃은 군주를 지켜보는 백성만 애석할 따름이지.’
왕의 얼굴이 불탄 숯처럼 일그러졌다.
보아 하니 제 자리를 위협할세라 겁이 나는 모양샌데, 그리 찝찝하면 평소 행실을 바르게 쓰면 될 것을 말이다. 고작 그따위 흘러가는 소문에도 신경을 곤두세울 정도면 제 발이 저린 거겠지.
왕은 이를 갈며 사혜를 노려보았다. 저 면포를 확 벗겨서 얼굴을 보고 싶은 눈치였다.
사혜는 흥, 콧방귀를 뀌며 군주의 덕목을 60조목으로 정리한 고서를 두고 갔다.
그리 일단락되는가 싶었는데, 왕은 이후부터 사혜에게 틈틈이 밀사를 보내 감시하더니―
“결국 이렇게 나오시겠다.”
“위치가 어딘데?”
“호조원이요.”
“호조원.”
“예, 4년 동안 요귀의 ‘요’ 자도 구경 못 한 그 호오오조원의 법굴이랍니다. 무녀 앞에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도 아니고. 무시도 정도가 있지, 몰라보는 게 말이 됩니까? 풀 자락 뒤지면 새끼 지네 하나 굴러다닐 겁니다. 왕께서 지나가는 행인 발이나 걸고 싶어 하는 심보가 이리 훤히 보이니.”
사혜가 이를 뽀득 갈며 하는 말에 운혁이 낮게 웃었다.
“같이 갈까?”
“싫습니다.”
“왜.”
끌어당기려는 손과 은근슬쩍 도망치려는 몸의 힘겨루기가 있었다.
운혁의 허벅다리에 앉아 있던 사혜는 사내의 손등을 긁으며 손깍지를 풀었다. 한숨은 덤이었다.
“지나가는 여인 붙잡고 물어보세요. 어느 여인이 정인 앞에서 피를 뒤집어쓰고 칼부림하는 추태를 보여 주고 싶겠는지.”
깔끔히 처리하고 싶어도 요귀와의 혈투는 불가피하다.
“언제나 귀한 사람이고 싶지요.”
“아아.”
참 귀엽기도 하지, 내 아내는. 매번 함께 따라나서려고 할 때마다 막는 연유가 무엇인가 했더니, 요는 어여쁜 모습만 보여 주고 싶어서란다.
숨죽여 웃은 사내가 대답 대신 사혜의 뺨을 쓸었다. 그러다 곧 눈살을 찌푸렸다.
그간 잘 먹이고 잘 재워서 포동해졌나 싶었는데. 상투를 쥐고 흔들어도 시원찮을 왕이 사사건건 괴롭혀 댄 탓에 살이 내려 있었다.
마음이 쓰려 가만히 손바닥에 닿는 뺨을 어루만졌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저 혼자 가렵니다.”
“살이 왜 이렇게 빠졌지.”
“그건.”
오물거리는 사혜의 입술을 보다가 고개를 내렸다. 탐스럽게 부푼 입술을 베어 물자 향긋한 과일 향이 목으로 넘어왔다.
다시 떼었다가 이번엔 콧잔등에, 볼에. 촉촉 순흔을 남기다가 마지막엔 동그란 턱을 지분거렸다.
평소라면 안겨 올 테지만, 정신 빼놓으려는 수작으로 오인한 사혜의 입술이 고집스레 다물렸다. 들어가려는 기운혁의 혀를 막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이럴라구……. 공세를 해도 소용없습니다.”
하나 사혜의 빨개진 등은 운혁의 손에 붙들린 채 편안히 넘어가는 중이었다.
“얼마나 더 어여쁘게 보이려고 이럴까.”
“그러는, 도령도 내숭이란 내숭은 다 떠시면서.”
운혁은 웃음을 흘리면서 입술을 포갰다.
타액으로 물든 입술이 느리게 빨려 들어간다. 혀로 입천장을 문지르다 휘감아 당기는 감각에 사혜의 등허리가 바짝 움츠러들었다. 입 안 살점에 뜨겁게 붙은 살덩이가 지나치게 잘 느껴졌다.
어깨를 웅크린 사혜가 사내의 어깨를 두들겼으나 비비대는 혀는 끈질겼다. 섞이는 숨이 간지럽고 달다. 뺨부터 목까지 열기로 덮이는 와중에도 사혜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럼 안 되는데. 또 홀라당 넘어가면 큰일인데.
고삐를 쥐려 안간힘이었으나 이제는 마음을 배반하는 몸이 익숙했다.
이러니 무엇이든 적당해야 하는 것을. 밤마다 떠먹여 주는 쾌락에 익숙해져 이렇게 운혁의 손이 슬쩍 닿기만 해도 제멋대로 움찔대지 않나.
바닥을 짚은 운혁이 잠시 입술을 떼었다. 숨을 고르는 사혜와 눈이 마주치자 샐쭉 웃으며 입술 밖으로 빠져나온 사혜의 혀를 동글게 핥기 시작했다.
“아, 으. 잠깐.”
“좋다는데…….”
뜨겁게 달궈지는 숨이 민망할 정도다. 필시 문밖에서도 헐떡대는 소리가 들리고 말 것이다.
이러다 누가 오기라도 하면.
훤한 대낮이니 자중하자 했으나 소리부터 죽이려는 노력은 헛것이 되어 버렸다.
부들부들 떠는 아내를 흥미로운 눈으로 따라가던 기운혁이 사혜의 양옆을 짚고 몸을 숙였다. 조급하게 다가와서 벌어진 입술에 혀부터 집어넣었다.
각도를 달리한 콧잔등이 뭉근하게 비벼졌다. 운혁의 손이 장난치듯 치맛자락을 걷고 그 속에 숨은 하얀 허벅지를 꽉 움켜쥘 때였다.
“계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