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이후로 운혁이 내 귓가에 대고 조곤조곤 속삭이는 말은, 꼭 어느 먼 과거에 들어 본 기억이 있는 것처럼 익숙하였다. 아마도 이것은 내게 남은 전생, 홍운영의 기억일 것이다.
운혁은 자신의 몸이 다른 이들과 달라서 티끌만 한 혼이라도 남아 있으면 생을 거듭 피워 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생전의 업이 워낙 무거워, 지상에 다다라도 벌을 피할 길이 없어 줄곧 이곳 변두리 해안 마을에 묶여 100여 년간 땅과 바다를 돌보았다고 한다.
“하면 잡귀가 아니라 토지신이었습니까?”
어이가 빠져 캐물으니, 그는 해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 사람들은 도령이 토지신인지도 몰라뵈고 처치해야 할 잡귀라고 여기고 있구요?”
“그래야 너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서.”
무엇이 어찌 돌아가는지 모르겠다. 하나 복잡한 건 다 집어치우고 다시 눈앞에 나타난 애틋한 정인을 한껏 보듬어 안고만 싶었다.
먹먹한 콧잔등을 발개지도록 그의 어깨에 비비며 물었다.
“하면 이제부터는 계속 곁에 있는 것이지요?”
“해가 뜨면 떠나야 하지만 언젠가 너와 밤낮을 보낼 수 있게 되겠지.”
저지른 업보를 완전히 씻어 내기까지 그는 온전한 형체를 유지할 수 없다고 하였다. 가슴 아픈 사실이었다.
비록 하루의 절반만 곁에 머물 수 있으나 그 정도는 얼마든지 견딜 수 있었다. 세월은 내게 덧없는 파랑이고, 나는 그가 죄를 완연히 털어 내고 다시 내 품에 안길 때까지 언제든 기다릴 수 있었다.
강물이 치는 소리가 호젓한 밤바람을 타고 밀려들었다. 나는 달빛에 온전히 드러난 기운혁의 면면을 바라보았다. 낮 중에도 사람의 형상으로 보이긴 했다만, 그때에는 악귀처럼 눈코입 없는 시커먼 형상이더니, 밤중에 보니 저 달빛처럼 고운 용모를 가진 도령의 얼굴 그대로였다.
손이 잡히고, 입술이 만져지고, 코끝이 닿는다.
“도령께서 저를 이런 몸으로 만들어 버리셨으니 책임을 지셔야겠습니다.”
맞닿은 이마가 꾹 눌렸다. 달빛이 미끄럽게 떨어지는 사내의 미소가 가슴 저릴 만큼 아름다웠다.
이러다 또 애먼 소문이 나겠다. 나이 먹지 않는 귀인이 산속에 가옥을 짓고 사는데, 거기에 밤마다 나타나는 귀신같은 사내가 있다고.
입단속을 시켜도 그 오싹한 광경을 종들이 저들끼리만 알고 있을 것 같지도 않건만. 아무렴 어떠랴.
“연모해, 사혜야.”
벌써 몇 번째 나누는 고백인지 모르겠다. 우리는 부서지는 달빛 속에서 웃었다.
“이 말을, 사무치도록 전하고 싶어서 네게 돌아왔어.”
흰 벚꽃이 눈처럼 흐드러진 봄밤의 연. 하나뿐인 애달픈 정인은 돌고 돌아 내 품으로 돌아왔다.
몇천 년을 뛰어넘어 돌고 돈다는 전생은 우리에게 해당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청연, 그 이름대로 기운혁은 내게 강물처럼 맑고 깨끗한 인연이었으니.
100년도 멀다는 듯, 그 이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우리는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말이다.
* * *
결과적으론 사혜의 짐작이 맞았다. 소문은 발 여섯 개 달린 말이었다.
청리산 어드메에 덩그러니 지어진 두 칸짜리 가옥. 거기에 늙지 않은 아름다운 나비 무녀가 살고, 그 돌담 주변에는 사시사철 흐드러진 꽃망울이 움트는데, 그 집 종살이하는 아이들을 제하곤 누구도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더라.
호기심 많은 사내들이 아리따운 무녀님 낯꽃 한번 보자 싶어 발소리를 죽이고 다가갔으나 담을 넘기도 전에 꽁무니 빠지게 도망친 이유가 있었다. 그 집에 항상 둘러쳐진 안개 같은 시커먼 연기 때문이었다.
올망졸망 꽃이 핀 풍광과 퍽 이질적이었으나 무녀는 그곳이 극락인 마냥 가꾸었다. 거뭇한 안개를 옷처럼 두르고 한없이 즐거워 보이니.
수근대던 사람들은 가옥 뒤뜰의 봉분 세 개를 보고 저기에서 나온 혼백인가 보다 두려워했으나, 그 근처를 지나가던 퇴마사들은 아니라며 고개 젓기 일쑤였다.
“절색한 무녀를 욕심껏 취하기 위해 밤마다 귀신이 배 맞추러 찾아온다더라.”
결국 이렇게 소문이 나는 것도 모자라, 무녀의 집은 꼬마 아이들의 담력을 시험하는 장소가 되었다.
달이 뜨면 여인의 웃음과 사내의 노래가 한데 엉겨 불 밝힌 장지문을 넘었다. 아침에는 한 개였던 그림자가 해가 지면 둘이 되었다가 다시 하나로 엉긴다.
처음엔 모두들 무녀의 정신이 빠졌느니, 터가 좋지 않느니 우들우들 떨었으나, 그 무녀의 얼굴은 날이 갈수록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새색시의 것이었다.
정신이 나가기는커녕 쭈삣쭈삣 지나가는 아이들에게 설탕 입힌 과편을 한 움큼씩 나누어 주니, 이듬해에는 아이들이 외려 무녀의 집을 자주 찾아가 놀았다.
낮에는 아이들에 둘러싸여, 저녁에는 귀신 정인을 끼며 지낸다. 아리송한 의문만 남겨 둔 채 또 몇십 년이 흘렀다. 용하다고 소문난 나비 무녀의 제자 되기를 청하고자 그 집에 들렀던 이립 된 퇴마사가 말하길.
“귀신이 어디 있단 말이오? 내 보기에 훤칠한 옥 도령 하나만 보이는 것을.”
끌끌 혀를 차며 타박을 놓자 마을 사람들은 기함하였다. 그네들 눈에는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나 한 가지 변화가 생겼으니, 꽃핀 가옥 주변을 을씨년스럽게 에두른 검은 연기가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퇴마사님께서는 이제 나비 무녀님의 제자로 들어가시는 것입니까?”
비밀스러운 무녀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으며 캐물었으나, 그는 혀를 내두르며 진저리를 쳤다.
“내 말 무엇으로 알아들은 게요? 한 발자국만 더 가까이 갔다간 그 옥 도령한테 멍석말이를 당하고도 남을 걸세.”
옥 도령에 대한 괴소문이 일파만파 퍼지면서 청리산 무녀의 집 울타리를 얼쩡거리는 간 큰 그림자는 보이질 않게 되었다.
혹자는 이렇게 말했다. 무녀님을 탐내던 젊은 사내들이 불운을 얻게 되고, 이후로는 합이라도 맞춘 것처럼 꼬랑지를 내뺐다고 말이다.
* * *
“왜 그러셨습니까?”
“무엇을.”
냅다 쫓아낸 주제에 뻔뻔스럽기도 하셔라.
사혜가 머리를 땋아 올리다 말고 팔꿈치로 툭, 운혁의 등을 떠밀었다.
“배움을 얻으러 먼 길 오신 분인데, 쫓아내더라도 물이나 한 사발 내어 주시지.”
“농이지?”
물 한 사발도 아깝다는 듯 매정하게 구는 정인이었다. 느긋하게 몸을 일으킨 운혁은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머리카락과 전쟁을 치르는 중인 사혜의 허리를 안았다.
“이리 내. 해 줄게.”
“왼쪽 잡아 주세요.”
“이렇게?”
“예, 여간 거추장스러워야 말이죠. 전보다 넉넉히 먹고 사는 것도 아닌데 이놈의 머리카락은 틈만 나면 잡초처럼 자라나니 말입니다.”
치렁치렁 붉은 융단 같은 머리카락이 엉덩이를 덮고 바닥에 고여 있었다. 운혁은 웃으며 그녀에게서 빗을 받아들고 빗겨 주었다.
다 빗겨 놓자 사혜가 한 손에 가위를 들고 신중히 머리를 자르기 시작했다. 불편하다면서도 막상 자르니 아깝긴 한가 보다.
“옛날 생각나고 좋네. 꼭 너와 처음 만났을 때 같은걸.”
“그렇게까지 짧게 자르진 않을 거예요.”
운혁은 새침하게 입술을 비죽이는 부인이 어여뻐 이대로 끌어안고 바닥이나 뒹굴고 싶었다.
요 며칠 밤 인내를 배운 참이었다. 작일 밤에도 내내 이부자리에서 엎치락뒤치락한 까닭에 사혜의 눈 밑이 살짝 거뭇했다.
여명이 밝아올 때가 되어서야 부인의 몸을 정성껏 닦고 놓아주었는데, 본디 한번 불붙은 욕망은 끝을 모르는지라 아쉬움이 진하게 남았다. 이게 다 요귀일 적 욕망 탓이다, 라고 운혁은 스스로 합리화했다.
기진한 사혜는 해가 중천에 뜨고도 한참을 골골대다가 겨우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운혁은 그녀가 자는 시간마저도 애가 닳는 느낌에 괜스레 부인의 자는 뺨을 쓸어 보고, 머리맡에 코를 묻고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겨우 정신을 차린 사혜와 달리 운혁은 물을 듬뿍 머금은 산새풀처럼 싱그러운 아름다움을 뽐냈다. 하루가 다르게 꽃피는 낭군의 용모가 좋기는 부인도 매한가지라. 사혜도 면경에 비친 그를 보고 우물우물 입가에 손을 가리고 웃었다.
“앞마당에 해당화를 좀 심을까요?”
“그럴까.”
“담을 따라 향일화랑 같이. 아이들이 오면 좋아할 거예요.”
“어여쁘겠네.”
제아무리 아름답다 한들 눈앞에 있는 여인만 할까 싶지만.
꽃을 좋아하는 사혜 때문에 늘 이곳은 향기로운 꽃내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따스한 봄날의 훈기가 마당을 타 넘어 훤히 열린 문 안으로 밀려 들어온다.
“아이들을 보는 게 좋아?”
“아무렴 저리 맑고 깨끗한 영이 또 있을까요.”
그리 말하는 사혜의 볼은 은은히 붉었고 입가엔 수줍은 미소가 밝혀 있다.
발밤발밤 몰려와서 사혜가 내온 다식을 입가에 가득 묻히고, 꽃 덤불에 파묻혀 뒹굴다가 해가 지면 내일을 기약하며 돌아가는 아이들.
뛰어가는 뒤통수를 사랑스럽다는 듯, 한편으론 이르게 떠나 아쉽다는 듯이 쫓는 부인이었다. 운혁의 눈에는 그녀보다 사랑스러운 존재가 없는데도 말이다.
어쨌거나 그런 이유로 입맞춤을 멈추지 못했다. 일생을 둘이서 깨 볶으며 살고 싶었지만, 아이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밤까지 이어져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기뻐할 사혜의 얼굴이 먼저 떠올랐다.
“어때요?”
사혜가 단정히 자른 머리를 하고 곱게 웃는다. 그렇게 짧게 치진 않을 거라면서 그와 처음 만난 순간처럼 풋풋한 단발이었다. 턱 언저리로 짧아진 머리카락 탓에 앳되어 보이는, 운혁이 사랑하는 여인의 얼굴.
물론 그는 사혜의 재잘대는 목소리와 웃음소리로도 일생을 넋 놓고 살 수 있지만, 사혜와 저를 반씩 빼닮은 사랑스러운 아이가 방을 꼬물거리며 기어 다니는 모습을 보는 것도 더한 행복일 것이다.
“잘 어울려.”
방바닥에 흐드러진 앵화 한 송이를 집어 사혜의 귀 뒤로 꽂아 주며, 운혁이 미소 지었다. 이듬해 봄에는 세 사람의 웃음소리가 꽃향기 가득한 방 안에 맴돌기를 기대하면서.
<청연의 괴물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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