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나는 그때까지 뭉개질 듯 눈을 감고 있었다. 투정 부리듯이 내 눈꺼풀을 쓸어 만지는 손길에 어쩔 수 없이 눈을 떴다. 시린 바람 한 줄기가 문틈으로 유유히 흘렀다. 새까만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정말 고약한 잡귀구나. 밤까지 쫓아와 이리 괴롭히다니. 짓궂다. 짓궂어…….
“사혜야.”
“운혁.”
잠기운이 싹 달아났다. 헛것도, 환청도 아니었다. 활짝 열린 문짝에, 바로 앞엔 양 무릎을 굽혀 나와 시선을 맞추고 앉아 있는 기운혁이 보였다. 꿈에 찾아와 나를 못살게 굴던 사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
내가 닿기도 전에 그가 먼저 팔을 뻗어 나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나는 절박한 동작으로 그 손을 붙들었으나 닿지 못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닿지 못하고 허망히 통과할 뿐이었다.
“참으로 잔인하십니다. 차라리 열일곱의 앳된 모습으로 꿈에 찾아와 주시지. 이런, 이런 얼굴로…….”
“꿈?”
“하면 지금 이게 꿈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닿지 못해 허우적거리는 날 보고 있으니, 기유를 사랑했던 홍운영의 마음이 딱 이렇지 않나 싶었다. 사무치게 닿고 싶었겠지. 한 번이라도 좋으니 안고 싶고, 고운 입술에 입도 맞춰 보고 싶고 그랬을 테지.
나는 손을 들어 기운혁의 뺨과 입술이 있는 허공을 살살 쓸어 보았다. 꼭 간지러운 듯이 웃는 사내 때문에 억장이 다 시큰거렸다.
“정말, 그러네.”
내 뺨을 애틋이 문지르던 운혁이 다가와 살짝 입술을 대었다.
“꿈이 아닌데 꿈 같고…….”
그 찰나에 물컹한 감촉이 살갗에 번진 듯도 했다. 따스히 녹아내리는 숨결에 솜털이 오르르 곤두섰다.
나는 그에게 떠밀리듯 벽에 등을 기댄 채로 굳어 있다가 더듬더듬 목깃을 헤치고 홍보옥을 꺼냈다. 그 안에 넣어 두었던 푸른 빛이 사라지고 텅 비어 있다.
벌떡 상체를 일으켰을 때 그의 형체는 잡힐 듯 말 듯 어스름해져 있었다. 연기처럼 사라지는 기운혁을 잡기 위해서라도 팔을 뻗었으나 손아귀에 닿는 것은 허공뿐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침의를 입은 채로 방문을 힘껏 열었다. 무언가에 정신없이 이끌리듯, 신을 구겨 신고 난향이 어룽지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물 자국이 뚝뚝 떨어져 있는 마당을 가로질러 푸른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성급히 내달렸다.
아침보다 농도가 짙어진 기운이 요기인지 무언지 모르겠으나 아무렴 상관없었다. 달려 나가는 몸이 휘어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중심을 유지했다.
그리고 마침내 달빛이 부스러진 나루터에 멈춰 섰을 때, 내가 찾던 그 사람은 얕은 물살에 잠긴 채로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친 것도 같았다. 흐르는 강물처럼 파랗고 맑은 눈동자.
주먹을 너무 세게 쥐었는지 손톱에 눌린 손바닥이 따끔거렸다. 통증이 느껴진다. 꿈이 아닐까. 고운 가루로 바스러진 홍보옥이 손 틈새로 흩어져 바람을 타고 날아간다.
기운혁은 마치 이 강에서 줄곧 내가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나를 보았다. 저를 해하기 위해 다가온 퇴마사들을 살피고, 사람이 오가는 저자를 맴돌고. 무언가에 묶인 것처럼 제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망량.
웃음을 그리는 얼굴이 보인다. 발걸음이 급해졌다. 손을 뻗으니 맞잡아 오는 온기가 느껴졌다.
달빛이 별 가루처럼 부스러지는 밤이었다. 손이 맞물리자마자 우리는 돌풍에 떠밀리듯이 속절없이 서로에게 휘감겼다. 아까 전에는 닿지 못했는데 지금은 온기와 감촉까지 보따리를 끌러 낸 것처럼 한 품에 들어찼다.
“이게, 이게 어찌 된…….”
나는 멍하니 안겨 있다가 입술을 쥐어 짜냈다. 감정이 뒤엉겨 말도 제대로 뱉지 못하고, 그가 대신 내 뺨을 꼬집어 주었는데, 느껴지는 아픔이 없어 심장이 덜컹 주저앉았다.
“꿈…… 예, 역시 꿈일 줄 알았습니다. 그런…….”
“네가 아플까 봐 제대로 못 꼬집었는데.”
그렇게 말하더니 운혁은 조금 더 세게 내 볼을 당겼다. 아야, 절로 앓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많이 아팠어?”
“정말, 정말로.”
손대면 헛것이라 비웃으며 사라질까 봐 만지는 것도 두려웠다. 나는 허공에 뜬 손을 그에게 올려 두지 못하고 꽉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받아들이지 못하고 뒷걸음치는 발을 기운혁도 보고야 말았다.
“사혜야.”
“안 믿기는 걸 어째요.”
“이리 와.”
물살처럼 잔잔히 밀려든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허리를 숙인 운혁이 내 아랫입술을 아프지 않게 이로 물었다. 왜 비비지 않고 깨무느냐 물었더니, 아직도 몽롱한 내게 이것이 현실이라고 일깨워 주려는 목적이라고 했다.
그는 살그미 혀를 들추고 간질이기도 하였다. 굳은 내 혀가 마중 나오질 않으니 아랫입술을 쪽 빨면서 허락해 달라는 듯 간드러지게 혀끝을 살랑였다. 전부 다, 감각이 생생히 뛰어노는 실재였다.
나는 게으르게 혀를 움직이다가 그의 어깨를 살근살짝 밀쳐 냈다. 마침 내 손에 엉겁결에 들고나온 검은 부채가 쥐어져 있었다.
나는 작게 숨을 들이켠 다음, 그것으로 그의 어깨를 짝 소리 나게 내리쳤다. 경쾌한 마찰음이 새벽공기를 가르며 맑게 울려 퍼졌다.
“…….”
“……악귀 같은 거 아니야.”
부챗살 사이사이에 덧댄 복숭아나무 가지를 유심히 들여다본 운혁이 서운하다는 듯이 얻어맞은 제 어깨를 문질렀다. 복숭아 나뭇가지는 그에게 효력이 없었다.
그제야 엉망진창인 얼굴을 들고 그의 어깨부터 팔등까지 빠짐없이 어루만져 볼 수 있었다. 옷소매를 끌어올리고 부드러운 살을 반죽하듯이 만지고서도 그는 사라지는 법 없이 그대로였다.
온기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다 내려놓고 웃을 수 있었다.
“울어? 이 기쁜 날에.”
“이게 어떻게 우는 겁니까.”
기운혁이 내 눈두덩을 손으로 덮었다. 느릿느릿 문질러 주던 손이 떨어져 나간 자리에 축축한 눈물 자국이 번져 있었다.
그러는 그의 처지도 별다를 것 없었다. 나보고 기쁜 날에 왜 우나며 타박 놓은 주제에, 그의 눈가도 지는 해처럼 발갛게 저물고 있었다.
“네가 그리웠어.”
“도령.”
“죽어 아무것도 남게 되지 않았을 때도 너를. 너를 연모하는 마음만이 남아 있더라.”
투둑, 방울진 눈물방울이 고운 뺨을 적시고 흘러내렸다.
처음엔 규율을 어기고 사람이 된 것을, 감정을 내버린 것을, 그러다가 나를 만나 정을 알게 된 것이 후회스러웠다고. 속죄하듯 어여쁜 눈물을 떨구는 그가 더없이 애틋하다.
“끝내 또 나는 혼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슬퍼서.”
“…….”
“네가 그립고 그리워서 결국엔 모두 후회로 돌아왔는데.”
나는 그의 젖은 뺨에 입을 맞추고 하염없이 쓸어내렸다.
“한데 우스운 일이야. 네 목소리를 들으니 떨쳐 내고 싶은 그 감정마저 기껍고 소중해. 그때에 알았어. 너와 함께 지나간 시간을 내가 어찌 후회할 수 있을까.”
듣고 있었구나. 그는 홍보옥 안에 푸른 불씨로 남아 줄곧 미약하게 숨을 쉬고 있었다. 나와 눈을 맞추고, 목소리를 듣고. 그렇게 내 가슴 위에 보슬보슬한 민들레 홀씨처럼 뿌리 내리고 있었다.
소란스럽게 눈물을 찍는 내 앞에 그는 무릎을 굽혔다. 푹 고꾸라진 나를 소중히도 끌어안는다. 닦지 않은 눈물이 옷섶을 적시는데도 기껍다는 듯이 내버려 두었다.
”너를 연모해.”
“저도, 흐, 연모해요.”
마음을 추스를 새도 없이 뱉은 멋없는 고백. 품으로 가득 쏟아지는 난꽃 향에 머리가, 사무치는 기쁨으로 마음이 어질어질하였다.
서글퍼하는 날 이해한다는 듯이, 운혁이 내 머리카락을 쓸었다. 무젖은 뺨과 눈두덩 위를 꾹꾹 오가던 입술이 마지막으로 안착한 곳은 같은 온기를 가진 입술 위였다.
“여기서 오래전부터 네가 오기를 기다렸어.”
“오래전부터요?”
“응.”
한마디를 뱉고 다시 과실을 베어 물 듯 입술을 삼킨다. 오물오물 혀를 굴리다가 살짝 떼어 내고 열띤 목소리로 속삭였다.
“찾고 싶었는데. 그리워 당장 달려가고 싶어도 나는 이곳을 떠날 수 없으니까……. 너를 기다리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었거든.”
“하면…….”
“겨우 소문을 퍼뜨려 네가 오는가 싶었는데, 날 알아보지도 못하고 떠나갔지.”
헝클어진 머리칼을 귀 뒤로 정돈해 주는 다정한 손길이 느껴졌다.
“소문?”
그가 내 이마에 짓궂게 입술을 비비적거릴 동안 퍼뜩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고약한 이매망량이 나돌아 다닌다는 소문을 들어서요.’
‘어휴, 충분히 먹고살 만하니 일 좀 쉬어도 되겠건만…… 참말 지치지도 않고 밖으로 나돕니다그려. 몸조리 잘하고, 무탈히 다녀오시우.’
“설마. 설마 그게 도령입니까?”
“오매불망 기다린 세월이 이제 좀 실감이 나?”
“왜, 그땐…… 눈치채지 못하였을까요?”
“글쎄. 아마 내 기가 약해서 그랬던 게 아닐까.”
“하면 지금은 어떻게. 아니 그 이전에 어째서 여기에 계신 겁니까? 마을을 어지럽힌다던 요귀가 도령입니까? 설마 아직도 그 몹쓸 요귀가 도령을 좌지우지……!”
성급하게 일어나려는 날 차분한 손길이 눌렀다. 아예 겨드랑이 옆에 몸을 붙이고 누운 운혁이 불안으로 떨고 있는 내 턱을 잡아끌어다 저와 시선을 나누게 했다.
“그건 죽었어.”
“하면.”
어찌 그가 이곳에 있을 수 있을까. 천도도 못 하였는데.
이러다 또 나만 두고 어디론가 사라질까 봐, 붙잡아 두듯이 그와 손등을 겹쳤다. 그러나 냉한 살갗과 다르게 그의 입술이 뱉어 내는 것은 꼭 산 사람처럼 훈기가 도는 포근한 숨결이었다.
“네가 살린 거야.”
“제가.”
“줄곧 잊지 않아 주었잖아.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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