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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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사람들과 섞일 수 없음을 깨달은 사혜는 결정을 내렸다. 이만 속세의 삶을 정리하고 떠날 때가 되었다. 인가와 가까운 산허리에 호젓한 가옥을 지어 두고 입 무거운 종 둘을 고용해 두길 잘했다.
요귀의 정을 받아 범인과 다른 삶을 살고 있으나 불사는 아니기에 언젠가 영면에 들 것이라는 치유사의 담언을 기억한다. 언제까지고 세상에 홀로 남겨지지 않는다는 게 어디인가. 산가(山家)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다 오늘 같은 봄날에 어머니 따라 하늘길에 오르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사혜는 제게 온 마지막 서찰을 펴 읽었다. 여느 때처럼 그녀를 찾는 고달픈 백성들의 의뢰서였다.
사혜는 목 뒤로 짧게 자른 머리카락에서 손을 떼고, 헝클어진 앞머리를 정돈하였다. 떠밀리듯 앞머리를 흩뜨리고 지나가는 바람의 온기가 푸근하였다. 저 고개 너머 햇살을 담뿍 머금고 하늘하늘 물결치는 보리밭은 황금의 파도였다.
이 세상에서 대요귀가 사라지고 100년이 훌쩍 흐른 지금. 더는 나라를 위협할 요귀가 나타나지 않으니 진정한 태평성대였다.
* * *
산 중턱을 넘어 몇 개의 촌읍을 지나니 드넓은 바다가 펼쳐진 해안 마을에 다다랐다.
“아이고, 만신님. 오셨습니까!”
대낮에 저잣거리를 헤집으며 활개를 치고 다니는 짓궂은 망량이 있다 하였다. 사람을 할퀴지는 않는데, 시도 때도 없이 불쑥 튀어나와 놀라게 만드는가 하면 멋대로 장신구 따위를 집어 간다고 했다.
시비 거는 흔한 잡귀 중의 잡귀 같은데. 의외로 기가 상당해 변두리 무녀들이 쉬이 쫓아내질 못하고 혀만 내두르고 간다는 것이다. 퇴마사들을 보면 도망갈 준비부터 하는 여타의 잡귀와 다르게 꿈쩍도 안 한다고.
뱃심이 얼마나 두둑한지 다리를 꼬고 앉아 지나가는 행인을 구경하기도 한다더라. 귀중한 객과 보부상은 물론, 마을 사람들까지 괴성을 지르며 도망가니 군수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잡귀 하나 떨쳐 내지 못하는 무능한 군수라고 농성이라도 할까 봐 두렵습니다, 만신님.”
무능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 제 선에서 어찌어찌 해결 보려던 욕심은 시든 풀처럼 꺾였다. 귀신 나오는 마을이라는 소문까지 자자하니, 사태의 심각성을 통감한 군수가 발만 동동대다 결국 나를 부른 것이었다.
“일단 어떤 놈인지 가서 봅시다. 앞장서시오.”
“예, 예!”
축 처진 어깨를 따라가 보니 작은 나루터가 나왔다.
“흐익.”
나루터에 걸터앉은 검은 연기를 보고 군수는 체면도 잊고 냅다 내 뒤로 몸부터 숨겼다.
“…….”
“하, 하하…… 크흠! 아무튼 저 녀석입니다, 무녀님. 저렇게 온순해질 때야말로 방심하면 큰일 날 노릇입니다. 엊그제도 이 근방을 지나가던 행인들의 발목을 물살로 휘감아 자빠뜨리질 않나……. 수심이 깊지 않은 곳이라 천만다행입지요.”
“사람들을?”
“예. 대관절 무슨 농간인지 원.”
요귀라면 사람들을 치 떨리게 증오해야 마땅한데, 지금껏 군수가 보고한 바로는 저 잡귀가 사람과 얽히기를 마다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 놓고선 사람을 죽이진 않는다라? 참 뒷맛 떫은 놈이었다.
“한번 말이나 걸어 보죠.”
“예, 예? 말이요?”
기겁한 군수가 후다닥 저편으로 달아났다. 범인의 눈에는 시커먼 연기가 흉흉하게 일렁대는 것으로 보일 테지만 영안을 가진 내게는 괴물의 형상으로 비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저건…….
“여봐라. 너는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사람들 틈에 끼어 소란을 떠느냐.”
두어 발자국 다가가 호통치듯 말하니 발로 물을 차 대던 녀석이 선심 쓰듯 돌아보았다. 거리가 여전해 얼굴을 식별할 수는 없었으나 저것은 분명 사람의 형상을 띄고 있었다.
사람 탈을 쓴 요귀는 참 상대하기 껄끄럽고 거북스러웠다. 나무 베듯 속 시원히 베기도 무엇하고, 살살 달래 보내려 하니 기고만장해져서 발딱발딱 기어오르고. 설마 잡귀가 사람 거죽을 쓰고 돌아다닐 줄은 예상 못 했기에 나는 좀 난감해졌다.
그래도 먼 길 서찰까지 보낼 정도로 애달픈 군수의 마음을 외면할 순 없는지라 허리춤에 찬 곡도를 풀어 든 찰나였다.
뻔뻔스럽게 사람 사이를 누비며 농탕질을 해 대던 놈이 내 손을 피해 살살 뒷걸음질 쳤다. 그러더니 뒤돌아 달아나듯 강 변두리의 숲으로 자취를 감추는 게 아닌가.
“피하지 않기는커녕…….”
쯧, 혀를 차자 제 발 저린 군수가 찍소리 못하고 눈치를 보았다.
“그, 그게요. 참 이상한 일입니다요. 방방의 내로라하는 귀인들을 앞세워도 털끝 하나 비키는 법 없던 잡귀가……. 혹시 무녀님의 영기가 지나치게 강해서 겁을 먹은 것 아닐까요?”
“내가 그것까지 예상 못 할 줄 알았나? 갈무리하고 갔네만.”
“아이고!”
철썩철썩 제 입을 때리는 군수를 옆으로 치우고 재빨리 뒤를 쫓았다. 살다 살다 잡귀와 술래잡기를 하고 있을 줄은. 성가심이 이루 말할 수 없는 녀석이다.
참으로 숲 깊이도 들어간다. 설마 사람 없는 곳으로 유인하여 해코지를 하려나 싶은데, 잡귀의 기운이 사특하기보다 꼬리잡기를 하는 애처럼 방방 들떠 있으니 여러모로 수상스러웠다.
‘설마 즐기는 건가?’
수작에 말려든 건 아니겠지. 짜증스럽게 이맛살을 구기며 무성한 덤불을 헤칠 때였다.
“어디로 갔지.”
이마를 쓸며 주변을 두루 살피던 차였다. 톡, 새빨간 열매가 낙숫물처럼 정수리 위로 떨어졌다. 엄지손톱만 한 열매 알갱이는 하릴없는 내 손까지 굴러가 안착했다.
“…….”
열매가 떨어진 곳을 따라 시선을 올리니 나뭇가지에 빨랫감처럼 걸터앉은 형상이 보인다.
녀석은 건방지게 웃고 있었다. 떨어질 듯 말 듯 시건방진 작태로 가지에 올라앉아 턱을 괴고 나를 보고 있는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어째서 이 광경이 낯설지 않은지.
과거를 뒤적여 한편의 기억을 낚아 올리면, 물소리가 청량히 메아리치는 숲속에 딱 그만치 청아한 사내가 무릎에 턱을 올리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처럼…….
잎사귀가 만들어 낸 음지에서 잠시 잠깐 푸른 빛이 반짝였다. 바람에 흔들리는 그림자 틈새로 눈 부신 볕이 스며들 때, 나는 무심코 눈을 찌푸렸다. 다시 떴을 때는 고약한 잡귀가 연기처럼 흩어져 버린 뒤였다.
쿵, 쿵 북소리가 울린다. 내 귀에서, 심장 밑바닥에서.
스멀스멀 타고 오른 전율이 머리꼭지부터 발끝까지 노도처럼 쓸려 온다. 건조한 마음이 한순간 축축이 젖어 들고도 남을 만큼 심상찮은 파도였다.
“……도령?”
내뱉고도 어안이 막혔다.
“미쳤군.”
환술을 쓰는 요귀인가. 괘씸함에 작정하고 녀석을 잡아 족쳐야겠다는 투지가 생겼다. 기척까지 사라진 요귀를 부득불 찾아 나서는 것은 시간 낭비요, 차후를 기약해야 했다.
나는 미심쩍게 나무 위를 건너다보다가 손가락 사이에 낀 붉은 열매를 무심코 한 입 깨물어 보았다. 새콤달콤한 즙이 잇새로 부서져 혀를 적신다. 덜 익어 시거나 쌉싸름하지 않고 알맞게 농익은 달큰한 맛이었다.
“별 이상한 생각을…….”
한낮의 얼토당토않은 신기루, 아직까지 짐처럼 얹고 있던 그리움과 갈망.
그날, 나는 숲속의 잡귀가 불러낸 아릿한 추억을 되씹느라 결국 잠을 설치고 말았다.
그 밤엔 꿈을 꾸었다. 열일곱으로 돌아간 내가 땡볕 아래 팔을 부들부들 떨며 새총의 시위를 당기고 있었고, 운혁은 나무 위에 올라앉아 일없는 사람처럼 구경을 했다.
자꾸만 빗맞은 이유가 뒤에서 지켜보는 그 때문인지도 모르고, 운혁은 시도 때도 없이 다가와 나를 못살게 굴었다.
‘도와줄까?’
‘저리 가세요, 도령.’
‘그렇게 팔을 떨면 맞추려는 것도 빗맞겠다.’
‘내 언젠가 도령의 머리에 올린 사과를 떡하니 맞춰 볼 테니 그리 아세요.’
‘죽이고 싶을 만큼 내가 미웠어?’
‘아, 제대로 맞출 거라니까요. 깐죽대는 도령의 코를 납작하게 누르기 위해서라도 기필코…….’
꿈속을 헤매다 멍하니 눈을 떴다. 설익은 대화와 여름의 풀벌레 소리가 환청처럼 귀에 맴돌고 있었다.
나는 귀 언저리를 문지르며 이불을 걷었다. 깊은 새벽이라 사위는 고요하고, 푸르스름한 달빛 한 줄기가 방바닥을 이슥히 비추었다.
자리끼라도 떠 둘 것을. 독한 갈증을 부르는 꿈 탓에 목이 말랐다. 나는 뻐근한 다리를 두들기며 느릿느릿 일어났다. 직접 부엌을 찾아 물이라도 한 바가지 떠야겠다는 생각으로 문고리에 손을 올린 차였다.
새파란 달빛을 가득 머금은 문풍지 너머로 솔나무처럼 우뚝 선 그림자가 보였다. 처음엔 정말 미동이 없어 나무 그림자인 줄 알았더니, 숨 쉬듯 작게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해서 지금의 상황 역시 꿈의 연장선인 줄로만 알았다.
억지로 다시 눈을 감았다. 갈증이 한층 더 짙어지고, 문밖의 낯익은 그림자 역시 목이 마른 듯 작게 숨을 들썩이고 있었다.
“아.”
떨치듯 내뱉은 작은 소음을 귀신같이 잡아낸 그림자가 서서히 몸집을 키웠다. 이쪽으로, 내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자박, 자박, 흙에 비벼지는 밑창 소리가 선명해질수록 문고리를 잡은 손에도 힘이 서렸다.
문짝 하나를 사이에 두고 코앞까지 가까워진 형체가 굽어보듯 허리를 숙였다. 기운혁이 주고 간 부채를 무기처럼 찾아 움켜쥔 내 손이 익숙한 체취를 맡고 바르르 떨렸다.
끼이익, 소리가 울리더니 문을 타 넘은 그림자가 나의 공간 안으로 발을 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