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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화 (78/86)

78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지절대고 방아깨비처럼 뛰어다니는 아이는 과묵한 내게 퍽 좋은 말벗이 되어 주었다.

“아이, 무녀님. 다친 데 자꾸 만지면 덧나 버리는데…….”

일찍이 내 볼에 상처가 있음을 안 아이가 호도깝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울상을 짓더니 퍼뜩 연고를 가져오겠다며 뒤도 안 돌아보고 날다람쥐처럼 뛰어간다. 말릴 새도 없이 튀어 가 버리니 남은 건 헛웃음이었다.

아이는 어머니 진맥 보러 온 의원을 붙잡고서는 ‘우리 주인아씨, 상처만 나면 신경 쓰여 자꾸 손대는 버릇이 있으셔서요. 병나도 잘 말도 안 하시구요. 작은 상처는 까짓거 대수라며 시큰둥하시기 일쑤라니까요! 그러니 덧 안 나고 배겨요? 연고 남은 거 있거든 빨리 좀 주셔요, 의원님!’하고 성화였다.

나보다 더 나를 잘 알고, 나보다 더 나를 염려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가마에 편히 등을 기대고 아물어 가는 뺨을 톡톡 두드려 보았다. 꼭 기운혁이 생각나는 계절이었다.

“당신이 죽어서도 날 아껴 주는 것 같아서 기분은 좋네.”

봄 내음이 묻은 선선한 바람이 눈두덩을 부드럽게 스친다. 새하얀 난꽃을 닮은 운혁의 미소가 손끝으로 전해지는 듯했다.

* * *

왕이 승하하고 넷째 왕자 문아주가 밀국 6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왕세자가 자질 부족으로 불명예스럽게 폐위된 뒤, 남은 왕자들 사이에서 피바람이 불 것을 예견한 상왕이 살아생전 홍사혜에게 은밀히 내린 명령이 있었다. 이는 진원을 살리는 대가로 오간 거래이기도 했다.

밀국에서 왕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첫째로 신료들의 지지가 있어야 하며, 둘째로 대제사장의 승인이 필요했다. 이전엔 참수당한 사왕이 대제사장을 겸임하였는데, 그가 부재하니 공을 세운 홍사혜가 대제사장의 유력 후보로 거론되던 차였다.

상왕은 자식 중 특별히 귀애하는 문아주가 왕위를 잇기 바라며, 홍사혜에게 문아주를 지지할 것을 당부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문아주가 즉위하고 5년 내로 제사장 위(位)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갓 역죄를 벗은 데다 평민인 홍사혜가 대제사장으로 승격된다는 것부터 어불성설이었으나, 상왕은 오로지 총애하는 자식에게 보위를 물려주기 위해 신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녀를 대제사장 직에 올렸다.

사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마땅한 후임이 없는 데다, 유력한 후보들의 대다수가 사왕의 측근으로 함께 처형당했다는 점이 유리한 패로 작용하였다.

약조대로 홍사혜는 여림으로 이가한 뒤에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했다. 5년째 되던 해에는, 신을 모시고 문아주 편에 선 정통 귀족을 찾아 자리를 물려주고 사임하였다.

그렇게 스무 해가 유수처럼 흐르고, 계절의 굽이를 여러 번 돌아 새봄이 찾아왔다.

* * *

“온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벌써 가시오? 섭하게 고작 나흘 머물다 가시는구려.”

“어머니께서 건강하시니 시간을 맞춰 다녀올까 합니다. 아주머니께 항상 신세를 지는 것 같아요.”

“신세는 무슨……. 이웃끼리 당연히 보듬고 살아야지.”

남부의 작은 마을 여림에 정착한 지도 벌써 30년. 그 여림에 신비로운 귀인이 산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소문의 주인인 사혜는 처음 이곳에 정착할 적 배척을 받으리라 예견했으나 여림의 백성들은 무릿매골과 달랐다. 그들은 늘상 친절하고 말과 웃음이 많았다. 손바닥만 한 궁색한 초가에서도 넉넉한 안온이 감돈다.

물론 그녀가 여림에 온 뒤로 마을의 잡다한 요귀까지 깡그리 박멸되니 안전지대라는 소문이 퍼져 사람이 몰려들고, 그 덕에 마을 규모가 커진 것이 한몫했으나 사람들은 그것과 관계없이 사혜에게 따스하고 정이 많았다.

“이번엔 어디로 떠나시나?”

“고약한 이매망량이 나돌아 다닌다는 소문을 들어서요.”

“어휴, 충분히 먹고살 만하니 일 좀 쉬어도 되겠건만……. 참말 지치지도 않고 밖으로 나돕니다그려. 몸조리 잘하고, 무탈히 다녀오시우.”

사혜는 여림의 관청에 소속되어 굿도 해 주고, 퇴마도 겸하면서 녹봉을 받아 살아가고 있었다. 돈 없는 이들에게 무상으로 부적을 써 주는 것은 물론, 액운을 쫓고 마을 사람들의 안녕을 빌어 주는 일에 힘썼다.

“그래도 너무 오래 집을 비우진 말고. 어머니랑 그 누구냐, 옆집 사는 노총각. 다들 걱정하잖우.”

“진원에게 더는 이곳에 머물 필요가 없다고 전해 주세요.”

“아이고, 말도 마시오. 무녀님 떠날 때마다 내 꼬박꼬박 전해 주는데, 저가 방해되는 것이 아니라면야 이대로 살고 싶다며……. 난 처음에 딸 하나 아들 하나인 줄 알았잖아.”

진원은 사혜의 집과 나란히 초가를 지어 살고 있었다. 노역 살이도 끝났으니 원하는 터로 옮겨 살라는 데도 되었다며, 나이 오십이 넘을 때까지 홀아비를 자처했다.

이제는 생계를 위해 관아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진원은 일을 마치면 사혜의 집에 찾아와 이것저것 돕기도 하고, 어머니의 말벗 노릇을 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진원과 사혜를 두고 말이 많았다. 서로를 보는 눈빛에 묘한 기류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으니 정인은 아닌 듯하고, 형제라니 따로 살고. 수군덕대다가 저들끼리 ‘저 사내가 무녀님께 신세를 지었구나.’라고 결론을 내린 모양이었다.

“혼인은 생각도 없어 뵈던데……. 하기야 늙어 버릴 대로 늙어 버려서 어느 과부랑 재혼한담 모를까 초혼은 어렵겠지.”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신다니 쫓아낼 수 없는 노릇이지요.”

“그래도 진원 덕분에 어머니가 적적하시진 않겠소.”

“예, 그분께는 항상 감사할 따름입니다.”

수도를 떠난 이후 여러 해가 흘렀다. 어머니도, 진원도 자글자글 주름이 늘었으나 홀로 시간이 멈춰 버린 사혜만 방년의 외모 그대로였다. 아니, 멈춘 것이 아니라 수십 배로 느리게 흘러간다는 표현이 맞겠다. 꼭 요귀처럼.

이 역시 한철 사랑을 나누었던 기운혁이 남긴 정표이겠지.

사혜는 외출할 때마다 혹 누군가 자신의 기이한 체질에 불쾌감을 느끼고 어머니까지 해코지를 할까 늘 염려했다. 진원이 그녀의 어머니를 보살펴 주지 않았다면 마음 편히 떠날 수 없었으리라.

사혜가 막 머리에 쓴 방갓을 눌러쓰고 뒤돌아설 때였다.

“진원. 또 뭘 그리 바리바리 싸 들고 오신 겁니까?”

“요 앞 시전에 잘 익은 홍옥을 팔길래 조금 사 왔지.”

언제 왔는지, 진원이 옆구리에 새빨간 홍옥을 담은 광주리를 붙이고 서 있었다.

“그게 조금입니까?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마침 진원의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습니다. 저러다 장가는 갈는지, 하고.”

“혼사는 무슨…… 또 그 소리느냐. 불편하면 차라리 오지 말라 하여라.”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어머니께 못 다한 효를 저 대신 해 주고 계시는데.”

광주리에서 아삭한 홍옥 한 알을 빼어 입에 문 사혜가 무심히 중얼거렸다.

“그래도 난 오라버니가 참한 여인 만나서 잘 살았음 싶어서 그랬지요. 의사가 없다면 괜한 오지랖이었습니다.”

“오라버니?”

익숙지 않은 호칭에 진원이 비딱이 눈썹을 들쳐 올렸다.

고하자면 여태껏 그에게 과거를 캐물은 적도, 혈육이 맞는지 따위를 확인한 적도 없었다. 언젠가 속 시원히 털어놓을 기회가 있겠거니 하였는데, 시간이 흐르다 보니 더 깊어지지도 멀어지지도 않은 딱 이 정도의 평화가 마음에 들었다.

엄한 말 뱉었다가 실망하고 싶지 않다. 무엇보다 진원의 반응을 예상하기 어려웠다.

그는 이곳에서 이웃들을 도우면서 여유롭고 안온한 삶을 살고 있었다. 자다가도 벌떡벌떡 깰 만큼 고역스런 무녀원의 생활도 차차 잊어 가고 있었다. 그러하니 굳이 평화를 깰 필요는 없겠지.

“실수요.”

“나 원…….”

진원은 싸리문을 빠져나가는 사혜에게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잘 다녀와라.”

“예, 어머니 잘 좀 부탁드립니다.”

“그건 염려 말고.”

배웅을 나온 스승의 입가에 잔잔한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 * *

백성들을 돕고자 전역을 떠돌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웃으며 맞아 주는 어머니와 진원이 있었다.

단 한 가지를 제외하면 나쁘지 않은 삶이었다. 해가 지날수록 주름이 깊어지고 머리가 새어 가는 두 사람과 다르게 사혜의 시간만 변함없이 제자리걸음이었다.

지나온 시간만큼 세월이 또 덧없이 흘렀다. 마당에는 잘 다듬어진 봉분 세 개가 생겼다.

평온히 잠든 어머니를 먼저 떠나보내고 3년이 지난 가을엔 진원이 세상을 떠났다. 진원이 타고 나간 고기잡이배가 침몰하였는데, 저 대신 마을 사람들을 구하다가 제때 빠져나오지 못했다고 한다. 다행히 장례 치를 시신은 수습할 수 있었다.

마지막 봉분의 주인은 여림까지 따라와 그녀에게 충성을 바친 종이었다. 열둘 먹은 그 아이가 성장해 혼인을 치를 나이가 되어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일생을 훌륭한 말벗이 되어 주던 종은 홍 무녀님 같은 아름다운 색시를 맞고 싶다 노래를 불렀는데, 평생의 소원대로 어여쁜 처를 맞이해 분가를 하였으나 불의의 사고로 아내를 잃었으니. 상을 치르고 죽을 둥 말 둥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종을 사혜가 달래서 데려왔다.

진원이 죽고 난 뒤, 함께 의지하며 살아오던 그 늙은 종도 나이가 들어 이제는 땅에 묻혔다. 그즈음에 사혜가 아는 이들은 마을에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그리운 이들이 모두 세상을 뜬 뒤에 사혜가 여림의 집으로 돌아오는 날은 1년에 다섯 손가락도 꼽지 못할 정도로 드물었다. 그녀도 점점 잊혔고, 그녀도 살던 마을을 잊어 갔다. 제사를 지내고 무덤을 정돈하기 위해 여림에 찾아오는 사혜의 모습만이 이따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뿐이었다.

세월이 무상히 흐르는 동안 왕위가 네 번 교체되었다. 어느 왕은 불로의 육신을 지닌 사혜를 수상스레 여겨 그녀의 행적을 낱낱이 감시하기까지 했다.

사혜를 잘 모르는 여림 사람들은 나이를 먹지 않는 그녀를 두려워하며 찝찝한 시선을 보냈다. 요귀를 모조리 잡아 주고 마을을 번성시킨 이가 사혜였으나 그러한 은공마저 덧없는 세월에 깎여 존경보다 이물스런 요귀를 보듯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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