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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화 (77/86)

77화

스르륵.

억세게 팔목을 묶은 오랏줄이 바닥에 떨어졌다. 사혜의 말대로 그로부터 열흘 뒤 진원은 석방되었다.

“주상전하께서 상천 같은 아량으로 사형을 면해 주셨으니, 죄인은 도형(徒刑)에 처할 것이며 작금부터 모든 직위와 재산을 몰수당하고 남부 여림의 관노비가 될 것이다.”

진원은 엎드려 절했다. 바닥 짚은 손끝이 벌벌 떨렸다. 죽을 날만 세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도형이라니.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알 길이 없었다.

이후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를 감옥 밖으로 데려다준 관원 둘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더니 비켜섰다. 그제야 저 멀리 오동나무 뒤로 얕게 흔들리는 붉은 치맛자락이 보였다.

어서 가 보라는 듯 관원이 턱짓했다. 간만에 햇빛을 쬐니 고문당해 찔리고 달궈진 피부가 사정없이 따끔거렸다. 마른침을 삼킨 진원은 손날로 이마에 차양을 걸고 천천히 나아갔다.

“여림의 판관과 친분이 있습니다.”

나무 뒤에서 불쑥 걸어 나와 머리쓰개를 걷은 여인은 홍사혜였다.

“스승님께선 그쪽으로 가실 겁니다. 제 사저도 인근에 마련해 두었으니 도움 드리기도 수월할 거고요.”

진원은 선뜻 상황을 납득할 수 없다는 듯 난해한 표정으로 양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생활하는 데 문제가 없도록 조치를 취해 두었습니다. 서른 해가 지나면 자유의 몸이 되실 겁니다.”

“자네가 날 도왔나?”

“왕께서 선처를 베푸신 겁니다.”

할 말을 마친 사혜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진원은 초쇠한 용색으로 고문당한 제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볼 뿐, 좀처럼 고개를 들지 못했다. 맑은 하늘 아래 선 스스로가 죄스러운 것처럼.

어쩐지 듣고 싶지 않은 자조를 얻어듣게 될 것 같아 사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뉘우침을 모르는 이들은 지옥에 떨어졌으나 스승님은 아닙니다.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살아서 죗값을 치르세요.”

뒤늦게 고개를 올린 그가 눈 부신 햇살을 이기지 못하고 눈매를 찡그렸다.

“스승을 위하는 마음으로 포장하기엔…… 과하군. 내가 자네에게 무어라고 이리 힘을 써 주는가.”

“미립굴에 와 주셨잖아요. 그건 제자를 염려한 게 아니었습니까?”

“그것과는 다른…….”

“다르지 않습니다. 여하하든 마음을 쓴다는 것은 같으니까요.”

사혜는 다만 그렇게 말했다. 지금 그와 마주 보기 전까지 몇 번이고 손목에 엮인 끈목을 어루만졌는지 모르겠다.

묻고 싶었는데, 지친 얼굴을 보자마자 의문을 입 안으로 삼키었다. 언젠가 때가 되면, 진원이 건강해지고 마음에 안정을 들이고 그렇게 삶에 적응하며 주변을 둘러볼 여력이 생기면 그때가 되어 물어도 늦지 않을 테니.

진원이 머뭇거리며 신 뒤축을 바닥에 비볐다. 자그락, 모래가 쓸리는 작은 소리가 평온한 공기에 녹아들었다.

“한데 내 알기로 남부 여림은 썩 부유한 동네는 아닌데. 자네라면 더 좋은 곳에 터를 잡고 살아갈 수 있지 않나.”

저 때문에 사혜가 여림으로 이가한다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 못 하는 듯했다.

“어머니 요양 겸 물 좋고 바람 좋은 곳을 물색하다 보니 마침 여림이 제격이었을 뿐입니다.”

“그래, 연고자 하나 없는 마을에 자네라도 있어서 안심이야.”

“몸조심하세요. 저희도 곧 여림으로 하경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잠시간 서로를 물끄러미 보았다. 특별한 감정이나 의미가 담긴 시선이라기보다 그제야 처음으로 상대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한 기분이었다.

“살면서 제자의 덕을 보게 될 줄은 몰랐군.”

진원을 태울 수레가 흙먼지를 끌고 가까워졌다. 다그닥, 나른한 말굽 소리가 부윰한 먼지를 딛고 규칙적으로 울린다.

“고맙네.”

그는 한숨 같은 웃음을 흩뿌리고 돌아섰다. 마지막으로 사혜를 한번 돌아보고 아까보다 그럴싸하게 펴진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다시 볼 때까지 건강하렴.”

봄을 알리는 싱그러운 잎사귀가 그의 머리 위로 한들한들 나부꼈다. 짐수레에 오른 정갈한 뒷모습이 나뭇잎에 가려지고 흙먼지에 쌓여 멀어진다.

가는 와중에도 한 번씩 그녀를 돌아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처음 얼굴 마주했을 때만 해도 무덤으로 떠밀리기 직전의 죽상이더니, 이제야 조금 정신을 챙기고 웃어 보인다.

작아지는 짐수레를 건너다보던 사혜가 나무의 그림자 아래에 몸을 묻고 팔짱을 질렀다.

아까 따져 물을 걸 그랬다. 내가 삶의 방향을 잃고 허덕댈 때 너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이 땅 어딘가에 존재할 거라고 말했으면서, 정작 당신은 언제든 벼랑에 달린 손을 놓아 버릴 눈을 하고 있느냐고. 그리 을러댈 것을 그랬다.

그의 절망과 허무를 이해한다. 자신이 지금껏 사왕의 견공으로 이용당하며 저지른 숱한 악행을, 요귀와 다를 바 없이 백성들의 생을 앗아 간 죄책감을, 하여 용서받지 못할 죄를 씻고자 죽음을 선택했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죽음만이 합당한 벌이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사혜는 그가 어떻게든 살아서 이번에는 그의 방식대로 참회하길 바랐다. 진원이 지닌 신력으로 많은 이들을 구해 주고 또 구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아직 진원이 필요했다.

* * *

“짐은 전부 수레에 옮겨 두었습니다.”

“곧 나갈 테니 어머니 먼저 모시고 나가렴.”

“예에, 무녀님.”

여림으로 떠날 날이 되었다. 봄꽃이 앞다투어 피고 나비가 유혹하듯 찾아오는 연홍빛 봄날이었다.

“날이 좋습니다.”

어머니를 가마에 모신 뒤에 남은 짐을 옮기려고 돌아온 종이 휘파람을 불었다. 나이 열둘을 먹은 종아이는 내가 없는 동안 어머니에게 꼬박꼬박 상을 내갔었는데, 무녀원에서 종살이하며 어지간히 고생하였는지 내가 여림으로 데려가 준다는 말을 듣고 사흘 전부터 팔짝팔짝 뛰고 있었다.

“무녀님, 머리 다듬으시려구요?”

“그럴 때가 되었긴 했지.”

면경 앞에 서서 머리카락을 만지작대고 있는 내게 종이 조심스레 가위를 가져다 두었다. 가윗날이 필요 없다는 걸 아는데도 내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 부지런히 기웃거리는 아이가 귀엽다.

“무녀님 머리칼이 반드르르 새붉은 것이 을매나 고운데요. 그걸 다 자르시려니 아깝습니다.”

“새 출발을 다짐할 때 기분 전환으로 머리카락을 친다지 않더냐.”

“그렇긴 하지만. 한데 무녀님은 단발도 참말 잘 어울릴 것 같으셔요. 고것도 고것 나름대로 기대가 되는지라…….”

손을 꼬무락거리며 내 뒷모습을 힐끔대는 아이는 나보다 더 열성적이었다.

나는 가위의 날을 귀밑에 대고 잠시 숨을 골랐다. 햇살을 머금은 투명한 면경에 치렁치렁한 붉은 머리카락과 같은 색의 눈동자 한 쌍이 비추었다. 이 머리카락을 숨기려고 아등바등 발버둥 친 지난날의 풍상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이제 나의 후손은 역도의 무리라며 쫓길 필요도, 목숨을 걱정할 필요도 없이 당당한 밀국의 백성으로 살아가겠지. 대를 이어 갈 후손이 있다면 말이다.

나처럼 눈에 띄는 외양이거든 밀국 방방을 돌며 의뢰를 수행했을 당시 한 번은 풍림의 일족을 알아볼 수 있었을 텐데. 지금껏 본 적은 없으나 어딘가에 숨어 살고 있으리라 믿었다. 세상에 남은 풍림의 씨가 오로지 나 혼자이기만을 바라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그러다 문득 든 위화감에 볼을 더듬어 보았다. 면경 속 여인도 똑같이 손을 움직여 왼뺨을 쓸어내렸다.

‘여기 분명…….’

상처가 있던 자리가 아니던가? 짐 정리를 하느라 농을 옮기던 중, 날카롭게 비어져 나온 나무살에 스쳐 뺨을 긁힌 적이 있었다. 엊그제인가, 그 이전이었나.

여하간 벌써 상처가 아물 리 없다 여겼는데 놀랍게도 새빨간 생채기 위로 살굿빛 새살이 돋아나 있었다.

‘신력을 쓴 기억도 없는데 이상하다.’

의구심은 잠깐 머물다 떠났다. 이틀 만에 새살이 돋아나는 현상이 ‘그날’의 부작용 외에 더 있겠나 싶었다.

대요귀를 멸하고 무녀원으로 복귀한 날, 내 맥을 짚어 보던 승의가 낯을 굳히고 침묵하더니 이런 말을 전했었다.

‘혹시 요기를 받으신 적이 있습니까, 홍 무녀?’

‘요기라니.’

‘음, 그러니까…….’

제가 말해 놓고도 어찌 설명할지 모르겠는 난감한 기색이었다.

‘이 같은 경우는 처음이라 아뢰기 조심스러우나, 사람의 몸에 요기가 고이는 것은 두 가지 경우뿐입니다. 신체적 접촉을 했거나, 요귀에게 영육을 빼앗기거나.’

어느 경우든 생존이 어렵다는 의미다. 한데 나는 몸에 요기가 한가득인데도 멀뚱히 눈 뜨고 살아 있으니, 무덤을 파헤치고 일어선 송장을 보듯 혈색 빠진 얼굴로 힐끔댈 만하였다.

더 기함할 일은, 요기를 품고 있는데도 부작용은커녕 외려 몸에 깃든 신력과 조화로이 섞여 춤을 춘다는 것이다. 그 말은 즉, 요력을 받은 내 몸에 남다른 현상이 나타날 수 있음을 암시했다. 비정상적인 치유력이나, 노화가 느리다거나.

나를 살피는 승의의 낯빛이 두려움으로 새파래졌다. 반대로 기운혁과 보낸 여러 밤을 상기한 나는 구워진 반석처럼 열이 올라 얼굴 들기가 힘들었다.

‘홍 무녀, 혹시 미립굴에서 무슨 일……. 설마 그 요귀가 무녀님께 입에 담기도 험한 짓거리를 한 겁니까?!’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그런 일은 없었으니 안심하게.’

우왕좌왕 눈치 보던 승의는 진맥을 마치자마자 진원에게 허겁지겁 달려가 이 사실을 고했던 모양이다. 이미 나와 기운혁의 관계를 아는 진원이 적당히 승의를 입막음하지 않았더라면 뒷감당하느라 요란법석을 떨었어야 할 터다. 생각하니 오싹했다.

“무녀님, 뭐 도와드릴까요?”

가위를 쥐고도 멀뚱히 선 내가 무언의 도움을 요청하는 걸로 오해했는지, 종이 빼꼼 뺨을 내밀었다. 단발이 기대가 된다느니 어쩐다니 하더니, 안 가고 그 자리에서 내가 나올 때까지 가둥거린 모양새였다.

“아니, 됐다. 머리는 나중에 자르고 이만 출발하자.”

아이는 아쉬운 듯 발끝으로 모래를 긁어 대다가 활기차게 웃었다.

“예, 무녀님. 사실은요, 저는 아리따운 무녀님 지금 모습도 참 좋아요.”

“하면 당분간 이대로 둬야겠구나.”

수줍은 해처럼 웃던 아이는 후다닥 달려가서 내 신을 안고 돌아왔다. 무녀원에서 벗어난 뒤 활기를 얻더니 재잘재잘 말이 많아졌다. 지켜보는 눈이 즐겁고 듣는 귀가 낭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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