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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75/86)

75화

나는 무어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서 어머니의 머리카락만 어루만졌다. 진원도 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라는 듯이 편안히 전각 기둥에 등을 기댔다.

눈이 고요하게 쌓이는 소리만 사박사박 귀를 간지럽혔다. 구름 뒤로 숨어 버린 해는 한동안 나오지 않을 모양인지 마당에 시린 그림자를 넓게 펴 주었다.

“저녁부터 또 비가 내린다 합니다.”

“그러냐.”

“몸 챙기시라구요.”

“폭우라도 한바탕 쏟아졌으면 싶구나.”

진원은 그 비가 더러운 죄를 모조리 씻어 주길 바란다는 한마디를 남기고 홀가분히 자리를 떴다. 모르는 새에 내 손으로 옮겨진 지우산이 맥없이 핑그르르 허공을 돌았다.

뒤늦게 할 말이 떠올라 진원이 떠나간 자리를 돌아보았을 때는 소복이 쌓인 눈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 * *

얼마간은 시간이 흘러가는지 멈추는지도 모르게 살았다. 대요귀도 멸했겠다, 대단한 변화는 아니더라도 인생에 작은 기점이라도 찾아오지 않을까 싶었는데 전과 다를 바 없이 고여 있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느닷없이 구군들이 무녀원을 쳐들어오기 전까지는.

“홍 무녀, 지금 당장 무녀원으로 귀환해야겠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가 봐야 알겠습니다만 상황이 영……. 우리까지 화를 입진 않을까 모르겠습니다.”

수도 서방의 농토에 한주먹도 아까운 잔챙이 요귀들이 구물거려 백성을 괴롭힌다 하여 손을 보고 오는 길에 들은 전보였다. 함께 동행했던 퇴마사가 희게 질려 말을 몰고 와 알렸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혹 어머니가 잘못되었나 하는 염려였다. 다급히 말의 배를 차고 무녀원에 도착하니, 고래고래 악을 쓰며 몸부림치는 사왕이 선두요, 뒤로 굴비처럼 줄줄이 엮인 무녀들이 다섯이었다.

나는 우두커니 멈춰서 난리 통 속에 끼인 행렬을 바라보았다. 줄의 끄트머리, 양손을 묶인 채 압송되는 진원의 뒷모습에 못 박힌 듯 시선을 고정했다.

“죽은 시체에서 나온 사리나 기름 같은 찌꺼기, 악귀의 혼을 섞어 가지고는 나라 전역에 뿌리고 다녔더랍니다. 그런 식으로 요귀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는 게…….”

“그것이 가능한 일이랍니까?”

“혼백이랑 말도 섞는데 귀신 보는 왕야께서 무언들 못하리까? 천벌을 받아도 모자랄 놈들!”

무녀원의 문간 앞에 우글우글 모여 수런거리는 사람들이 경악스럽다는 듯이 혀를 찼다.

“하면 며칠 전 피해 입은 돌곰 마을의 요귀도 저자들이 벌인 짓거리일지도 모른다는 말이오?”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요. 여하하든 무녀원 놈들, 저렇게 병 주고 약을 주는 식으로다가 비싼 돈 받아먹으면서 요귀를 퇴치하고 세도 불리고 그랬다더랍니다, 허 참!”

“나라가 어지러운 것도 현왕의 불민과 부덕 탓이라는 그 벽서도 왕야의 뒷공작이라지요. 왜, 하늘의 은덕을 입은 왕을 새롭게 추대하여야 한다는 벽서요. 그게 모반이 아니고 무어랍니까?”

“한데 이 사실들이 어찌 세상에 알려진 거랍니까?”

“내부 고발자가 있더랍니다. 저어, 뒤에 끌려가는 자라던데. 무얼, 저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다가 분열이라도 난 모양이지요.”

그런 소리들이 오갔지만 나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목화솜으로 고막을 틀어막은 것처럼 웅웅 달구치는 소리만 맴돌 뿐. 핏발 선 눈으로 고함쳐 대는 사왕의 난동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귀를 틀어막았다.

“진원 네 이놈, 어미 잃은 천것을 불쌍하답시고 거두어 키워 줬더니 이딴 식으로 뒤통수를 쳐! 고변한다 한들 역도의 후손인 건 변함이 없거늘 네 놈이라고 처형을 피할 수 있을 성싶으냐!”

돌아선 진원의 표정을 살피기 용이한 자리가 아니었다. 나는 밀려드는 인파를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려 했으나 군졸의 창칼이 나를 막아 세웠다. 접근을 허용치 않겠다는 엄한 경고였다.

한차례 파란이 휩쓸고 가자 이번에는 관군들이 들이닥쳐 무녀원 내부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사왕의 내실 장판 밑에 둥근 원판의 문이 깔려 있었고, 지하로 향하는 통로를 따라가니 시큼한 가루와 독초, 종묘에서 훔친 단자들이 다수 발견되었다.

감히 종묘에 숨어들어 왕실의 위패를 훔친 죄, 명명백백한 증좌가 겹치고 덧대이니 극형을 면치 못할 것이었다. 그리고 사왕을 도운 진원도 형벌을 피할 수 없겠지.

자백하리라 예상치 못했다. 오래전부터 수상함을 넘겨짚긴 했으나, 사왕은 물론 자신까지 스스로 나락으로 떨어질 게 뻔한 자백을 진원이 감히 뱉어 내리라 생각지 못했었다.

그저 죄를 알고 이제부터라도 마음을 고쳐먹고 살기를 바란 것이었는데.

“홍 무녀. 이것은 주상께서 내리신 교지요.”

“…….”

“홍 무녀?”

그러나 한평생 사왕의 견공으로 부려졌던 이에게는 물밑으로 함께 끌고 가는 것만이 죄악을 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방법이겠다.

진원이 올바른 선택을 내리길 종용한 것은 나인데. 바름을 꾀한 선택이고 죄인은 단죄해야 마땅한 데 왜 이리 속이 시큰거리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저 또 나의 선택이 내가 원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다는 것만이…….

“이보시오.”

“아, 송구합니다. 한데 그, 사왕에 동조한 무리들의 처결은 어찌 되는지…….”

“왕야와 함께 일을 도모하던 치들도 모조리 참수를 당할 것이오.”

그래, 역도를 꾀한 잔당들을 현왕께서 살려 두실 리 없지.

이렇게 또 한 사람이 내 곁을 떠나는구나 싶었다. 힘 풀린 손이 교지를 떨어뜨렸다. 그것을 전달한 도승지의 표정이 불경스런 것을 보듯이 구겨졌다.

“예를 갖추도록 하시오.”

나는 급히 무릎을 꿇고 왕명서를 펼쳐 읽었다. 내 눈이 정갈한 글자 위를 천천히 훑어내렸다.

“쯧.”

나의 태도가 영 못마땅하다는 혀를 차는 도승지의 관복을 경황없이 붙들었다.

“지금 당장 전하를 뵙고 싶습니다.”

“당장 말이오?”

“예, 부탁드립니다.”

‘홍사혜, 너는 무엇도 지키지 못했다고 했으나 많은 이들이 너로 하여금 구명받을 거다.’

허물뿐인 위로라고 생각하였는데. 진원, 당신이 왜 그런 말을 남겼는지 알 것 같다. 그는 제 목숨과 맞바꿔 내게 기회를 내어 주고 떠난 것이다.

그의 증언이 없었더라면 왕이 내게 이러한 교지를 내릴 일도 없었을 터. 이대로 진원의 죽음을 두 손 놓고 관망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시큰거리던 속이 역류할 것처럼 울렁였다. 적어도 내가 바란 일이 아니란 것만은 알겠다.

* * *

그해 봄, 도읍 한복판에서 거행된 전례 없는 대례에 도성의 밀국인들이 죄다 궐 앞으로 모여들었다. 족히 100여 년간 암암리 지속되어 왔던 인신 공희의 희생자들. 그들의 넋을 왕이 직접 기리는 대제례라고 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입에 덕지덕지 간식거리를 물고 손에는 논밭의 흙을 묻히고 나와 고개를 내빼며 구경하는데, 꾸짖고 쫓아내는 관원이 없었다.

쑥 향을 넣고 정성껏 빤 백의에, 요대와 머리띠를 갖춘 양인 이상의 신분만이 참여할 수 있는 제례거늘. 그러나 이 자리에서만큼은 귀천을 막론하고 바글바글 모여 있었다.

왕이 참관하는 행사에 신료들이 발을 뺄쏘냐. 거지꼴이나 다름없는 백성의 행색을 보고 제 몸에 벼룩이 뛰노는 것처럼 몸을 꿈틀대고 질색하던 백관들도 마지못해 도열하였다.

이 진귀한 볼거리는 홍사혜의 청에서 시작되었다.

왕은 대요귀를 몰아낸 사혜의 공로를 인정하여, 풍림 홍씨 일가가 이 땅에 자리 잡게 해 주었다. 이에 사혜가 감사를 표하며 한 가지 청을 들어주십사 엎드리니 왕은 이미 예상하고 말해 보라 하교하였다.

보나 마나 벼슬이나 재물, 홀어머니와 함께 살 넉넉한 가옥이나 토지 따위를 청할 것이고, 왕도 그만한 대가는 쥐여 주고자 교지를 내린 것이었다.

그러나 사혜의 청은 왕께서 직접 합동 위령제를 주관해 달라는 것이었다.

‘반드시 전하께서 의식을 거행해 주셔야 합니다.’

‘저, 저 오만방자한!’

대신들은 분개했다. 왕과 매한가지로 하늘 꼭대기에 서서 백성의 터에 발 한번 디뎌 본 적 없는 오연한 자들이다.

하늘땅에 두루 발 걸친 무녀의 청을 받아들일 이유도, 그 하늘에서 내려와 주군께서 직접 살풀이를 해야 할 이유도 없다며, 다른 무인들을 앞세우라고 강하게 반발했다. 결국은 저들 권위가 추락할까 봐 덜덜 떨어 대는 꼴이다.

종잇장처럼 얄팍한 속내에 왕은 혀를 내둘렀다. 참 속 보이는 꼬락서니이나, 그것과 별개로 왕이 제사장으로서 제례를 거행하는 것이 쉬운 결단은 아니었다.

왕의 못마땅함도 별반 다르지 않았으나 말의 무게가 무거운 자리였다. 약조를 번복하였다간 면이 서지 않음이라. 왕은 곰곰이 생각하다 마지못해 청을 받아들였다.

‘되었다. 과인이 홍사혜에게 청이 있거든 무엇이든 들어주겠노라 약조했으니 행해야 마땅하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왕의 결단에도 귀족들의 반발이 드세었다. 어찌 하늘 같은 지존께서 벗은 발로 제단에 올라 천한 무속인들이나 할 법한 굿거리를 하느냐며 성토하고 침음했다.

체면도 체면이나 지금껏 숨겨 온 나라의 오점을 들추어내는 동시에 인정하는 꼴이 돼 버리니 민심을 휘어잡으려는 권력자들의 눈에 제례가 아니꼬울 수밖에.

그러나 논공행상에 엄격한 왕이 용상을 내려치는 것으로 대신들의 입을 꼬매 버렸으니, 게을러도 성군은 성군이라는 소문을 사혜는 납득하였다.

오색 끈이 바람을 타고 흐른다. 짤랑, 맑은 울음소리를 내는 방울이 잇따라 바람결에 표풍했다. 거대한 청동 향로에 향불이 피워지고, 뿌연 연기가 창천으로 솟구쳤다.

천도를 위해 모인 무녀들은 신분의 가림이 없었다. 무녀원은 폐지되고, 사왕과 그를 도운 다섯 명의 상위 무인들은 밀국의 혼란을 부추기고 액운을 퍼뜨렸다는 죄벌로 참형이 결정되었다.

사혜는, 거대한 제단 위에 나아가 축문(祝文)을 읊는 왕과 그 뒤를 이어 새하얀 천을 하늘 위로 나부끼는 무녀들의 고아한 춤사위를 지켜보았다. 수백의 영혼을 달래는 웅장한 의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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