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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화 (74/86)

74화

“그 때문에 스승님이 상록까지 직접 찾아오신 겁니까?”

“네가 다 알고도 그의 곁에 머무르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 그런 것 같더구나.”

잔잔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진원은 할 말을 고르듯, 끈에 매달린 조약돌을 손에 쥐고 쓸다가 담담히 말을 이었다.

“네가 위험하다고 판단했어. 정에 휘둘려 일을 그르칠까 봐. 연모에 휩쓸려 공사를 구분 짓지 못하고 무력하게 요귀 앞에서 무너질까 걱정했다.”

“그 요귀는 자신을 죽여 달라 청했습니다.”

열흘이 되어 가는데도 귀에 닿는 운혁의 목소리가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정말 이렇게까지 생동하게 되살아날 필요는 없는데. 고약한 병증이라고 믿고 싶었다.

“임영에게 전말을 들으셨다면, 스승님도 그 사람이 형제에게 억울히 살해당한 호원군이란 사실을 알고 계시겠지요.”

“그래.”

“다행입니다.”

“무엇이?”

왕자의 죽음은 역사에서 잊혔으니, 언제까지나 그는 사람 수백을 해친 대요귀로 남겨질 것이다. 죽여 없애야 할 재앙이자 만악의 근원으로 기록되기를 원치 않았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를 괴물 아닌 사람으로 기억해 주기를 바라서요.”

더는 소금을 짜내고 싶지 않아 눈가에 힘을 주었는데도 기어코 뜨끈하게 젖어 들어갔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로 잿가루가 소복이 쌓인 향로 가까이 다가갔다.

“사람들의 악의에 희생당한 이가, 그 악의를 양분 삼아 자란 괴물에게 몸과 정신이 먹혀 살육을 일삼으면서 몇백 년을 살아갔습니다. 하면 나는 궁금해집니다. 누가 괴물일까.”

불붙인 향초의 매운 향이 내 눈물을 가려 주기를 기다렸다.

“미립굴에서 그의 기억을 떠안기 전까지 나는 그 사람의 고통을 알지 못했습니다. 다 알고서는 도저히 죽일 수 없었지요. 이미 몇 번이고 죽었을 가엾은 이를 내 손으로 어찌 해할 수 있단 말입니까? 신력이 다 비어 버리는 한이 있어도 되살리고 싶었는데 그이가 말하더랍니다. 자신을 죽여 주는 게 구원이라고……. 해서 저는 영혼이라도 천도해 주고 싶었는데. 이미 한참 늦되었어요.”

“하면 그 보옥에 담긴 영은…….”

“내 욕심이지요.”

“…….”

“다 바스러져 천도시킬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이대로 놓치면 바람 따라 흐르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요. 하여 내 곁에 단단히 묶어 두는 것입니다. 나는 도저히 떠나보낼 수가 없어서. 보세요, 진원.”

붉은 구슬 위로 마른 눈물이 떨어졌다. 향으로 무마하기엔 늦어 버렸다. 나는 기운혁의 영을 담은 홍보옥을 진원에게 내밀어 보여 주었다.

“미약하지만 아직 곁에 있습니다. 푸르게 일렁대는 빛이 참 영롱합니다. 내가 잠들면 빛도 어두워지고, 아침이 되면 또 환히 빛나는데. 꼭 인사라도 하는 것 같이……. 신기합니다.”

“……그래, 내게도 보이는구나.”

나는 두 번째 향초에 불을 얹고 정성스럽게 묵례한 뒤, 진원을 돌아보았다. 이리 가까이 다가서니 아까부터 그의 몸에서 희미하게 풍기는 요기가 한층 뚜렷해졌다. 다친 곳은 없고, 부상을 숨기는 얼굴도 아니니 어디 한바탕 요귀와 구른 것은 아닐 터였다.

수련 무녀 시절부터 종종 언질 한마디 없이 무녀원을 은밀히 빠져나가던 진원이었다. 잠행을 나가면 열흘을 너끈히 넘기고 돌아오는데, 그때마다 지금과 같은 냄새를 묻히고 돌아왔다.

다 타 버린 향초를 뽑아 내려 두는 척, 시선을 아래로 비껴 내렸다. 습관처럼 행한 일이라 경각심이 옅어진 것인지, 아니면 말을 타다가 부주의하게 흘러내린 것인지. 늘 진원이 속주머니 깊숙이 쑤셔 두고 다니던 은색 병이 장포 바깥으로 살짝 빠져나와 있었다.

“스승님.”

“그래.”

“이 땅에 사람의 욕심이 사라지지 않는 한 운혁처럼 희생당할 이는 얼마든지 나올 겁니다.”

“…….”

“사람을 악으로 부추기고 그 악을 이용하는 세력이 있다면. 그들이 무고한 이의 피로 권세를 얻고 이 땅에 선다면 그들이야말로 죽여 없애야 할 요귀일 것입니다.”

그 말을 남겨 두고 먼저 신당을 벗어났다. 여물을 배불리 먹은 말의 배를 쓰다듬어 준 뒤 안장에 오를 때까지 진원은 나오지 않았다.

매캐한 향내가 열린 신당의 문틈 새로 흘러나온다. 으스러져라 주먹을 움켜쥐고 있던 진원의 마지막 모습이 흩날리는 눈송이와 섞여 스러졌다. 이제 선택은 그의 몫이었다.

* * *

적당히 그칠 줄 알았던 눈바람이 북쪽에 치우친 무녀원에서는 물러가지 않은 손님이었다. 으름장 놓는 겨울의 심술이 터줏대감 같다.

꼭 운혁의 죽음을 지켜보았던 그날처럼 잘게 흩날리는 싸락눈을 맞으며 나는 어머니가 계시는 전각으로 향했다. 담 아래 붉은 동백이 소담한 걸 보니 어머니가 보시면 퍽 반가워하겠다.

신당에 다녀온 뒤로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었다. 사왕은 미립굴 일대를 수습하기 위해 진즉 떠났고, 귀궁하기 전까지 나에 대한 세세한 처결을 미루었다.

역죄를 벗으면 자유가 기다리고 있나. 자문했으나 답은 글쎄, 아니올시다였다. 전처럼 무겁게 압박하는 짐도, 씻어 내야 할 오명도 없고 이제는 가문을 부흥시킬 능력도 쥐었으나 그것과는 별개로 사왕이 순순히 날 풀어 주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심하게 다쳐 내쳐지지 않는 한 평생 그자를 모셔야 할 것이다.

돌이켜 보면 너무도 뻔한 함정인데 당시 어렸던 나는 살고자 덥석 제안을 받아들였다. 사왕이 왕위에 오른다면 내막을 알고 있는 나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면 죽였지 잘 살아 보라며 곱게 풀어 줄까 싶었다. 평생 함구하도록 하고 제 곁에 묶어 둘 수도 있겠고.

이제는 될 대로 되어라였다. 진원이 앞으로 나도 당당히 녹봉 받고 사가도 소유할 수 있다고 전한 것으로 보건대 후자일 확률이 높지만 말이다.

상념에 잠겨 걷다 보니 어느덧 전각이 코앞이었다. 어머니는 쪽마루에 앉아 눈 덮인 마당을 즐겁게 감상 중이셨다. 발끝으로 눈을 툭툭 가지고 노시는 게 꼭 첫눈을 맞이한 소녀처럼 풋풋했다.

“어머니, 저 왔어요.”

반드르르 웃는 얼굴 한번 못 보고 살았는데 자식이고 뭐고 다 잊게 되니 그제야 편한 얼굴을 하신다. 이걸 기뻐해야 하나, 슬퍼해야 하나.

“버들이는 어디다 두고 오시구.”

“추울까 봐 아랫목에 곱게 눕혀 놓았지.”

어머니가 늘상 쓰다듬던 그 베개는 이름을 가졌다. 나 대신 어머니 옆구리를 차지하는 날이 늘어 가는 괘씸한 베개였다.

“간만이구나, 아가. 못 본 새 많이 해쓱해졌어. 어쩌다가 그랬니.”

어머니가 옆자리를 두들겼다. 나는 콧잔등을 문지르며 그리로 가 살며시 엉덩이를 붙였다.

어머니는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그저 하고많은 무녀원의 일꾼들 중 하나로 보지만 그것으로 족했다. 무녀원 무녀라면 치를 떨고 미워하니, 그들로 보아 주지 않는 게 어디인가.

“저희 곧 나가 살 수 있겠어요, 어머니.”

“그래? 난 이곳이 좋은데.”

“엄청 싫어하셨으면서. 여기만 아니라면 어디든 좋다고 나가고 싶어 하셨으면서 그새 잊으셨어요?”

“내가 그랬던가…….”

허허실실로 웃는 어머니는 고작 마흔 초반인데도 고생살이 잔뜩 껴서 나이 육십 줄은 먹은 것처럼 노쇄해 보였다.

이제는 내가 어머니를 내려다보는 눈높이가 되어 허청거리는 어머니의 양손을 붙잡는다. 마른 나무껍질처럼 갈라지고 튼 손등을 어루만질 때마다 참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나 살기 바빠서 어머니에게 제대로 신경 써 주지 못한 게 못내 미안했다. 오늘 당장에라도 장터에 나가서 꽃 향 나는 연고도 사 오고, 바람이 차니 보약도 한 첩 든든히 달여 오고, 춥다고 입맛 잃으시면 큰일이니 간식거리와 보양식도 넉넉히 챙겨 와야겠다.

“여기서 나가면 어여쁜 가옥을 한 채 지읍시다.”

“가옥?”

“예. 봄에는 어머니 좋아하시는 목련을 뒤뜰에 심고, 여름에는 능소화로 앞마당을 장식하는 거예요. 가을엔 여지없이 단풍이겠고, 겨울엔…… 참, 보셨어요? 담장 따라 쭉 동백 길이 나 있던데.”

새빨간 동백꽃 한 송이를 내밀었다. 어머니는 받아 들고서 소녀처럼 수줍은 미소를 띠었다.

“참 아름다운 꽃말을 가진 꽃이지요.”

“그래, 곱구나.”

나는 어머니의 손을 조심히 붙잡고 깍지를 껴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손이 찼다. 이만 들어가자니까 눈을 보고 들뜨셔서는 이대로 반 시진은 머물 성싶었다.

둘러 입은 장포를 벗어 어머니의 눈 맞은 어깨에 덮어 주려는데, 뒤에서 툭 무언가가 등을 찔렀다.

“아니…… 기척 없이 언제 오셨습니까?”

무표정한 진원이 지우산을 내밀고 서 있었다.

“당분간 일이 바쁠 거라던 사람이.”

“이제 갈 일 없다.”

배 째라는 식으로 나오는 어조가 퍽 심드렁했다. 갈 일 없다니. 뭘 믿고 저러시나.

“사왕에게 잘못 걸렸다가 무슨 고초를 당하시려고요.” 

가자미눈을 뜨고 봐도 진원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 팔짱을 끼고 늘어져라 하품만 해 댄다.

“그래서 스승님, 여긴 어쩐 일이신지?”

“지나가다 보이길래.”

“한가하신 모양입니다?”

“뭐…….”

진원만 보면 쌍심지를 켜시는 어머니가 웬일로 조용하셨다. 꽃송이처럼 흩날리는 눈에 정신 팔려서 이쪽에 나눠 줄 신경은 없나 보다.

“설마 지우산 하나 주려고 예까지 찾아오신 건 아닐 테고요.”

“이래저래 전할 말도 있고 해서.”

“무엇인데요?”

진원은 판 깔아 주니 민망하다는 표정을 짓고서는 작게 헛기침을 했다.

“홍사혜, 너는 무엇도 지키지 못했다고 했으나 많은 이들이 너로 하여금 구명받을 거다. 그리고…….”

그러면서 진원은 어머니 저고리에 묻은 눈을 털어 주느라 허리 숙인 내 쪽으로 지우산을 기울여 주었다.

“네가 그토록 원하던 자유도 얻게 될 거야. 잘못된 것은 바로잡고 죄지은 자들은 응당한 심판을 받을 테지. 네 말마따나 무고한 이들이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고해 성사처럼 들렸다. 동시에 어떠한 각오가 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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