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화 (70/86)

70화

“아.”

눈코입이 없지 무언가. 옥처럼 매끈한 낯바대기가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정확히 사혜의 얼굴로 틀어졌다.

놀란 나머지 뒤로 넘어갈 뻔했으나, 몽달귀 같은 소년이 저를 보았다고 여기는 것은 아무래도 착각인 모양이었다. 그저 우연히 돌아보았다는 듯이, 노래를 멈추고 사혜 곁을 유유히 스쳐 지나갔다.

“자, 잠깐―”

불러도 듣지 못하고, 잡아 세워도 느끼지 못했다. 서둘러 소년의 뒤에 따라붙는 순간, 경고라도 주듯이 지면이 출렁이고 공기가 부르르 울었다. 하늘 전체가 해가 기우는 방향으로 반 바퀴 크게 움직이니 천지가 개벽하는 줄 알았다.

어긋나 쪼개진 하늘에서 비늘 부스러기 같은 것이 우수수 떨어지는데. 이것은 나를 죽일 요귀의 술수인가. 나의 불온한 정신 상태로 말미암은 환시인가. 불안을 품은 사혜의 눈이 빠르게 주위를 훑었다.

“왕자, 어미의 당부를 잊었습니까? 군왕 될 위인께서 어찌 창기처럼 가창에 빠져 산단 말입니까.”

소리가 들려오는 전각에 눈코입 없는 아까의 소년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당부를 저버리고 내쫓긴 스승을 찾아간 불초자를 벌하십시오.”

판판한 얼굴에 잘못을 비는 입이 생겼다. 아직은 앳된, 동글동글한 소년의 얼굴선을 타고 굴러떨어진 눈물방울이 손등을 적셨다.

분명 모자는 왼편 전각에 있었는데, 고개를 돌리니 오른편 전각에도 그들 모자가 좌정하고 있었다. 호통치는 소리와 잘못을 비는 소리. 동쪽에도, 서쪽에도, 사방 어디에서도 보이고 들렸다. 사혜는 귀를 틀어막고 달렸다.

이번에는 앓는 소리가 들렸다. 가슴을 뜯으며 헐근대는 소리, 속 시원히 내보내지 못하고 누른 신음성. 분명 질타받는 소년을 피해 멀리도 달려왔건만, 이곳은 또 어디인지 계절이 바뀌고 장소가 변하였다.

눈 쌓인 담 위로 동백이 피처럼 뿌려져 있고, 귀신 소굴 같은 외딴 별채에 아까 그 소년이 목 끝까지 이불을 덮고 떨고 있었다. 사혜는 불가항력의 힘에 밀쳐져 그리로 다가갔다. 서슴없이 곁자리에 주저앉아 그의 손을 붙들었다.

“도령…….”

눈코입이 대수인가.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노랫말을 반복하는 고운 목소리에서 깨달음을 얻었고, 마디마디 감기는 손의 촉감에서 알아차렸으며, 가까운 거리에 이르러 풍기는 체취를 통해. 알고 싶지 않은 것을 알아 버렸다.

“운혁, 왜…….”

왜 이런 꼴을 하고 있습니까? 고귀한 신분이라면서. 왕자라면서. 병구완해 주는 이 하나 없는 냉방에서 왜 홀로 떨고 계십니까.

이것이 요귀가 불러들인 환시라면 지독하고 악독하다.

“환시가 아닌 것이지요?”

운혁의 뺨에 동요하는 손을 얹었다. 거스러미 인 창백한 입술은 열릴 줄을 몰랐다.

사혜는 죽어 가는 그의 어깨를 안고 반복해 쓰다듬었다. 매일 춥다고 투정 부리던 것이 떠올라서 그리했다. 곱디고운 소년의 민낯 위로 푸른 눈이 열린 것은 그때였다.

하늘이 비늘 부스러기를 떨구며 다시 반 바퀴 굴렀다. 그 눈부신 비늘 조각들이 빗물로 변하면서 다시 장면이 전환되었다.

이번에는 험상궂은 파도의 공격을 받는 뱃머리 위였다. 그는 산만 한 덩치의 사내 품에 짐짝처럼 안겨 선수로 이동되는 중이었고, 사혜는 사선으로 긋는 눈비를 맞으며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물로 옮겨지는 저 이는 분명 기운혁이었다. 그녀가 연정을 넘겨준 사내였다.

“어차피 아우는 오래 못 삽니다. 어머니, 신께 그 애를 공양합시다. 이럴 때라도 쓸모를 다해야지요. 오래전 산중 무녀에게 예언 하나 받으신 것 기억나십니까? 어머니의 아들이 왕이 될 관상이라고요. 그게 실은 아우가 아니라 저였던 것입니다.”

그 직후 억센 줄에 휘감긴 운혁이 바다로 던져졌을 때, 사혜는 있는 힘껏 팔을 뻗었다. 파도에 잠겨 가는 푸른 눈과 찰나 시선이 마주쳤다. 수면 아래 그를 한 끼 식사로 삼을 뱀 괴물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래, 이것은 산 제물이 된 기운혁의 전생이다. 홍운영이 보여 주었던 환시와 맥을 같이하는 전생임을, 겪으면서 깨달았다.

깨우치니 자신 역시 이대로 기운혁과 함께 잠겨 죽는 편이 안온해 보였다. 그를 죽이기 위해 시퍼런 곡도를 빼 들고 찾아왔건만 으깨지는 쪽은 제 마음이었다.

사혜가 바다 아래로 곤두박질친 순간, 환시의 공간이 산산이 부서졌다. 비늘 덮인 하늘이 또 한 번 드득― 맷돌 갈리는 소리를 내지르며 반 바퀴 굴렀다.

사혜는 시커먼 물속에서 눈을 떴다. 아니, 사위로 둘러쳐진 하늘은 사실 뱀의 몸통이오, 이제는 빈말로도 이 공간을 물속이라 할 수 없게 되었다.

사아악, 사아악―

새하얀 동공의 뱀 괴물이 사혜를 똬리 안에 두고 히죽이며 웃고 있었다.

“기운혁.”

이리 말한들 못 알아듣겠지.

예상대로 되돌아온 목소리는 그녀가 생전 처음 들어 보는, 무저갱처럼 은밀하며 소름이 와드득 돋을 만큼 음산한 것이었다.

사혜는 ‘저것’이 기운혁의 영육으로 배를 채운 괴물의 실체임을 알았다. 썰고 다져야 할 대요귀.

파고 파헤쳐도 털끝 하나 내비치지 않더니 운혁의 전생을 내보여 주고 그녀의 정신머리를 뒤흔든 뒤에야 기어 나오는 꼴을 보아라. 이쯤 흔들었으면 너덜너덜해졌겠지 믿고는 여유작작하게 아가리를 찢어 이죽대고 있었다.

사혜는 뱀 머리에 칼끝을 겨누었다. 만일 기운혁의 영령이 저 괴물 안에 남아 있다면, 놈을 죽이고 운혁을 꺼낼 방도가 있을 터.

“어디에 감췄느냐?”

―무얼?

“기운혁. 네 놈이 숙주 삼아 빌붙고 있는 사내를 어디로 숨겼느냔 말이다!”

―어디에 있긴. 눈앞에 두고도 정인을 몰라보니 그것이 속인들이 찬탄하던 연정의 실체인가? 실망이 커. 사혜야.

“헛소리.”

노회한 노인의 목소리 같기도, 천지를 가르는 우레 같기도 한 울림이었다. 사혜는 대거리하는 대신 초승달 모양의 곡도를 휘둘렀다. 헛소리 들어 줄 시간에 한시바삐 저 괴물을 곤죽 내고 운혁을 끄집어낼 생각이었는데.

그때였다. 어둠이 쏜살같이 달아나고 다음 순간 시야로 펼쳐진 것은 봄바람이 부는 궐의 중정이었다. 불탄 기와와 무너진 대들보, 난장판이 된 전각은 전장의 참상이었다. 박살 난 잔해 위로 내리쬐는 눈 부신 햇살과 부유하는 빛의 입자들이 대비되어 몹시 이질적인 광경이었다.

초록의 잔디 위, 익숙한 사내가 고고히 서 있었다.

“이래도?”

“운혁……?”

소름 끼치게 웃는 낯이 마중을 나왔다. 그의 허리가 활처럼 고꾸라지며 등에서 기다란 몸통을 꿀렁이며 뱉어냈다.

투둑, 투두둑!

옷이 해체되었다. 운혁의 등을 양분 삼아 하늘까지 뻗어난 뱀이 오싹하게 숨을 뱉으며 사혜를 내려다보았다.

“이래도, 헛소리야?”

기운혁의 목소리.

무얼 맞닥뜨리든 동요하지 말자고 각오를 다졌었다. 지금의 상황도 충분히 예상 범위에 있었으나 상상과 실제의 간극은 잔혹하였다.

귓가로 쏟아지는 목소리, 바람에 훅 밀려든 아릿한 체취와 시험하듯 물끄러미 관조하는 새하얀 동공.

외관이 뒤바뀌었다고 몰라볼까. 환시는 기껏해야 시각과 청각에 혼란을 주는 것일 뿐 오감 전부를 재현할 수 없다. 연모하던 그 사내가 맞았다. 깨닫는 순간에 곡도를 움켜쥔 사혜의 손이 힘없이 늘어졌다.

위에서부터 거대한 꼬리가 쩍 내려쳤다. 정신은 아득한데 신체는 살기 위해 움직였다. 버드나무 회초리처럼 휘어지는 꼬리를 피해 사혜는 반사적으로 몸을 굴렸다. 공격이 닿지도 않았는데 가슴이 아리고 팔다리는 고꾸라졌다.

“사혜야.”

운혁은 그녀를 찢어 먹을 천적 대하듯이 가지고 놀고 있었다. 닿으면 베일 듯한 눈을 하고선 무감한 어투로 달곰하게 이름을 불렀다.

“네가 나를 죽일 수 있을까?”

다 안다는 듯이, 그녀의 슬픔을 조롱하듯이 꼬리를 내리찍으며 속살거린다.

“속은 기분이 어떠해.”

“무어?”

“이 짓거리를 무사히 끝마치면 그래, 나와 살림이라도 차릴 생각을 했지 않아. 가엾게도.”

“…….”

“너는 알까? 지켜보는 입장에서 얼마나 우스웠는지.”

“…….”

“품어 주니 수줍게 떨고, 웃고. 지켜보는 재미가 아주 각별해.”

사혜는 바닥을 살랑거리는 뱀 꼬리를 내리쳤다. 정신이 불안하니 뜻대로 신력이 모이지 않고, 그러하니 곡도를 휘둘러도 비늘에 흠집 하나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네가 나를 죽일 수나 있을까.”

사혜는 이를 악물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 이죽대는 목소리가 꼭 동요를 가리려고 애쓰는 것처럼 들렸으니.

분명 저 괴물은 그녀를 죽이고 싶어 했고, 그녀는 뱀의 목을 따려고 안달이었다. 한데 우습게도 서로가 서로의 공격을 맞추지 못하고 허공에 엇나가는 횟수가 잦았다.

괴물은 제 헛발질에 화가 난 듯이 격양된 어조로 쏘아붙였다.

“나를 연모했던 사내가 아닌 요귀로 볼 수 있어? 지금의 너는 조상의 몰골과 다를 바가 없는데, 사혜야. 날 죽일 수 있어?”

“그만, 그만 말해라.”

네 날 선 공격이 진심이 아니란 걸 아니까.

그리고 공격이 멎었다. 뱀이 비틀대며 괴로운 숨을 내쉬는 동안 사혜는 왼 가슴을 짚었다. 감정이 범람할 때 삭히는 법은 무녀원 생활을 하면서 가장 이르게 터득한 지혜였다.

다리 한쪽이 불구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짓눌린 나날, 악화된 어머니의 병세를 전해 들은 날을 상기했다. 그런 뒤에 엄한 허공을 가르는 곡도를 내려다보았다.

온갖 상황을 상정하고 그에 걸맞은 대비책을 수없이 익히고 반복했는데. 정작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기운혁이 내주었던 사랑과 그 사람의 전생 같은, 도움 안 되는 것들 뿐이었다. 마음을 난도질하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쏘아 뱉는 저 괴물이 부러 모질어지고 있음을 알아 버렸으니 당연했다.

안다, 감정에 끌려다니면 저 괴물을 봉할 수 없다는 것을.

후웅―

머리를 도려낼 듯이 치고 지나가는 지느러미를 피해, 사혜는 뱀의 몸통을 기어올랐다. 떨쳐 내기 위해 몸부림치는 뱀에게 여러 번 후려 맞아 곡도를 놓칠 뻔하였다.

사혜는 딱 한 가지만을 떠올렸다.

푸른 비늘.

목 뒤의 비늘을 뽑으라는 기운혁의 충고가 설령 거짓이어도, 지금은 그것만이 유일한 구명책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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