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화 (69/86)

69화

봉마식 거행 당일. 화창하도록 청명한 날씨는 빛깔 좋은 눈속임에 불과했다.

귀물스런 무녀원의 무녀 서른과, 각지에서 몰려든 내로라한 퇴마사들이 스물. 도합 오십의 귀인들이 미립굴 동부 숲에 도착하자마자 날씨가 급변했다. 까만 먹구름이 몰려들고, 초입에 발을 디밀자마자 해읍스름한 안개가 도처에 진득이 눌어붙어 있었다.

“곧 비가 올 모양입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소낙비가 퍼부었다. 붉은 지우산을 펼친 무리들이 빗길을 뚫으며 숲으로 전진했다. 그 모습이 꼭 물안개 낀 숲속에서 핀 십수의 동백을 보는 듯하였다.

“질퍽한 웅덩이에 범상치 않은 예기며…… 이미 요귀가 굴에 자리를 튼 모양입니다.”

먼발치에서 요기를 뱉어 내는 미립굴이 보였다. 사혜는 손을 들어 나아가려는 자들의 발길을 막고 검집에 손을 올렸다.

“미립굴로 일정 거리 이상 다가갈 수 없도록 요귀가 결계를 쳐 둔 듯합니다. 물러서십시오.”

결계의 안팎으로 지형과 날씨가 다르니, 일행이 발 디딘 곳은 비가 퍼붓고 물과 늪이 깔렸는데, 미립굴 주변은 눈바람이 치고 동굴은 서리 낀 듯 희었으며 지대는 얼어붙은 빙판이었다.

“아악!”

일행의 끄트머리에서 퍼진 괴성이 전시의 시작을 고했다. 나무의 가지마다 푸르고 붉은 눈알이 어둠 속에서 징그럽게 눈알을 휘며 인사했다. 숲을 까맣게 덮을 정도로 끝이 보이지 않는 숫자였다.

부려 먹는 잔챙이들이 출몰할 것은 예상했으나 놀란 것은 일행의 발목을 붙든 물웅덩이였다.

“수살귀다!”

수십의 물웅덩이가 역류하는 폭포처럼 치솟더니 거품 속에서 형체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거울상처럼 일행들을 빼닮았거나, 혹은 그들의 친우며 가족 등 애틋한 이들의 모습을 닮아 있었다.

“환시입니다!”

사혜는 어머니의 형상을 띤 수살귀를 힐끗 눈짓하며 칼자루를 돌렸다. 돌차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한 숲에서 피가 튀기고 바람을 가르는 날붙이 소리가 어지럽게 뒤울렸다.

자리에 모인 이들은 지시 없이도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아는 노련한 퇴마사들이다. 모래의 술이 새겨진 부적을 뿌려 물웅덩이부터 매몰시키고, 시야를 흐리게 하는 독기를 신력으로 정화하였다.

사혜는 어머니의 뒤를 이어 차례로 달려드는 윤후와 아라, 난희의 형상을 띈 요귀들을 가차 없이 베고 앞으로 내달렸다.

쇄액, 챙―!

사혜는 저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쇄도하는 곡도를 가까스로 막아 내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그간의 방해는 간을 보기 위함인 듯, 이번에 그녀를 이기려 드는 것은 사혜 자신이었다.

끼긱, 끼익―

맞부딪힌 검날을 타고 소름 끼치는 쇳소리가 흘렀다. 사혜는 검 끝을 비껴 쳐 낸 뒤, 사정 봐주지 않고 곡도를 휘었다. 압력과 검기에 수살귀가 얼쯤얼쯤한 찰나를 노려 이마 위로 다섯 손가락을 펼쳤다.

“위호.”

갈라진 수지로 타오른 징벌의 불씨가 나비로 화해 수살귀의 몸을 파고들었다.

―아아아아, 아아아아!

영물이 파고든 자리를 피 나도록 긁던 수살귀의 몸이 들썩이고 비틀리더니 기이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공처럼 한도 없이 부풀더니, 내부의 균열을 감당 못 하고 펑 소리와 함께 찢어졌다.

갈가리 찢긴 수살귀의 조각이 비바람에 쓸려 간다. 이쯤 하고 미립굴 근처라도 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무녀님!”

이번에는 숲의 나무들이 문제를 일으켰다. 구렁이처럼 굵직한 뿌리들이 퇴마사들을 사정없이 조여 넘어뜨리고 날카로운 가지로 복부에 구멍을 냈다. 사람 피를 탐하는 혈귀가 들린 나무였다.

사혜는 입술을 짓씹어 물었다. 내장이 파여 죽은 동료를 보고 잠시 낯빛이 흙색이 되었다가, 곡도를 휘둘러 기어 오는 나뭇가지를 세차게 쳐 냈다.

파삭!

가지를 베자 곪고 곪은 핏물이 절단면을 타고 뚝뚝 떨어진다. 사혜의 검날에도 진득한 핏물이 주르륵 미끄러져 내렸다.

포기를 모르는 혈귀는 사냥감의 발목을 붙잡기 위해 뛰어왔다. 사혜는 오는 족족 베고, 꿈틀거리는 뿌리를 디딤돌 삼아 미립굴까지 달렸다.

퍼억!

쇠꼬챙이 같은 가지를 피해 몸을 튼 순간 거대한 뿌리에 등쌀을 세차게 얻어맞았다.

“윽!”

사혜는 단말마를 지르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퍼붓는 비 때문에 땅이 질퍽해 망정이지, 머리가 수박처럼 쪼개질 뻔하였다. 혀 안으로 비린 쇠 맛이 감돌아 입술을 훔치니 피가 한 움큼 묻어나왔다.

“와아아아!”

기합 소리가 아득히 먼 곳에서 들려왔다. 일행들과 멀리 떨어진 걸 보니 쫓기고 쫓겨 방위도 모르고 내달린 모양이다.

그래도 요 며칠간 숲을 돌며 고생한 보람이 있는 게, 혈투가 한창인 전장을 지켜보니 승산이 있었다. 잔챙이 요귀들 대다수가 봉마진에 가둬져 옴짝달싹 못했고, 부적은 땅과 나무에 스며들어 제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었다.

사혜는 통증에 헐떡이다가, 잠시 드러누워 퍼붓는 비를 맞았다.

‘옷가지에 부적 열 장을 수놓아 다행이지.’

안 그랬다간 요귀들이 제 냄새를 맡고 구물구물 몰려들 것이었다.

‘저것들을 다 상대해 주었다간 본전도 못 찾을 테고.’

사혜는 이마를 때리는 빗줄기를 훔치며 저 멀리 음산하게 요동치는 미립굴로 다가갔다. 동료를 달지 않고 홀로 걸음 했다.

바스락.

비 먹은 나뭇잎에 발밑에서 울었다. 육안으로 보일 만큼 뚜렷한 경계가 목전에서 일렁인다. 선뜻 결계에 손대지 못하고 서너 발자국 떨어져 칼끝만 기울여 본 찰나.

물컹한 막에 날을 대는 순간 쑤욱 빨려 들어갔다. 놓치지 않으려고 검 자루를 움켜쥔 사혜까지 한꺼번에 흡수당한 것은 물론이었다.

“으, 앗!”

쩌적―

경계를 넘자마자 두 발이 얼음판에 올랐다. 가혹한 눈바람이 사혜의 얇은 옷자락을 후려치고, 동굴 입구엔 뾰족한 고드름이 빽빽하니 이곳이 숲속인지 설산인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이상한 것은 살갗에 닿는 눈송이는 차갑지 않다는 점이었다. 춘분의 봄바람처럼 훗훗하고 산뜻한 감이 있었다.

“대체.”

경계 밖으로 벗어나려고 뒷걸음질 쳤으나, 들어올 땐 네 마음이더라도 나갈 때는 어림없다는 듯이 딱딱한 벽만 부딪혔다.

물러날 곳이 없어진 사혜는 미간을 찌푸리고 검을 쥐었다. 한 발자국씩 신중히 전진했다.

하루아침에 달라진 미립굴의 외형은 비위 상하게 기괴하였다. 자작나무처럼 하얀 내외 벽에 커다란 눈알들이 빽빽이 들러붙어 있었다.

사혜는 이 주름진 눈알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다. 소루강 사당에서 본 물고기 석상의 눈이 딱 이러하지 않던가. 가는 길마다 끔뻑이며 굴러가는 눈들이 징그럽기 짝이 없었다.

협소한 공간을 지날 때에는 그 눈꺼풀에 붙은 거미줄 같은 속눈썹이 사혜의 팔등을 음산하게 쓸어내렸다. 시선이라도 마주치면 기다렸다는 듯이 을씨년스럽게 눈을 휘니 불쾌감은 배가되었다.

“오라, 눈알이 한 방향으로 뻗어 있는 것을 보아하니 나를 이끄는 길라잡이가 네 놈들이구나. 하면 왔던 길까지 붙어 있을 필요는 없겠지.”

사혜의 소맷자락이 크게 펄럭였다. 펼쳐진 소매 안쪽에서 빛을 휘감고 빠져나온 나비 영물들이 껌뻑이는 괴물의 눈동자에 다닥다닥 붙었다. 기겁한 괴물의 눈이 빠르게 눈꺼풀을 접었다 뜨며 영물을 쫓아내려 애쓰나 그럴수록 눈알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사혜가 가는 걸음마다 충혈된 눈알이 비명을 지르며 터져 나갔다. 그렇게 얼마쯤 걸었을까.

‘노랫소리.’

먼 곳에서부터 희미한 소리가 벽을 타고 전해졌다. 환청으로 꾀어낸 함정일까. 잠깐 걸음을 멈춘 사혜는 다시 노래가 들리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깎아지른 돌계단을 신중히 밟으며, 마침내 가장 밑바닥에 도착하였을 때는 동굴에 고인 물의 높이가 정강이까지 차 있었고, 사혜의 앞에는 출처를 알 수 없는 검은 못이 자리했다.

“입수하란 건가. 물귀신이라고 대놓고 시위를 하는구나.”

모로 보아도 불길하게 느껴지는 물웅덩이 외에 달리 길이 없었다.

고오오―

수면이 일렁이매 동굴 전체가 웅웅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사혜는 각오를 굳히고 손가락을 붙여 입 속으로 집어넣었다. 손안에 바람을 한 움큼 쥔 다음 입안으로 밀어 넣고 퉤― 뱉으니 물고기의 부레처럼 반들반들한 구슬이 튀어나왔다. 수중에서의 호흡을 돕는 바람 구슬이었다.

사혜는 지체 없이 그것을 혀 밑으로 밀어 넣은 뒤, 샘으로 뛰어들었다.

“읍.”

얼음장처럼 찬 물살에 골이 다 아렸다. 양팔을 휘저어도 나아갈 방향이 없고, 사위가 캄캄하니 못이라기보단 깊은 해저를 닮아 있었다.

그러다가 조금의 시간이 흐르고 어둠에 익숙해진 뒤에 둘러보니, 물보다는 물처럼 일렁이는 누군가의 새까만 의식 세계와 같다. 묵직한 모래주머니가 된 것처럼 사혜는 끝도 없이 아래로,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바람 구슬은 동일 계열의 신력을 타고난 무녀들만의 재주였다. 숲 한복판에서 잠수할 일을 예상했을 리가. 바람을 부리는 이는 사혜뿐이고, 이 말은 즉 다른 무녀를 미립굴에 끌고 온들 요귀와 조우하기도 전에 못에서 자빠져 죽을 운명이었던 것이다.

“…….”

아까부터 귓가를 간질이던 노랫소리가 메아리처럼 크게 다가왔다. 발밑부터 감실감실 뿜어져 나오는 빛의 세기가 점차 명료해진다. 탁한 물살에 먹혀 기세가 약했으나 분명 출구를 보여 주는 빛이었다.

시야가 약간이나마 트이고, 그제야 사혜는 저 깊은 어둠 너머 무언가를 보게 되었다. 홀로 나무둥치에 등을 의탁하고 앉아 있는 소년이었다.

저 이가 노래의 주인이렷다. 주위의 배경이 화려한 기와 단을 얹은 궐인 것도 그렇거니와, 옥색의 장포를 걸친 차림새로 보아 그의 신분이 보통내기가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다.

“와아아, 쳐라!”

동색의 옷을 입은 또래의 소년들이 가검을 휘두르며 수련 중이었다. 시동의 목마를 탄 그들은 느닷없이 함성을 지르더니 검을 휘두르면서 소음을 쓸고 가 버렸다.

침묵 속에 내던져진 소년은 동떨어진 솔나무처럼 요지부동이었다. 수련하는 이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가창 삼매경이었다.

“이보시오.”

여긴 어디고 당신은 누구냐고 다가가 물으려던 찰나였다. 사혜가 소년의 어깨로 손을 가져다 대기도 전에 시선이 부딪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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