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왜, 나의 정체를 찔러주려고?”
“설마 그 여인이 아직도 살아 있나?”
“그럼 죽었겠어?”
“네 놈이 순순히 살려 두었다고? 사람 거죽을 쓰고 죄 없는 인간을 탐하니, 천벌이 두렵지 않으냐, 빌어먹을 요귀야!”
“섭하네. 자네는 날 요귀라고 불러 주지 않을 줄 알았어.”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네 놈이야말로 아직껏 미련을 못 버려 스스로를 사람으로 여기는 건 아니겠지?”
턱을 쥔 운혁의 손에 핏줄이 빠듯하게 돋았다. 차분함을 유지하던 얼굴에도 동시에 금이 서렸다.
“호원군 기유(奇瑈). 그분은 100년도 전에 명을 달리했다.”
“…….”
“네 놈은 사람을 해치는 비루먹은 요귀일 뿐이야.”
“그래? 하면 기유를 빼다 박은 나는 무엇일까? 아, 기유란 이름을 가져다 붙이지 마. 내 여인이 새로 이름을 주었거든.”
“대체 네놈, 무슨 흉계를 꾸미는…….”
“그 얘기는 되었고. 넉 달 전 너를 찾아온 여인이 홍운영의 후손이란 것을 알지.”
임영은 작금의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봉인에서 풀려난 대요귀가 요력을 축적하기 전 처치할 요량으로 기씨 댁에 ‘스승’ 행세를 하며 찾아간 도인이었다.
도인 중 수련의 부작용으로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자들이 있는데, 홍운영의 동료였던 임영 역시 그러한 불운을 짊어진 사람이었다.
100년 전 요귀를 봉하고 스러진 동료들 곁에 그도 함께 했었다. 동료를 잃은 그에게 남겨진 세월이 의미가 없음은 물론, 비루한 여생의 목표는 되살아난 요귀를 봉하는 것이었으나 이렇듯 팔과 눈을 잃고 줄행랑치는 것도 모자라, 요귀의 눈을 피해 그림 속에 한평생 숨어 살아야 했다.
“오라, 해서 그 여인을 살려 둔 게로구나. 몹쓸 요귀야.”
저를 봉한 여자의 후손이니 오죽 잔인해질까. 심심찮게 갖고 놀다 살과 내장을 발라 먹을 심산이겠구나.
“내가 어찌 그 애를 해치겠어.”
“무슨…….”
임영은 처참히 일그러진 요귀의 낯을 보고 순간 눈을 의심했다. 피를 흠뻑 뒤집어쓴 살육 현장이 잠들기 직전처럼 생생했다. 한데 이 사내는 무엇인가. 감정에 무지할 요귀는 괴로움으로 뭉개진 눈을 하고 바닥만 보고 있었다.
그는 도로 무표정한 껍질을 쓰고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었다. 손에 돋아난 갈퀴가 여지없이 100년 전 도성을 대파시킨 요귀였다. 임영은 코앞에서 무섭도록 빤히 찌르는 요귀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뒤로 넘어갔다.
“그 애도 나도 필사로 부정했으나 결국 한 사람의 영혼인 것을. 조상의 혼령? 아니, 사혜는 둘로 갈라진 스스로의 마음과 싸우고 있었던 것일 뿐. 바로 그 애가 홍운영이야.”
“…….”
“나를 살리는 것도, 죽이는 것도 그 여자야.”
괴물은 서글픈 한 마디를 남기고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임영이 후들후들 떨리는 무릎을 짚고 일어났을 때에는 텅 빈 뜰을 휩쓸고 가는 모래바람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 * *
서쪽 하늘을 적신 낙조가 운혁의 뺨을 붉게 그을렸다. 냉기를 품은 바람이 깎아지른 절벽을 타고 올라와 옷자락을 물고 휘몰아친다.
겨울이 한 뼘 다가온 숲은 우수에 차 있었다. 빛바랜 낙엽을 밟고 선 운혁은 벼랑 아래로 흐르는 물줄기와 을씨년스럽게 떠 있는 고기잡이배를 눈에 담았다.
‘호원군 기유. 그분은 100년도 전에 명을 달리했다. 네 놈은 사람을 해치는 비루먹은 요귀일 뿐이야.’
스스로도 왜 임영을 찾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 노인이 자신의 실체를 기억하는 마지막 사람이어서인지. 순간의 변덕인지, 마음의 동요인지.
해가 저물면 네 밤이 남는다. 사혜가 보고 싶었다.
“눈치챈 것 같지?”
운혁은 허공에 대고 날카롭게 실소했다. 목깃으로 손을 밀어 넣어 어깨에 돋아난 비늘을 무성의하게 쓸었다. 벼랑 끝에서 미친 사람처럼 히죽대니 진정 매병 환자가 따로 없었다.
어렸을 적 사혜가 그를 보며 짓던 표정이 떠오르니 웃음이 났다. 저거, 어찌 사람 구실 시키나 하면서. 약그릇을 차면 오기로 들이밀고, 바짝 약 오른 눈썹을 하고 참을 인을 서른 번도 더 새기고.
아, 포기를 모르는 계집의 얼굴이 볼만했었는데. 그때는 멍청하다고, 볼만하다고, 재미있다고 생각했었다. 이제 나를 웃음 짓게 하는 건 그 여자뿐이구나.
임영의 말마따나 감정이 갈라져야 할 요귀가 하나씩 배워 익히는 것도 모자라 사람까지 마음에 품어 버렸다. 사혜가 보고 싶었다. 네 밤이 남았다. 사혜와의 시간도 딱 그만큼이 남아 있었다.
그는 미련 많은 요귀였다. 그 사실은 변하지 않으며, 이제 사혜도 죽여야 할 천적이 그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니 돌아갈 수도 없다.
사랑하는 네가 죽고 싶은 눈을 하고 나를 보는데, 어찌 네게로 되돌아가.
떨어지는 핏빛 낙조가 피눈물처럼 뺨에 고였다.
* * *
792년 밀국 4대 군주 교왕의 차자 호원군.
이름은 기유(奇流)요, 아명은 소루(小淚), 별호는 인하(仁夏)이다.
쬐는 듯한 여름, 거센 햇발과 천지의 기상을 업고 태어났으니 머리가 비상하고 재주가 많아 왕과 대신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총아렷다.
나이 둘에 글을 깨우치고, 셋에 천문도를 짚고 읽었으며, 입학례를 치른 다음 해에는 빼어난 문식으로 이름을 날렸으니 가히 발군이라 할 만했다.
삼정승은 입을 모아 ‘하늘이 내려 주신 패왕의 재목’이라며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뱉었다. 나이 열에 친형인 금양군을 뛰어넘었다 뿐일까. 도성 여인들의 사심을 한데 아우를 만큼 미색의 용모를 갖추었음은 물론, 가창하기를 좋아하니 풍류를 아는 왕자라고 극찬이 자자했다.
그러나 이 대단한 호원군께서 팔색조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하늘이 내려 주신 재목.’
그것이 단순 찬양이 아닌 사실에 근거했기 때문이었다.
예부터 신들은 제 자질을 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이롭게 쓰도록 했다. 그렇게 선택을 받고 태어난 것이 무녀인데, 무녀는 신의 자질을 빌려 쓸 뿐 자질 자체가 될 수는 없었다.
한데 여기, 이리 튀고 저리 튀어 사람으로 변모한 신의 자질이 한 줌 있었으니. 인감의 감정을 깨우치고 그들과 어울리고 싶어 하는 별종이었다.
「허, 참.」
하늘신은 자식과도 같은 자질 한 덩이를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보았다. 옥빛이 섞인 푸른 자질은 그가 아끼는 자식 중 하나였다.
「사람이 되고 싶다고? 고작 어울리고 싶다는 이유로?」
지나치게 맑아 탁해질까 두려웠다.
「얘야, 차라리 사람 하나 골라잡아 그 안에서 노닥거리렴. 너를 우러러보고, 깎듯이 받들어 모실 거란다. 그때마다 힘을 빌려주면 얼마나 편하니. 구태여 세상의 풍파를 겪고 싶어 하는 이유를 모르겠구나. 네가 다칠까 염려된다.」
자질은 하늘신을 빼닮아 고집이 무척 셌다. 꼭 사람이 되어야만 한단다. 그들처럼 우의를 나누고 사랑도 하고 덕을 깨우치고 싶단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더니. 끄응, 낮게 침음한 신이 결국 한발 물러났다.
「하면 누구도 너를 해할 수 없게 가장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나게 해 주겠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호원군 기유는 만백성의 찬탄을 받으며 왕자로서 이름값을 드높였다. 신의 사랑을 한 몸에 업고 태어났으니 오죽할까.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기유는 어릴 적부터 몸이 허약하여 잔병치레가 잦았다.
당시에는 무속인이 일반적이지 않았고, 때문에 신병도 잘 알려지지 않아 그가 앓는 병이 신병의 전조임을 누구도 몰랐다. 하물며 고귀한 왕자가 신병 따위에 발목 잡히리라는 걸 상상이나 했을까. 입에 담는 것만으로 왕실 모독으로 극형에 처할 죄목이었다.
사랑받던 왕자가 불치의 병으로 시름시름 앓고 헛것을 본다는 괴소문이 퍼졌다. 빈의 슬픔이 대단해 눈물이 잦았고, 교왕은 아픈 아들을 못마땅히 여기는 지경에 이르렀다.
왕자는 어미의 눈물을 따 ‘소루(小淚)’라는 아명을 받았고, 훗날 봉호를 받아 호원군이 되었다.
기유는 아비의 홀대에 굴하지 않고 학문을 익혀 이복형제들을 따돌리니, 왕의 미움이 걷히고 다시 총애를 나눠 주게 되었다.
당시 왕세자가 병들어 죽고 세위가 불안정한 시기였다. 종종 앓아눕는 꼴은 성에 차지 않지만 기유만 한 후계가 없던지라, 왕은 그에게 보위를 물려주고 싶어 했다.
형제들의 반박이 따랐다. 개중 친아우를 투기하는 금양군의 서릿발 같은 목소리도 빠지지 않았으나 왕의 결심은 굳건했다. 기유의 원인 모를 병환이 심해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머니,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픕니다. 사금 조각을 베고 일어난 것처럼 아침이 되면 두통이 극심해져…….”
“약한 소리 마세요, 왕자. 해가 저물기 전까지 주해본을 익혀야 신료들 앞에서 면이 설 것입니다. 가창은 그만두십시오. 남사당이나 창가비 따위가 지절대는 상것의 여흥을 왕자된 자가 어찌 흉내 낼 수 있단 말입니까? 창피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대는 무결한 왕이 되어야 합니다.”
제 아들이 장차 왕위에 오를지도 모르는데 야망이 생기지 않을 어미가 어디 있을쏘냐. 교왕의 셋째 부인인 기유의 어미는 패권 다툼에 휩쓸려 쥐도 새도 모르게 독살당하기 전, 아들을 무사히 왕으로 키워 내고 싶었다.
“쓸모 있는 사람이 되십시오. 이 어미를 실망시키는 일은 부디 없어야 할 것입니다.”
한 구절을 실수하면 벼루가 날아왔다. 다그치는 어미의 손에는 늘 회초리가 들려 있었다.
결국 두통을 호소한 지 보름 만에, 기유는 의식을 잃고 사흘 동안 사경을 헤맸다. 왕자의 이름 모를 병이 날로달로 깊어지니, 그를 끌어내리려는 개떼들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전하, 왕자께서 부정을 탄 것이 분명하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원인 모를 병으로 고통받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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