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인적 없는 마당에 이르러서야 단꿈에서 벗어나 처절한 현실로 내동댕이쳐졌다. 늦가을의 알싸한 공기가 뺨을 긁으며 달아난다. 마음까지 난도질당해 패대기쳐졌다.
나는 전날 밤 기운혁의 날갯죽지에 닿았던 손바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우둘투둘한 무엇인가가 돋아난 피부, 비늘처럼 매끄러운 살결. 열에 잔뜩 취해, 비늘을 건드려 보아도 눈치채지 못했던 정인.
[그대가 아직 살아 있기를 바랍니다.]
‘내버려 두면 또 배신당해 죽을 텐데. 네 천치 같은 행동을 두고 볼 수 없어 내가 대신 그 요귀를 죽여 주겠다는데.’
‘서로가 이보다 더 닮을 수 있을까. 처음부터 우리는 하나였는데.’
무녀에게 스스로의 운명을 예언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더라면, 하는 덧없는 가정을 해 본다. 타인의 미래를 점치면서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은 누릴 수 없다. 신처럼 취급받는 이들도 결국은 운명 앞에서 무력자가 될 뿐.
설령 누군가에게 내 운명을 물어도 원하는 답은 구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타인의 명운을 발설하는 것은 금기요, 이는 하늘의 선택을 받은 이들의 책임이자 의무. 지금의 상황은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생과 사. 나는 이 길의 끝이 어느 갈래에 닿아 있을지 궁금했다. 나를 살게 하고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 주는 사내. 우리는 이 땅에서 함께 살아갈 수 없다.
간밤의 서글픔을, 내 뺨을 더럽힌 눈물을 기억한다. 그 눈물을 닦아 주던 손이 거짓될 리 없다.
뭉텅이 진 슬픔이 목을 채웠다. 눈앞에서 무릿매골이 쓸려 가는 것을 보았을 때, 어머니마저 정신을 잃고 의지할 사람 없이 혼자만 세상에 남겨진 기분을 느꼈을 때.
익숙하다. 그러나 도저히 익숙해질 수 없는 슬픔이라.
기운혁은 내가 원수의 후손임을 알면서 곁을 맴돌았다. 본심을 샘 아래 묻어 두고 관계를 붙들어온 것이다. 그래서 그의 본심은 무엇인가? 모르겠다. 한쪽이 놓든 당기든 언젠가 문드러질 물 젖은 종잇장 같은 관계.
결국은 서로를 찢어 놓을 관계임을 알 뿐이었다.
* * *
“문후 공.”
“아, 홍 무녀님.”
오반을 들고 문안 겸 찾아간 문후 공은 흐리멍덩히 누워 있었다. 정신에 문제가 생긴 것인가 싶었는데 다행히 제 이름도 알고 나도 알고 이리 눕게 된 연유도 아는 듯했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상처도 다 아물었고 문제없습니다. 애당초 의원이 왔다 가며 말하길 깊은 상흔도 아니었다고……. 해도 방향을 조금만 틀면 급소였다 하던데. 천운이더랍니다.”
“다행입니다. 잘못되시는 줄 알고 어찌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릅니다.”
“이거 원, 하루가 아까운 판국에 폐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나는 난처하게 웃는 문후 공을 잠깐 살피다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다.
“혹시 그날 일을 기억하십니까?”
“안 그래도 무녀님께 말씀을 드리려 하였는데…….”
허공을 배회하는 문후의 눈은 총기 없이 두루뭉술했다.
“그것이 분명…… 요귀에게 습격당한 것 같은데. 이상하게 당시의 상황이 기억이 잘 나질 않아요. 희한한 것은 그 일만 쏙 빼놓고 앞뒤 정황은 멀쩡하게 기억이 납니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괜찮으니 무엇이든 말해 주세요, 공.”
문후 공은 착 가라앉은 얼굴로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갈퀴…… 하얀 눈.”
“하얀 눈?”
“예, 그것만 기억납니다. 초승달처럼 희게 발광하는 새하얀 눈동자.”
요귀의 등급을 나눌 때 주된 단서는 동공의 색상이었다. 보통의 요귀는 삭월처럼 붉은 눈동자를, 급이 높아질수록 푸른 잿빛을 띤다.
가장 상급의 요귀는 새하얀 동공을 갖고 있다. 감당하기 버거운 요력을 갖고 있는 무녀들의 천적이었다. 그만한 요기를 능수능란하게 감추고, 사람처럼 감정을 흉내 내고 행동을 익혀도 몰라보았던 존재.
그래서 그것이 사랑인지 농간인지도 모르겠는 사내.
“도움이 되지 못해 송구합니다, 무녀님.”
“아닙니다. 공께서는 심려치 마시고 푹 쉬세요.”
나는 문후와 몇 마디를 더 나눈 뒤에 방을 빠져나왔다. 줄곧 나오기만을 기다렸는지, 종 하나가 달려와 알렸다.
“무녀원에서 귀빈들이 오셨다 합니다.”
다섯 날을 앞두고 진원이 봉마식에 참여할 무녀들을 대거 보내 주었다. 이후로는 줄곧 수련에 몸을 내던지는 일상일 것이다.
잊어야 했다.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은 무엇이든.
* * *
사그락.
미끈한 손가락이 옷자락 사이로 빠져나온 종이를 가볍게 쓸었다. 방에 홀로 남겨진 운혁은 턱을 괴어 누운 자세로 사혜의 옷 밖으로 튀어나온 종이를 어루만졌다.
그는 사혜의 장옷에 코를 묻고 있다가 곧 느리게 종이를 빼내었다.
[그대가 아직 살아 있기를 바랍니다.]
훑는 눈이 무미건조하였다. 그 노인네가 여태 제 눈을 피해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흥이 동하나, 따로 사혜를 만나고자 작당한 것은 곱게 봐줄 수 없다.
운혁은 종이를 접어 사혜의 옷 속에 넣어 둔 뒤, 객관을 빠져나갔다.
“어디 가십니까?”
때마침 수련을 끝낸 사혜가 땀을 훔치며 다가왔다. 그러다가 푹 젖은 제 처지가 머쓱한지 더 다가오지 않고 어색하게 웃었다.
“점심상 아직이면 같이 들어요. 금방 씻고 오겠습니다.”
열심히 몸을 움직였는지 양 뺨이 사과알처럼 먹음직스럽게 발갰다. 땀이 송골송골 맺은 연분홍빛 살을 보며 운혁은 자연히 열띤 밤을 상기했다.
그러나 웃음으로 무마한 어둑한 얼굴마저 몰라볼까. 부자연스럽게 경직된 입꼬리에 물끄러미 시선을 주니, 그녀도 눈치챘는지 아닌 척 얼굴을 쓸었다.
“다녀올 곳이 있어서.”
“상록에 아는 이라도 있습니까?”
사혜의 눈빛이 달라졌다.
“어딜 가십니까?”
다가오는 운혁을 피하지 않았으나 전처럼 두 팔 벌리고 함박눈 맞은 강아지처럼 뛰어들지도 않았다. 제자리에 뿌리내린 사혜는 그에게 어깨를 붙잡혀 안겼을 때야 비로소 몸을 움찔 떨었다.
“행선지라도 알려 주고 가십시오. 걱정이 되니까.”
“사혜야, 나를 연모한다 하였지.”
“그 말을 듣고 싶어 이러십니까?”
사혜는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손을 뻗어 그의 허리를 둘러 안았다. 꼭 몸을 붙이니 가슴팍에 닿는 동그란 이마가 느껴졌다. 죽어 가는 새처럼 가늘게 숨을 쉬고 있었다.
“나를 진정 사랑한다면.”
“예.”
“내가 누구든, 어떤 모습이든 변함없이 품어 줄 수 있나.”
앵두알 같은 눈이 옷자락을 파헤치고 나와 그를 올려다본다. 운혁은 기저에 늘 깔아 두던 매끄러운 미소가 사라졌음을, 사혜의 눈에 반사된 잔상을 보고 알아차렸다.
“연모해? 나를.”
영혼을 꿰는 눈을 직시하며 느리게 입술을 달싹였다. 그 홍색 눈동자에서 떠올리지 말아야 할 누군가를 떠올렸다.
‘네 몸속에 울고 있는 수많은 넋이 보인다. 너는 누구이길래 인간의 몸으로 괴물을 받아들여 원치 않은 살육을 반복하는 거지?’
‘기유야, 어차피 천도하려면 새 이름을 얻어야 하는데. 내가 지어 줄까? 하면 운으로 하자.’
‘왜 네 모습이 내게만 보였는지 모르지만, 난 이것도 연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입 맞춰도 아무런 느낌이 없어?’
‘그래, 하면 함께 가자. 언젠가 우리의 죄도 씻겨지겠지.’
“운혁.”
심지가 단단한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사혜가 그의 옷자락을 파이도록 움켜쥐었다.
“당신이 무엇이든 내 마음은 변함없어요.”
물살 치는 붉은 머리카락을 무심코 손가락 마디에 걸었다. 손안에 쥐고 어루만지기도 전에, 비단실처럼 고운 머리 타래는 바람에 흩날려 허망히 빠져나가 버렸다.
“무엇이든?”
“예.”
내가 진실을 말했으니 당신도 진실을 알려달라고, 여자는 눈으로 묻고 있었다. 정작 기회가 온다면 귀를 틀어막을 것처럼 떨고 있으면서 말이다.
삶과 죽음. 그는 갈래의 끝이 어디에 닿아 있을지 알고 있었다.
“다녀올게.”
그는 얼어붙은 사혜의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맞댄 뒤, 변함없는 웃음을 남기고 돌아섰다.
* * *
“이런 시시한 술법은 지긋지긋할 법도 한데.”
바람결을 따라 구르던 흙먼지가 멎었다. 토암산 중턱의 암자 한구석에 처박힌 동자는 빗자루를 무기처럼 쥐고 벌벌 떨고 있었다.
전조 없이 나타난 암운이었다. 검푸른 도포의 사내가 처마에 늘어진 그림들을 완상하며 여유롭게 거리를 좁혀 오는데.
“안 그런가, 응?”
자박. 자박. 신 끄는 소리가 어찌나 음산한지. 동자는 당장 비를 내던지고 도망치고 싶었다.
주르륵 걸린 열 개의 그림 중 한 곳에 멈춰선 운혁이 혀를 찼다.
“숨을 곳이랍시고 찾아낸 곳이 고작 그림이라. 너무 쉽잖아.”
팔락, 팔락―
흔들리는 서화에 한쪽 팔이 잘린 노옹의 뒷모습이 담겨 있었다. 감흥 없이 흔들던 운혁이 노옹의 다른 팔로 천천히 손을 뻗는 순간―
지직, 지지직!
거칠게 종이 찢기는 소리와 함께 외팔 달린 노옹이 서화 밖으로 굴러떨어지듯 튀어나왔다.
“임영.”
“네 이놈, 무얼 원하느냐? 내 팔과 눈 한쪽을 가져가고도 모자랐느냐!”
“스승님!”
울먹이며 빗자루를 휘두르는 동자를 임영이 막아 세웠다.
“인간들 틈바구니에 끼어 간이고 쓸개고 빼어 줄 이들을 찾아 가지고 놀다 질리면 죽이고. 이 간특한―!”
새하얀 점이 찍힌 동공이 무르춤한 아이에게로 느리게 옮겨붙었다. 새파란 살기를 기민하게 알아챈 노인이 피 섞인 고함을 뱉었다.
“애는 건드리지 마!”
“말은 바로 해야지. 기씨 대감 아들로 잘 살고 있는 날 찾아와 봉인시키려 든 건 네 놈 아닌가? 요귀에게 싸움을 걸러 왔으면 팔다리 부러질 각오는 했어야지. 다른 한 짝을 마저 뜯어 주지 못해 아쉬워.”
100년 전 홍운영을 도와 봉마에 힘썼던 임영은 생을 유지하기 위해 밑천이 드러난 신력을 박박 긁어 사용하고 있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히 버거운데, 돌무더기처럼 내장으로 쏟아지는 괴물의 요기를 면전에서 당해 낼 재간이 있을까. 죽지 않고 살아 있음이 기적이다. 숨 쉬기도 버거웠다.
켈록, 켈록. 쉼 없이 기침을 토해 내는 노인의 턱을 운혁이 받쳐 들었다.
“홍사혜를 만났지?”
노인이 몸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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