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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64/86)

64화

“도령은 내가 왜 좋습니까?”

어물어물 떡을 세 개째 넘기다가 무심결에 물었다. 사실은 내가 그리 좋으냐고 물으려고 했었다. 한데 마음속에서 곯던 의문이 질문의 방향을 비껴 토하게 했다.

살아가다 보니 자연히 터득하게 된 것이 있는데, 세상에는 이해와 상식이 통하지 않은 일들이 더 많다는 것이었다. 사혜는 자신이 그 태풍의 중심 어딘가에서 나무 한 그루를 붙잡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근본부터 파고들자면, 요귀가 사람에게 마음을 품을 순 없었다. 듣도 보도 못했다. 터무니없는 가정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그에게 죄스럽고, 환몽에 넘어갈 듯 말 듯 발을 걸치고 있는 자신이 갈 데까지 갔구나 싶었다.

만 분으로 쪼갠 확률이었다. 그중 티끌의 확률을 주워 들면, 새하얀 동공을 가진 요귀가 보였다. 기운혁의 얼굴과 몹시 닮아 있었다.

사혜는 눈을 들어 정면에서 그를 보았다. 헤어진 열일곱 이후로 나이를 먹지 않은 것처럼 풋풋한 앳됨이 남은 얼굴이었다. 물끄러미 바라보니 운혁은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어둠이 깊은 방 안에서도 달아오른 붉은 빛이 보일 정도였다.

부끄러워하는 요귀라. 인간의 악의로 태어난 놈들에게 지나친 걸 바란다. 헛웃음이 나왔다.

“이유?”

“예.”

“하면 너는 내 무엇이 좋은데.”

되묻는 그의 말은 이렇게 들렸다. 내가 전생에 너를 죽였는데, 어찌 나를 연모할 수 있냐고.

“처음엔 안쓰러웠습니다.”

홍운영이 기유에게 처음 내어 준 것도 연민이었을 터지. 그 여자도 수줍어하는 요귀를 보고 마음이 뛰었을까. 안쓰러워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을 정도로 동하였나.

“계속 눈이 가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 좋아진 것 같습니다.”

배신당해 죽은 홍운영의 전철을 착실히 밟아 가고 있었다. 강물에 휩쓸려 가는 운혁을 놓쳤을 때의 절절함과 무력감은 뒤편으로 치워 두고 사혜는 담백하게 말을 맺었다.

“사혜야, 나는.”

티끌만 한 가능성이 주먹만큼 커졌다. 그것이 점점 몸집을 키우자 새하얀 동공을 휜 요귀의 모습이 더 잘 보였다.

“아마 오래전부터 너를…….”

무엇에 쓰인 건지, 그녀의 이마를 쓸어내리는 사람의 얼굴이 그 순간 완전히 요귀로 변모했다. 그림자에 덮인 형체는 꿈속에서 알던 그대로였다.

괴물이 긴 숨을 쏟으며 고개를 비틀었다. 두 갈래로 갈라진 혀를 빼어, 사혜의 윗입술을 들추고 요살스럽게 집어넣으려 했다. 가느다란 혓바닥이 여린 점막을 미끈히 훑어내린다.

사혜는 헛숨을 삼켰다. 차가운 입술에 틀어막혀 버둥거리던 그 순간에 장막처럼 드리워진 괴물의 잔상이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를 붙잡고 캐물으려 했던 벽화의 글귀마저 아득해진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혜는 다만 그렇게 읊조렸다. 방금 본 익숙한 환몽을 무시하려는 것처럼 운혁의 어깨에 태연히 팔을 둘렀다.

“제가 그리, 좋아요?”

“좋으니까 이러지.”

“한데 왜 제 연모는 들으려 하지 않으십니까. 섭섭합니다.”

“듣고 싶어.”

“하지만 그때 분명.”

“항상 듣고 싶었어. 한데 너를 보면 자꾸…….”

“왜요, 그 여자와 내가 겹쳐 보입니까?”

“뭐?”

“홍운영이겠지요. 그 여자도 그런 소릴 합니다. 저와 내가 같다고. 미련스럽게 나만 모르는 거라고. 당신을 연모하는 것도 천벌을 받을 죄악이라고.”

그렇게 말을 잇는데 점점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분노인지 울분인지 배신감인지.

사혜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를 안으려 드는 손을 막았다. 휘저은 손을 붙들어 운혁이 입을 맞출 때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

마냥 달게 느껴져야 할 입맞춤인데 그 순간에는 소름이 쭉 내달렸다. 이렇게 언성을 높이면, 정녕 그가 요귀이면 다른 반응을 보이겠거니 했는데 기대는 배신당했다.

“아니잖아. 그 여자가 헛소리를 하는 거잖아요.”

진정 그가 속였다면, 지금껏 내어 준 연모가 거짓이라면 이리 절박히 매달릴 게 아니라 본색을 드러내고 목이라도 시원스레 물어뜯어야 옳다.

그 순간에는 죽음마저 기꺼울 것이다. 홍운영처럼 배신감을 못 이겨 망령이 되든, 사랑하는 사람을 찔러 죽이고 허망히 살든 변함없는 나락일 테니. 요귀에게 제 목을 가져가라고 기회를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연모해요.”

사혜가 멍하니 뇌까렸다.

“이렇게나 당신을 연모하는데.”

이제 우리는 어찌 되는 것일까 싶었다. 문득 지독한 피로가 몰려들었다. 허망한 웃음밖에 줄 것이 없었다.

사혜는 이부자리에 드러누웠다. 이대로 눈을 감고 잠으로 도피하고만 싶었다. 아니지, 그러면 또 꿈에서 그 여자의 비웃음을 듣겠다.

운혁은 무엇도 인정하지 않았다. 구왕조의 언어를 어찌 아는지는 묻지도 못했다. 대답을 듣고 싶은지도 모르겠지만. 그저 이 지독한 피로로부터 달아나 숨을 곳을 찾고 싶었다.

사혜는 눈가를 비비며 요요히 웃음을 흘렸다. 침방에서 기운혁을 매혹했던, 달빛 아래 쳐진 그 웃음이었다.

“이리 오세요, 도령.”

사혜는 운혁의 손을 맞잡고 옆자리를 쓸었다.

“어서 자야지요.”

어깨에 닿는 그의 피부가 뜨거웠다. 이리 뜨거운 열기 옆에서도 마음에 찬바람이 들어차는 것 같았다.

“오늘은 안아 주지 않으시네요.”

“연모해, 사혜야.”

힘이 쭉 빠져나간 고백은 흐느낌을 닮았다. 사혜는 어둠이 내려앉은 운혁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늘상 이렇게 껴안고 잠을 청했다. 안정을 되찾아 보려는 나름의 노력이었다.

“알아요.”

이미 몇 번을 배 맞춘 사이인데. 그 상대가 요귀라면 꼴이 우습게 되었다.

실없이 웃다가 팔을 뻗어 운혁의 옷고름을 풀어냈다. 다부진 어깨에 걸쳐진 상의가 늘씬한 허리 아래로 툭 떨어졌다.

“밝은 곳에서는 보여 주는 법이 없으셨죠. 오늘도 예외는 아니네요.”

사혜가 그의 맨몸을 쓸며 중얼거렸다.

다가온 입술이 사혜의 눈썹뼈를 더듬었다. 이슥한 달빛에 싸인 방 안에서 그녀는 무엇인가를 찾듯이 분주히 눈을 굴렸다. 상처. 마제의 몸에는 홍운영의 후손만이 볼 수 있다던 상처가 있다 하였는데.

“나는.”

슬픔에 기운 눈꺼풀이었다. 그의 앓는 목소리가 애달프게 귀를 적셨다.

“사랑, 받고 싶어……서. 그래서,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끌어안고 허기진 마음을 채우려는 그 몸짓이 안쓰럽다.

“연모해, 연모해. 사혜야.”

현실에서 눈 돌리고 이 밤에 영원히 묻어 가기를 바랐다. 이 사람이 주는 다정한 입맞춤과 눈먼 연모가 좋았다. 가슴이 아릴 만큼 좋아서, 한데 그것을 온전히 누릴 수 없는 서글픈 처지가 떠올라 눈물이 나더라.

“왜.”

“…….”

“왜 울어?”

감춘다고 감췄거늘. 밤눈이 밝은 사내는 스치듯 보아도 알아채고, 이내 손을 가져와 갈쌍한 눈시울을 닦아 주었다.

다정함에 슬픔이 짙어졌다. 운혁이 알지 못해 다행이었다.

그 밤에는 모든 것을 뒤로 밀친 채 원 없이 서로를 가졌다. 갈증을 풀고 격정에 파묻혀 놓지 못할 추억을 채우고, 덧없는 미련을 떠나보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 밤이었기에.

새벽이 지나가도록 늦더위 같은 열기는 소쇄될 줄을 몰랐다.

* * *

이다음 날 눈을 떴을 때. 부윰한 아침 햇살이 덮인 방 풍경이 가관이었다. 나뒹구는 베개와 떡 두 점이 쓸쓸히 올려진 굽그릇.

하다 지쳐 비실비실해지자 운혁이 내 입에 꿀이 듬뿍 든 떡을 밀어 주던 것이 기억났다. 달큰한 청밀 때문에 배로 달아진 접문에, 그는 입 속살에 붙은 꿀을 긁고, 턱으로 흘러내리는 타액까지 맛있게 감아올렸다. 그런 것들이 세세히 기억에 박혀 있었다.

받아 온 떡이 함지박만 하였는데 저걸 반 이상 나눠 먹었다고. 그것도 그 짓 하느라. 잠든 것이 아니라 기절한 모양이다.

어쨌거나 나는 간밤의 기억이 영 흐릿했다. 방사의 여운이 짙게 남은 이부자리 위를 졸린 눈으로 돌아보았다. 그 질긴 여운에 어젯밤 나와 그의 상황이 중대하지 못한 사소한 일처럼 느껴졌다. 해탈한 도승의 마음도 이처럼 가뿐할 터다.

“일어났어?”

무거운 목소리가 등짝으로 얼러붙었다. 깨어난 기운혁의 목소리는 낮게 쉬어 있었다. 그가 팔을 뻗어 나의 허리를 휘감더니 쓰러뜨리려는 조짐을 보였다.

넝마가 된 치마는 물론이오, 남사스럽게 펼쳐진 바지를 보니 이불 아래의 상황이 능히 짐작되었다. 나는 고뿔 든다고 두터운 솜이불로 칭칭 만 주제에 저는 얇은 홑이불이 전부였다.

“들어오세요, 도령.”

그는 기꺼이 다가와 이불을 열어젖혔다. 간밤의 여운이 짙게 묻은 손으로 나의 허벅지를 만져 보던 운혁이 미간을 좁혔다.

“지금은 안 돼요.”

“그럼 왜 들어오라 한 건데.”

“추울까 봐.”

운혁은 제게 자리를 내주고 주섬주섬 옷을 주워 입는 나를 불만스럽게 보았다. 뒤돌아 앉은 나의 허벅다리를 움켜쥐더니, 그래도 내가 꼼짝을 않자 치마를 입지 못한 고달픈 둔부를 쓸어내렸다.

“도령.”

“응.”

“닷새 남았습니다.”

“닷새.”

“예. 요귀를 무사히 봉하면 나와 함께 어디 먼 곳으로 떠날까요. 어머니도 모시고.”

“그럴까.”

“하면 원 없이 어젯밤처럼 놀아날 수 있지 않겠어요?”

“원 없이 무얼.”

“거짓에 속아도 그러려니 하고, 쾌락에만 빠져 사는 겁니다.”

뱉어 놓고 하하 웃었다. 반은 진심이고, 반쯤은 의미 없었다. 나는 실실 쪼개며 그나마 멀쩡한 속치마를 허리에 둘렀다.

환한 아침햇살이 투과하는 방 안은 눈 부시게 밝았다. 간밤보다 명쾌한 시야로 꼭 내 살을 비추는 햇발처럼 말간 기운혁의 얼굴이 비쳐 들었다.

복숭앗빛으로 물든 사내의 입술이 싱그럽고 어여쁘다. 눈을 떼지 못할 만큼 사랑스러워서 가슴이 미어진다.

“잠시 밖에 다녀올 테니 조반상 꼭 챙겨 드세요. 요즘 통 못 먹으시질 않습니까?”

“너는. 끼니도 거르고 어딜 가?”

“문후 공 문병을 가야 할 듯해서요. 어제 그만큼 해 댔으니 병문안 가지고 엄한 오해를 하시진 않겠지요?”

“……다녀와.”

탁, 열기와 체향이 뒤섞인 방에서 벗어나 문밖으로 한 걸음을 옮겼다. 풀이 죽은 눈동자가 뒤꿈치로 따라붙는 듯했다.

보면 마음이 무너질 듯해서, 나는 그로부터 최대한 멀리 벗어나기 위해 무작정 발걸음을 내디뎠다. 속도를 내며 걷다가 종래엔 숨이 찰 만큼 뜀박질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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