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못 보았어.”
“진정 못 보았습니까? 틀림없이 근방에…….”
“내동 그자와 시시덕댔잖아. 나는 보이지도 않아?”
“이 상황에서 태평하게 무슨 소리십니까?”
“안 죽었어.”
“…….”
“그 자식 안 죽었다고.”
사혜가 마침내 귀한 시선 한 자락을 그에게 던져 주었다.
“만져 봐서 알잖아. 찬물이라도 들이부어 볼까?”
“도령.”
색색, 고른 숨소리를 그제야 들었나 보다. 사혜가 험하게 눈을 일그러뜨리다 말고 문후를 내려다보았다.
“……설마 자는 겁니까?”
다치긴 하였으나 기절한 게 아니라 곯아떨어져 자고 있었다. 누적된 피로가 원인인지, 문후는 기절하는 즉시 꿈결로 걸어간 후였다.
“너는 배려가 지나쳐.”
“쓰러진 사람을 염려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자가 널 어찌 생각하는지 알긴 해?”
“그런 건 상관없습니다. 문후 공은 저를 돕기 위해 발 벗고 나서 주신 분입니다. 설령 공께서 변고를 당하신다면 많이 괴로웠을 겁니다. 스스로를 용서하기 어려웠을 테지요.”
염려하는 말씨와 다르게 잠든 문후를 내려다보는 사혜의 눈에는 아까와 같은 호의가 없었다. 마찬가지로 도구를 보듯이 지극한 냉랭한 태도였다.
사혜 역시 문후의 찌꺼기 같은 속내를 몰라서 허물없이 대해 준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목적을 이루려면 문후가 필요하다는 이유만으로 그가 살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누구도 저 때문에 다치지 않기를 바라요.”
한숨처럼 흘린 사혜가 다시 무릎을 굽혀 문후의 맥을 짚었다. 손가락 두 마디를 펼쳐 손목 안쪽으로 신중하게 신력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돌아서면 저놈이 어떤 눈으로 널 지켜보는지도 모르면서.”
새끼 뱀처럼 굽은 눈으로, 구역질 나는 혀로 이따금 입술을 핥고. 속된 시선을 보내는 걸 알면 저렇게 행동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왠지 홍사혜라면 그럴 것 같았다. 관대해서도, 마음이 물러 터져서도 아니었다.
“압니다.”
예상대로 그녀의 대답은 예상과 한 치 다르지 않았다. 문후의 맥을 짚는 사혜의 손에 진실된 염려가 담겨 있었다.
그걸 보니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질투 따위에 묶여서 이러는 게 아니라 이용당한다는 걸 알면서도 눈감아 주는 그녀의 태도 때문이었다.
그러나 희생을 치르며 살아왔을 그녀의 인생을 생각하면 이해 못 할 것도 아니라서. 앞서 잃은 이들이 많아 저와 연관된 사람이 다치길 바라지 않는 마음이 서글프다.
지켜보던 운혁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나는 언제까지 네 곁에 있을 것 같아?”
비뚤어진 마음을 안다. 지금 같은 상황에 곪은 곳을 건드려 보아야 다정하게 그를 돌아봐 주지 않으리란 것도 알지만.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모진 시선이 날아와 꽂혔다.
“혹여나 저와 문후 공의 사이를 못마땅히 여기신다면 전부 오해라고 말했습니다.”
“…….”
“이자가 내게 바라는 건 연정이 아닙니다. 퇴마를 도와 한몫 단단히 챙기려는 것뿐. 나의 뜻도 다르지 않습니다. 문후 공을 이용하면 이곳의 수색도, 시찰도 수월해지니까요.”
운혁은 제 욕심밖에 돌아볼 게 없는 군수의 팔자가 부러울 따름이었다.
“오해입니다, 도령.”
사혜가 다가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쥐었다.
“그러니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운혁이라고 불러.”
“운혁.”
부드럽게 달래는 손길로 차가운 뺨을 쓸어내렸다.
“그게 섭섭했어요?”
골이 난 이유 중 하나를 깨닫고 나니 미소가 그려졌다. 또 대답 없이 시선을 비끼는 운혁의 등을 끌어안자 그제야 단단한 팔이 화답하듯 가까이 다가온 허리를 마주 껴안았다.
사혜는 요즈음 제 정신머리가 멀쩡하지 않다는 걸 알았다. 수련을 하다가도 불쑥 떠오르는 환몽을 곱씹으면 기운혁이 한없이 좋다가도 이유 모르게 낯설어지는 것이다. 피할 생각 없었는데 넋 놓고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니 운혁이 저를 피하는 줄로 오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사혜는 운혁의 어깨를 짚고 발끝을 모아 들었다. 눈을 감고 손마디만큼 싸늘해진 입술에 입술을 맞대었다. 봄눈을 얹은 새순처럼 여리고 조심스럽게.
속삭이듯이 얕은 숨을 흘려보내 주니 미동 없던 사내가 벌린 입술을 달싹이며 호응했다. 깜빡이는 눈은 설움을 잊고 달곰한 입술에 녹아내리는 중이었다. 언제 저가 성을 냈는지조차 잊을 만큼 미련한 연정이란 이런 것일 터.
속이 상해도 어쩌겠나. 손 내밀면 좋다고 달려가 덥석 잡을게 번했다. 100년 전부터 부부로 맺어진 연이 아닌가.
그 순간에 멋없게 혼인을 청하던 홍운영이 떠올랐다. 운영이 곧 사혜였다. 100년 전에도, 지금도 제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야 비로소 자신을 내어 줄 수 있었다.
치미는 격정에 살그미 밀어 넣고 휘젓던 혀의 움직임이 감사나워졌다. 한 줌도 안 되는 사혜의 허리를 바싹 당겨 안았다.
“하, 다른 사내한테…… 주지 마.”
물기 찬 숨소리가 어지럽게 뒤섞여 울렸다.
“눈길도, 습관 같은 염려도 전부. 내가 있는데 왜? 왜 다른 이한테 주려는 것인지 모르겠어.”
“안 그럴 테니까…… 읏.”
그간 쌓인 설움이 제법 컸는지 머리카락 한 올까지 가져야 성에 찰 욕심보였다. 턱에 휘감긴 손힘이 단단하다. 고개를 비틀어 빼려 들다간 턱이 문드러지겠다.
다시금 사혜의 입술 안으로 침범한 새빨간 혀가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떨어질라치면 제 것처럼 뺏어와 혼을 내듯 얽었다. 달아날 여지를 주지 않겠다는 듯이 비비적대고. 흐르는 타액까지 쭉 빨아먹어도 부족하고 또 부족하다는 듯이 성화였다.
“아…….”
다부진 무릎이 사혜의 다리 사이로 비비듯 파고들었다. 귀밑머리를 덮는 숨결과 함께 아래에서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끝이 뭉툭하고 딱딱한 것이 허벅지 어딘가를 찌르는데, 절로 손끝이 꽉 오므라들었다.
“도령.”
“운혁……이라고, 하. 부르라니까.”
접문에 취한 사내는 어깨를 두드리는 손을 모른 체했다. 그녀의 머리카락에 손을 파묻어 뒷머리까지 함께 끌어들여서는, 한 움큼 입술을 물었다. 질척이며 비비는 야릇한 소리가 귓가에 달게 맺혔다.
그 뒤로 무엇이 어찌 되어 가는지, 시간이 흐르는지 거꾸로 도는지도 가물가물하였다. 피를 흘렸던 문후의 얼굴이 세상 평안해 보였으니 꿀 먹은 정신이 알만하다.
분유하는 감각들이 사혜의 번민과 불면을 잠재운다. 종국에 이르러 기운혁을 어찌 떨쳐 냈는지의 기억은 흐릿하였다.
사혜가 정신을 수거해 객관으로 돌아온 것은 해가 늘그막에 걸릴 무렵이었다. 오늘 분의 일을 마치지 못했다면 가출한 정신머리를 힐책했겠으나, 이부자리를 펴고 떠오르는 것은 접문의 여운이었다.
사혜는 한숨과 함께 가슴을 쓸어내렸다. 차분함을 되찾은 후 놓쳐 버린 요기를 떠올렸다.
‘동굴에서 발견한 글자를 물어보려 하였는데.’
엉킨 실을 더듬는 맹인의 심정이 이러할까.
구왕조의 언어를 아는 사내, 요기가 사라진 자리에 문후와 함께 있던 유일한 사내, 처참히 뭉개진 용수보의 욕탕…….
“…….”
어둠에 틀어박혀 있으면 남는 것은 환몽뿐이었다. 사혜는 털듯이 일어나 방문을 밀어젖혔다.
“문후 공께서는 어찌. 괜찮으시더냐?”
“상처는 지혈이 되어 문제가 없고, 환약을 드신 뒤 지금은 곤히 주무십니다.”
때마침 문후의 방에 들렀다 온 종이 친절히 일러 주었다.
“혹 아직 식전이시라면 식사를 방까지 가져다 드릴까요?”
“생각이 없구나.”
“예 그럼, 편히 쉬십시오.”
떠나가는 종의 뒤꿈치를 따라 달빛이 길게 드리워졌다. 밤이 된 것도 몰랐다니.
‘괜히 안 먹는다 하였나.’
마음이 하 심란하여 저녁상을 물리긴 하였는데 돌아서자마자 허기가 졌다. 이대로 드러눕자니 잠은 요원하고, 산책이나 나갈까 문턱 바깥으로 발을 뗀 차. 발끝을 막은 것은 달곰한 음식 냄새였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십니까?”
한 손에 모루 모양의 넓은 굽접시를 든 운혁이 문턱에 기대서 있었다. 어둠을 틈타 빠져나가려는 사혜의 발끝을 유심히 관찰하는 중이셨다.
“바리바리도 싸 오셨네요.”
감칠맛 도는 냄새의 출처는 굽접시 위였다. 알록달록한 꿀물 경단, 항취 좋은 감국잎화전, 고소한 대추인절미에 물호박떡, 오곡설기떡.
하필 사혜가 좋아하는 재료만 섞은 것들로 골라 무르기도 힘들게 말이다.
“기다려도 네가 도통 내려오질 않아서.”
운혁은 쓰린 표정으로 웃었다. 사혜를 먹이기 위해 가져온 것들은 바닥 저 멀리 치워 두고, 이부자리에 고상하게 앉아 옆자리를 툭툭 두들긴다.
“이리 와, 앉아.”
떡 중에는 무릿매골 시절, 스승 흉내를 내며 그녀의 집으로 찾아온 운혁이 함께 챙겨 오던 귀한 추억도 있었다.
돌연 어릴 적 생각이 나 코끝이 시큰거렸다. 지금처럼 그와 이부자리를 나누며 한방에 들어서리란 상상을 하였을까. 혼자만의 연모로 접어 두려 했는데 이제는 다정한 낭군이 되어 그녀의 손을 잡는다.
“기운 없이 보냈는데. 식사도 안 하고 바로 잘 것 같아서 왔어.”
“그렇습니까.”
“뭐라도 챙겨 먹여야지.”
내게 소중하다 하여 남에게도 소중하리란 법은 없고, 선의와 정의는 언제나 그러했듯 쉬이 배신당한다. 그보다 깊은 연모가 얼마나 되돌려받기 힘든지도 안다.
새는지도 모르고 질질 흘리다가 텅 빈 마음으로 잊어 가리라 여겼다. 마음이 맞닿았던 눈물겨운 순간을 기억한다. 그런 그가, 저가 모르는 어떤 이물스런 것일지도 모른다는 가정은 남겨 두고 싶지 않았다.
군침이 돌기도 전에 운혁이 연분홍색 경단을 대젓가락으로 집어 입술로 가져왔다. 고소한 꿀 냄새가 났다. 허기와 별개로 입맛이 없어 머뭇거리고 있으니 젓가락이 윗입술을 먼저 들추었다.
“걱정하기 싫어.”
커다란 손이 해쓱한 뺨을 쓸었다. 그 다정함에 사혜는 입술에 물고 굴리던 경단을 마지못해 입 안으로 넘겼다.
“미안합니다.”
“사과하지 마. 네 탓을 하는 게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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