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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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보하듯 나붓하게 나아가 쪼그린 문후의 등 너머에 다다랐을 때도 모자란 군수는 뒤편의 인기척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덕분에 든든히 배를 채웠습니다, 공. 오늘은 동굴 내부를 돌아봐야겠으니 공께서는 예 계십시오. 관청에서 보내 준 퇴마사 넷과 빠르게 순찰하고 오겠습니다.”
“위험하진 않을는지요? 일대의 기운이 흐리다고 겁을 주시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굴 안에 요귀들이 요귀가 숨어 있을지도 모를 노릇이고…….”
“위험하거든 신호를 보낼 테니 사지라도 쭉 뻗고 계십시오. 온종일 제게 끌려다니느라 고생하셨잖습니까?”
“끌려다녔다니요. 상록의 명운이 걸린 문제인데 군수로서 당연한 도리가 아닙니까? 그뿐이 아니더라도 무녀님과 협업은 제게 더없는 영광일 따름입니다.”
운혁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까지 눈감아 줄지 고민하는 것도 참 의미 없는 낭비였다.
단순히 투기에 눈이 멀어 이러는 것이 아니다. 일적인 관계를 구별 못 하지도 않았다. 기운혁. 그는 요귀였다. 인간들이 남몰래 품는 부덕과 악의를 가장 먼저 잡아채고 반응하는 종족.
사혜가 세 갈래 길의 동굴 안으로 일행들과 사라졌을 때, 운혁은 짐짓 다정하게 문후의 어깨를 틀어쥐었다.
“사혜와 잘 아는 모양이지.”
매끄러이 휘어진 입매에 웃음기는 사라지고 북풍 같은 한기만 도사리고 있었다.
“아, 홍 무녀님과 함께 오신 퇴마사님이시군요. 함자가 운혁이라고 하였던가요.”
그는 꼭 홍 무녀의 지인이라면 제게도 둘도 없는 은인인 마냥 살갑게 굴었으나 글쎄. 유들유들한 낯짝에 숨겨진 질척한 속내가 너무도 훤히 읽혔다.
태평하게 악수 따위나 받아 줄 기분이 못 되었다. 백번 양보해서, 저 사내가 사혜에게 온전한 호감만을 품고 있다면 속에서 불이 튀어도 눈감아 줄 법 하나 저자의 뱃심은 욕망과 욕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거기에는 사혜가 대요귀를 처치했을 때 길잡이 노릇을 한 제게도 섭섭지 않은 콩고물을 받아 내리란 강한 탐심. 그리고 영웅이 될지도 모르는 여인을 아내로 들여 가문의 번영을 꾀하려는 약은 속내가 버티고 있었다.
순수한 연심보다, 상록에서 겨우 군수 노릇이나 하다 끝날 팔자를 피고자 사혜를 도구로 이용하려는 배알이다. 그 욕망을 실처럼 휜 눈매에 잘도 가렸다.
사혜가 사라지자 마찬가지로 이쪽도 본심을 드러냈다. 반드럽게 접은 눈매가 일자로 펴지고 건조한 잿빛 동공이 드러났다. 사람의 악의에 익숙한 사혜마저 깜빡 속아 넘어갈 천의 얼굴이지 않나.
“예, 저와 홍 무녀님은 잘 아는 사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분이 무녀원에 계실 적부터 3년을 쭉 보아 온 사이였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지요……. 이렇게밖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게 애석할 따름입니다.”
“걱정? 애석?”
“예, 그분은 보기보다 여린 분이십니다. 그쪽은 사정에 어둡겠으나 홍 무녀님이 무녀원 시절 고생을 많이 하셨거든요. 제가 누구보다 잘 압니다. 몸이 많이 망가지셨는데 사왕께서는 무슨 심중으로 무녀님 혼자 마제를 제압하라 잔인한 명을 내리신 것이온지.”
끝까지 사혜를 걱정하는 투가 가증스럽다. 사혜를 성공의 발판으로 이용해 먹으려는 것도 짜증이 났으나 한 가지 더, 문후가 저는 모르는 사혜의 무녀원 시절을 안다는 것 역시 한껏 더럽혀진 심사에 오물을 끼얹기 충분했다.
“괜한 염려인 걸 알지만, 무녀님께서 혹 굴에서 발이라도 헛디디는 건 아닌가 염려됩니다. 미립굴 안이 보기보다 크고 넓거든요. 옛적에 건립한 사원도 있고, 길을 잘못 들면 수천 리 아래로 떨어지는 낭떠러지도 있고요. 참으로 걱정이 됩니다.”
누가 사내의 투기가 여인만 못하다 하였나. 그냥 넘어갔을 사소한 일도 발을 채는 돌부리가 되어 운혁을 걸고 넘어뜨렸다.
군수의 이름은 질릴 만치 불러 주는데 저는. 이름을 불러 달라 속살거려도 도령의 호칭이 익숙하다, 빛깔 좋은 추억이라고 변명하면서 그따위 말만 반복하지.
정신이 헛돌은 것처럼 실소하는 그를 보고 문후가 주춤했다. 안다, 자신은 별 이유를 다 붙여서라도 이자를 손봐 주고 싶은 거다.
“네깟 게 무어라도 되나?”
“예?”
“그리 걱정되면 가 볼까?”
“무슨…….”
문후는 빠르게 무표정이다 못해 시리게 깨져 가는 운혁 앞에서 다리를 꼬았다. 그 역시 사혜가 걱정되어 뒤따라갈까 고민하던 차였으나, 어쩐지 이 사내는 다른 저의를 품은 듯 보였다.
난도질하는 시선이 마치 그에게 목적을 둔 것 같아 거절하려고 입을 연 순간. 눈앞에 불똥이 튀며 강한 충격이 골통을 때렸다.
“으, 헉……!”
삽시간에 막된 손이 목을 움켜쥐었다. 문후는 아연실색한 얼굴로 동굴 외벽에 처박혀, 제 목을 갈고리처럼 휘감은 비늘 돋은 손을 바득바득 긁었다. 뒤집힌 눈꺼풀은 벌벌거리고, 숨찬 얼굴은 푸르다 못해 납빛으로 죽어 가는 중이었다.
두득, 우드득.
“너는, 너는.”
푸른 동공이 희게 탈바꿈했다. 목숨의 위협을 느낀 문후가 미친 듯이 발버둥을 쳤으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운혁은 허공에서 벌레처럼 베베 꼬는 문후의 다리를 걷어차고 손아귀에 힘을 가했다. 붉은 나비가 돌연히 날아들지만 않았어도 이 자의 목을 꺾기를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
“…….”
요기를 알아차린 나비가 부산스럽게 주변을 날아다녔다. 두 사람이 대치하고 있는 곳은 샛길로 빠질 수 있는 동굴의 출구 중 하나였다. 사혜와 충분히 떨어진 거리일 텐데도 금세 그의 기운을 느끼고 날아온 영물이 퍽 사랑스러웠다.
아니, 홍운영이라고 해야 할까.
문후를 내던진 손이 나비 두엇을 가로챘다. 나비의 여린 날개는 얼마 못 버티고 억센 아귀힘에 산산이 부서졌다.
“네, 네 놈은 대체 뭐…… 윽!”
우득.
말을 잇기도 전에 문후의 눈에서 빛이 사그라들고 모가지가 옆으로 축 늘어졌다.
* * *
“무녀님, 이 기이한 벽화는 무엇일까요?”
세 갈래 길에서 무리를 나눠 들어갔다. 사혜를 보필하던 퇴마사는 한참 동굴 길을 따라 걷다가 기묘한 벽화를 발견하고 멈추었다.
어두컴컴한 내벽에 횃불의 그림자가 일렁였다. 사혜는 벽에 댄 손을 떼어 냈다. 사혜의 손바닥을 타 넘어 동굴 벽까지 붉게 달군 신력은 요귀의 줄행랑치는 발을 묶는 경계 구실을 해낼 것이다.
“이 둥실둥실한 그림은 구름인지 무언지 모르겠습니다.”
“파도 같습니다. 옆에 대들보처럼 솟아난 것은 뱃머리일 테고요.”
“말씀을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네요. 한데 왜 이런 것이 미립굴에 그려져 있을까요?”
한참을 말없이 감상하던 사혜가 미간을 좁혔다.
“상록은 구왕조의 도읍이라 하였지요. 일단은 이 정도까지 하고 돌아가는 편이 낫겠습니다. 군수님께 여쭤볼 것이 있어요.”
“이 옆에 쓰인 자잘한 글자까지 기록해 갈까요? 생소한 언어로 보건대 구왕조의 산물이 아닐까 하는데요. 해독이 불가합니다.”
가늘게 찌푸려진 붉은 눈이 차례로 글자를 훑었다. 눈꺼풀을 비비고 보아도, 횃불을 들이대어 꼼꼼히 살펴보아도 벽의 글자가 변하는 일은 없었다.
그녀를 뒤따른 퇴마사는 당연히 구왕조의 언어를 알아보지 못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사혜도 마찬가지였겠으나…….
“…….”
지금은 상용되지 않는 문자열과 구두점. 그러나 일부는 알아볼 수 있었다. 배운 적이 있었으니까.
‘어째서.’
어찌하여 기운혁은 사장된 언어를 알고 있었던 걸까.
사혜는 동요를 숨기고 침착하게 돌아섰다.
“옮겨 적어 갈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예? 하지만…….”
[……내 줘, 나를.]
[구해 줘.]
“의미를 알 것 같거든요.”
공간을 가로지르는 미세한 파동이 사혜에게 닿았다. 바람 한 점 들어차지 않은 깊숙한 동굴로 예고 없이 불어닥친 강렬한 요기였다.
멀지 않은, 그러나 몇 개의 공간을 뛰어넘어야 도달할 수 있는 은밀한 장소에서.
“무녀님?”
불행한 날갯짓 소리가 귀따갑게 머리 위로 맴돌았다. 지금 이 자리에 없는 나비들이 만들어 낸 소음이 아니라, 무언가를 느끼고 살피러 간 아이들이 보낸 겁먹은 신호였다.
“홍 무녀님!”
사혜는 횃불을 끼고 가파른 길을 내달렸다. 바닥이 미끈해 몇 번이고 발이 엉켜 경사길을 구를 뻔했으나 위기를 느낀 발은 멈추는 법이 없었다.
영물은 각양의 요기에 반응하지만, 맥을 못 추릴 정도로 겁을 먹지 않는다. 아무렴 신이 떼어 준 자질인데 호락호락 당할까. 덩치가 곱절로 차이 나는 땅두더지도, 예리한 동체시력과 민첩한 움직임으로 여럿의 퇴마사를 황천길로 인도했던 삵귀 앞에서도 떠는 법이 없었다.
한데 이미 두 마리가 가루로 산화했고, 나머지 아이들도 같은 운명을 앞두고 있었다.
“문후 공!”
영물이 바스러진 곳으로 뛰어들었다. 사혜가 그곳에 도착하였을 때는 농락하듯 요기가 사라져 있었다. 피 흘리며 혼절한 문후와, 그를 지탱하듯 붙들고 걱정스레 살피는 기운혁만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
한달음에 달려가 늘어진 문후의 맥부터 짚어 보았다. 풀잎 가지처럼 미약한 맥이 붙어 있다. 피로 물든 목 부근에는 아슬하게 급소를 비껴간 상흔이 자리매김했다.
조금만 엇나갔어도 재가 되고 남을 생명의 불씨였으나 다행히 운혁이 시기적절이 지혈을 해 두어서 생명의 지장은 없었다.
“왜 두 사람이 이곳에 계신 겁니까?”
“이자가 네 안위를 걱정하며 달려가기에. 나는 뒤쫓았고, 와 봤더니 이러고 엎어져 있었어.”
“엎어져 있었다고요?”
문후의 뒷머리부터 경추까지 말라붙은 검붉은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목을 에두른 갈퀴 자국은 흡사 짐승 잡는 덫에 채여 질질 끌려간 형세인지라 보자마자 소름이 쭉 끼쳤다.
하나 주위를 파내듯 보아도 요귀의 냉기는 없고, 부산하게 아웅다웅하는 나비들의 신어는 도통 못 알아먹겠고. 마치 우롱당한 기분이었다.
“이곳에 오래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문후 공, 정신 차려 보세요. 문후 공! 아…….”
“안 죽었어.”
“하지만.”
“겨우 이 정도 상처인데. 그것으로 끝이 날 거였으면 파리만 못한 목숨이 아닐까.”
“혹 이곳에서 수상쩍은 걸 보지 못했습니까?”
사혜는 떨면서 문후의 몸을 붙들고 이리 뒤집고 저리 뒤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