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
운혁은 쉼 없이 입담을 나누며 앞서 걷는 두 사람을 무표정으로 응시했다.
부러 발을 묶어 두려고 그 많은 부적을 쓰라 종용했는지 의심 갈 정도로, 사혜가 그에게 맡긴 부적의 양은 닷새를 집중해야 끝낼 수 있는 무지무지한 양이었다.
그동안 문후가 지형 탐방을 빌미로 사혜와 방아깨비처럼 쏘다니는 꼴을 멀리서 지켜보았다. 바빠진 사혜는 그에게 전만 한 관심을 주지 않았는데, 몸을 섞은 그날 이후로 넋을 놓고 있을 때가 잦았다.
몸 약한 걸 모르지 않는데, 발목이 붓도록 상록을 뒤지며 요굴 주위에 피를 뿌리고 돌아올 땐 늘 골골댔고, 그런 주제에 염려 말라며 그의 어깨를 두들기며 웃는 꼴이라니.
그러고선 비척비척 제 방으로 걸어가는 폼이 영 불안해 찾아가 보았더니 식은땀을 뽈뽈 흘리며 기절해 있지 않은가.
다급히 깨워 일전처럼 제 피를 한 방울 떨어뜨린 차를 사혜의 입술 사이로 넣어 주었다. 저가 기절한 줄도 모르고 눈뜬 사혜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기절한 게 아니라 잠에 든 것뿐입니다.’라며 어색하게 중얼대는 것이다.
밤새 간호를 해 주고 싶은데 되었다며 정중히 거절한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폐를 끼치기 싫단다.
잠자리 이후 더욱 돈독해지기는커녕 은근히 벌어진 거리도 거리지만, 문후 공에게 쪼르르 달려가는 사혜의 뒷모습을 보면 이제는 익숙해진 투기가 몸을 차지한다. 살의 어린 시선이 잇따라 문후에게 옮겨붙었다.
보기 싫게 뺨을 붉히고, 꼭 저가 뭐라도 되는 양 스스럼없이 남의 부인 옆에 들붙어 치덕대고.
“어제 얘기한 대로 저도 무녀님에게 의견에 동의하는 바입니다. 같은 환경이지만 청송굴 주변엔 소나무가 많으니 요귀들이 싫어하겠죠. 역시 미립굴 쪽이 적합한 것 같습니다.”
“문후 공 생각도 그렇습니까?”
“예, 앞으론 그쪽에 병력을 더 집중시키겠습니다. 안 그래도 요즘 무리하시는 것 같아 염려스럽습니다, 무녀님.”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인데요. 곧 무녀원에서 지원이 올 것이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는 뒷모습이 퍽 도탑다. 지켜보는 눈동자에 서늘한 광채가 어렸다.
그러는 사이 새롭게 비늘이 돋아난 팔은 피를 흘리고 있었다. 무심히 붉은 물을 닦아 내던 운혁은 문득 거기에만 통증이 그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따끔거리는 왼 가슴에 손을 대고 생소한 고통을 받아들이던 차,
“도령?”
다섯 걸음 뒤처진 그를 사혜가 돌아보았다. 보폭을 따라잡기를 기다리듯이. 거슬리는 사내 역시 사혜 옆에 게딱지처럼 붙어 운혁에게 손짓했다.
“어서 오시지요. 무녀님, 이곳입니다. 무엇이 느껴지십니까?”
“보통 탁한 기운이 아닙니다.”
“역시 그렇지요. 이 안개를 보세요……. 지대를 바꾸고 날씨를 부리는 요귀라니. 요력이 어느 정도 일지 상상하기가 두렵습니다.”
전방에 시커먼 아가리를 쩍 벌린 거대한 동혈이 있었다. 저것이 닳도록 순찰하며 고심한 끝에 요굴로 결정지은 장소인 모양이었다.
운혁은 근심 어린 얼굴로 미립굴을 둘러보는 사혜에게 부드럽게 나아갔다. 그리고 들으란 듯이 말했다.
“과연 내 부인은 똑똑하기도 하지.”
“도령, 바깥에서 그런 호칭은…….”
예상대로 사혜는 난색을 표했다.
“찾느라 고생했어.”
유치한 걸 알아도 몸과 마음은 원래 따로 노니는 법이었다. 운혁은 두 사람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사혜를 제 쪽에 세웠다. 어깨로 문후를 치며 부인과 나란히 서 손깍지를 끼니 그리도 흡족할 수가 없었다.
흠칫 떨던 사혜도 별수 없이 팔을 늘어뜨렸다. 저리 살갑게 부르는데 외면할 수도 없고, 장단이나 맞춰 주자는 심보였다. 지금도 사혜는 굳은 얼굴로 그가 아닌 문후 공을 보고 있었다. 둘 곳을 몰라 아무 데나 던져둔 시선이었다.
운혁은 가슴을 비수로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며 눈살을 좁혔다.
“아, 그…… 혼인하신 것을 몰라뵈고.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주제에 사혜가 항변이라도 해 주길 바라는지, 무슨 저급한 농이냐며 화를 내 주기를 바라는지. 실망을 감추지 못하고 물러나는 문후의 시선이 맞잡은 두 사람의 손을 향해 있었다.
“청송굴과 미립굴에 제단을 마련하고 부적을 걸어 두었어요. 이제부터 봉마진을 그릴 것인데 크기를 가늠하기가 어렵네요.”
사혜는 제 손을 길거리에 던져둔 밧줄처럼 운혁에게 쥐여 주고 말을 돌렸다. 일로 돌아가자는 강건한 뜻을 비치면서 그의 손등을 어루만져 주니 이 이상 골을 낼 수도 없었다.
요즘 들어 늘 이런 식이다. 불러도 홀로 멍하니 넋을 빼 두고 있다가 죄를 뉘우치는 사람처럼 미안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고.
운혁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덧붙였다.
“방해 안 할게.”
“도령.”
“네가 날 자꾸 피하는 것 같아서……. 그래서 그랬어.”
“피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피곤해서 그런지 근래 자주 헛것이 보입니다. 알아보니 영기가 떨어진 무녀들이 종종 겪는 현상이라고 하더군요.”
사혜가 지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운혁은 말을 잃었다. 그사이 피곤한 기색을 무마한 그녀가 팔뚝 위에 시퍼런 날을 가져다 댄다.
“봉마진의 직경이 동굴의 너비만큼이어야 할 텐데. 피가 모자라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봉마진의 크기만큼 사혜는 피를 잃는다. 칼자국이 빗금처럼 새겨진 새하얀 팔등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운혁은 피가 몽글몽글 솟는 여린 팔을 차마 볼 수 없어 실눈을 떴다.
“문후 공, 잠시 저를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사혜는 운혁을 뒤로하고 문후를 부르며 한참을 쭈그려 앉아 바닥에 무언가를 공들여 쓰고 그렸다. 잘 안 풀리는지 아까운 머리칼을 쥐어뜯기도 하다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뱉기를 열 번. 짊어진 책임의 무게에 비해 턱없이 작은 어깨였다.
방해 않겠다고 말한 지 일각도 채 되지 않았다. 하나 운혁의 발은 그 약속을 잊은 것처럼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일반적인 상급 요귀 하나를 봉하는데도 퇴마사 두셋이 붙는데, 도읍을 박살 낸 요귀를 홀로 처치하라는 것은 애당초 터무니없는 요구였다.
운혁은 처진 사혜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조금 쉬는 게 좋겠어.”
“말씀은 고마우나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닙니다. 벼랑 끝부터 차근히 곡선을 그려 나갈 것인데, 오늘까지 다섯 개를 완성시키지 않으면 돌아가질 못해요.”
책임에 인생을 내건 여자에게 역시 조금 쉬는 게 낫지 않냐는 말은 의미가 없었다.
“오래 몰두하였잖아. 돌아보니 근처에 맑은 계곡이 있던데 머리라도 식히는 건.”
“겨우 한 식경 지났습니다, 도령.”
“하면 내가 도와줄까?”
“이 일에 도령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다고 누차 말하였는데 기어코 따라오신 겁니다.”
합의도 양보도 없음이다. 고집 센 부인은 등줄기를 쓸어내리는 손을 슬쩍 물리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러고선 퇴마사들을 모아놓고 줄기차게 계획을 떠들어 대는데, 홀로 버려진 건 자신뿐이었다.
그는 나무에 등을 대고 사혜의 주위로 몰려든 퇴마사들을 찬눈으로 둘러보았다.
“무녀님, 오른편으로 다섯 걸음부터 경계를 쳐야 하는 것이 아닐는지요.”
“무녀님, 요굴 안이 어두워 횃불을 넉넉히 준비해야 될 것 같습니다.”
“무녀님…….”
“무녀―”
개중에 가장 거슬리는 것은 단연코 상록의 젊은 군수라고 할 수 있겠다. 어미 오리 볼기짝에 붙은 새끼도 저리 발발 따라다니지는 않겠다. 부인이라 못 박아 주어도 정신을 덜 차린 천치가 아니고서야.
“도령, 이제 일각 지났습니다.”
때마침 다가온 사혜가 조심스럽게 그를 살폈다. 짜증도 역정도 배어 있지 않은 눈은 관련 없는 운혁을 이 지루한 일터에 끌고 와 제가 더 미안하다는 기색이었다.
방해된다고 물릴 때는 언제고 또 얌전해지니 걱정이 되어서 찾아온 모양이지. 그는 가슴팍에 닿는 사혜의 눈을 물끄러미 보았다.
“제가 말했잖습니까? 따라와도 지루하기만 하지.”
“안 지루해.”
“문후 공께 부탁해 보필할 종을 붙여 드릴 테니 객관으로 돌아가시지요.”
“내가 가면 그대로 둘 거잖아.”
그 눈이 옮겨져 이번에는 피가 밴 사혜의 팔등에 묶였다. 붕대를 겹으로 감아도 어차피 새로 배일 피. 아무렇게나 두고 처치는 나중 일로 미뤄 둔 행태에 운혁을 뺀 이곳 모두가 동의했을 것이다.
사혜는 뒤늦게 제 팔을 뒤로 거뒀으나 한참 늦된 반응이었다. 그는 그만두라고 하는 대신 사혜의 팔을 들어 헐거워진 붕대를 동여맸다.
사그락.
천 자락이 얕게 쓸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혜도 이번만큼은 약간 누그러진 기색으로 그에게 손을 내어 주고 있었다.
“저는 걱정 마세요.”
“…….”
“이까짓 피를 보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대단한 사명감으로 요귀 앞에 서는 게 아니에요. 도령과 함께하고 싶어서. 그래서 전보다 더 의욕이 생겼어요.”
그러며 웃는 사혜 앞에서, 운혁은 이번만큼은 미소로 화답할 수 없었다.
“무녀님, 이것 좀 드셔 가면서 하시지요!”
그때 문후가 촉새처럼 두 사람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투둑, 운혁이 간신히 유지하던 무언가도 함께 끊어졌다. 눈치를 발바닥에 매단 상록의 군수는 그러거나 말거나 싸 온 새참 바구니를 풀기 바빴다.
“문후 공, 번거롭게 이런 것을 다 준비하셨습니까? 대충 소금간을 친 주먹밥으로 때워도 충분할 텐데.”
“귀하신 분을 모시게 되었는데 그런 허접한 음식을 준비해서야 되겠습니까? 마침 저기에 쉴 곳을 마련해 두었는데 어서 가시지요.”
“허접하다니요, 어릴 적 배부르게 잘 먹은 음식이었는걸요.”
“하하, 연고 없는 마을을 위해 애써 주시는 무녀님께 좋은 음식만 대접하고 싶은 제 마음도 헤아려 주시지요. 한 손으로 먹기 편하게 간을 친 밥에 유부를 쌌는데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연이에게 자주 만들어 주던 것이랍니다.”
운혁은 제 인내심에 새삼 감탄했다. 가진 것이라곤 질척한 욕망뿐인 요귀가 참 오래도 참지 않았나.
뺨을 쓸어 주고 떠난 사혜를 묵묵히 지켜보다가 천천히 발을 움직여 나아갔다. 불행의 전조를 찾기 어려운 발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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