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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화 (59/86)

59화

“무얼 보고 있어?”

“기다리던 서신이 도착하여서요.”

상록으로의 출발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내 머리를 빗겨 주던 운혁이 빗을 내려놓고 어깨에 슬쩍 턱을 올렸다.

“누구한테 온 것인데.”

“신세를 진 어르신께 고맙다고 두 달 전 서신을 보냈는데 이제서야 답장이 왔지 무업니까. 참, 부지런하기도 하시지.”

물론 거짓이었다. 이것은 임영의 답신으로, 오래도록 답이 오질 않아 나의 전언은 잊힌 것인가 하였는데 생각지도 못한 때에 소식을 받은 것이다.

하나 곧이곧대로 그에게 털어놓을 순 없었다. 이미 내가 제 뒷조사를 하고 다닌 것을 안다지만, 여태껏 손을 못 떼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면 아무리 내게 관대한 사내더라도 기분이 상하겠지.

‘진원에게 보고도 끝났겠다, 어차피 내버리려고 했던 편지지만.’

한데 달랑 한 줄뿐인 편지가 암만 봐도 마음에 걸렸다. 누리끼리한 종이 위에는 만날 시일과 장소와 함께 의미심장한 문구가 덧붙여 있는데,

[그대가 아직 살아 있기를 바랍니다.]

불길한 말을 덧댄 이유를 모르겠다. 남의 명운에 관심 많은 오지랖 넓은 무속인이 한둘인가. 요귀가 판치는 요즘 같은 시국에 안부를 곁들이는 것이 별스런 일은 아니지마는…….

“어르신 누구.”

시큰둥하게 종이를 접자, 운혁이 음습하게 한 발 더 가까워졌다.

“누구―”

입술을 귓바퀴에 딱 붙이고 제 딴에 음습하게 속삭이는 걸 시큰둥하게 받아쳤다.

“투기하시는 게 보기 좋긴 합니다만.”

나는 별 볼 일 없는 것을 대하듯이 무성의하게 서신을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럴 상대가 아니랍니다.”

“해서 누구냐니까? 너와는 무슨 관계인데.”

기운혁은, ‘기방에서는 나이 육십 줄 먹은 노인네가 방년도 안된 어린 기생을 끌어안는다.’라며 상투도 틀지 아니한 애송이든 검버섯 핀 늙은이든 연배의 문제가 아니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그가 평시에 무얼 보고 듣고 잡수며 골몰하길래 날 두고 저런 망상을 할 수 있는지 의아해진 참이었다.

“그런 것 아니라니까요? 저랑 어머니랑 고생한 것 아시죠? 오갈 곳 없는 저희 모녀를 보름간 머물게 해 주신 고마운 분이신데, 오순도순 깨 볶는 부인도 계시고 토끼 같은 자식들도 넷이나 끼고 사시는 분이어요.”

“깨 볶는 부인?”

“예, 예.”

“토끼 같은 자식.”

“그렇답니다.”

설득당한 운혁은 굳은 눈썹을 풀고 인자하게 웃으며 내 허리를 토닥였다. 마음이 풀렸다는 증거였다.

“한데요, 도령. 기방에 드나드셨습니까?”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

“하신 적은 없지만 꼭 기루에서 오입질하는 노인네를 본 것처럼 말하시길래.”

“그건 도방 다니면서 동료들에게 건너 건너 들은 것이지.”

“도방 출입을 부정하시진 않네요.”

“그건 진즉 말했지 않아. 난 거짓말은 안 해. 한 짓을 안 했다고 둘러 빼지도 않고.”

“착하십니다.”

나는 기운혁의 뺨을 칭찬하듯이 쓸었고, 그는 만족할 만큼 쓰다듬을 받다가 내 손바닥에 묻은 입술을 손목 안쪽으로 옮겨 쪽 소리 나게 빨았다. 역시 그깟 요귀에게 죽기엔 생이 너무 아까웠다.

봉마식 준비는 막바지에 달했다. 어지간한 환몽은 그럭저럭 쫓아낼 수 있었고, 곡도는 오른팔처럼 움직였으며, 상쇄와 봉마의 술(術)이 적힌 부적은 도합 150여 장에 이르렀으니.

자신감도 붙었겠다, 이대로 차질 없이 요귀와 한바탕 구르고 놈의 머리통을 사왕에게 바친 뒤 기운혁과 붙어사는 꿈을 그려 보았다.

흐무뭇한 미소로 발끝을 까딱이는데, 호신불부(護身佛符)의 마지막 획을 긋는 손 위로 운혁이 부드럽게 손을 겹쳤다.

“무인(巫人)의 염원이 굳셀수록 부적의 효력이 좋다지.”

“그렇지요.”

우리는 겹꽃처럼 손을 포개고 함께 붓을 움직여 글자를 완성했다. 올가미처럼 단단한 황금색의 글자가 빛을 뿜으며 너울거린다.

포개진 손은 따뜻했다. 제 몸이 차네 어쩌네 하면서 나를 해결책으로 제시했을 땐 사실 귓등으로 흘려들었는데 얼마쯤 사실인 모양이었다.

“요즘엔 홍운영이 나타나지 않아요. 남 인생을 가지고 감 놔라 배 놔라 어찌나 성가시게 굴면서 괴롭히던지. 사라지니 속이 다 시원합니다. 이대로 영영 떨어져 나갔음 싶은데.”

“곧 그리될 거야.”

“가끔 보면 도령은 참 모르는 것이 없단 생각이 듭니다.”

따지자면 기운혁의 말 하나만 믿고 요귀 토벌 책략을 세운 셈이었다. 실지로 대요귀에게 푸른 비늘이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않나.

진원이 엿들었다면 안일하기 짝이 없다며 원귀가 되어 찾아오지 말란 잔소리나 퍼부었을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매번 제게 무얼 좋아하고 무얼 갖고 싶은지 물으셨지요. 정작 저는 도령에 대해 아는 게 없네요. 어디 가고 싶은 곳이라거나, 하고 싶은 일 없으신지요?”

“햇살 잘 펴진 마루에서 너를 안고 뒹구는 것은 생각해 봤는데.”

운혁은 내게 등짝을 얻어맞고도 좋다고 턱을 괴고 웃었다.

“그런 것 말고, 옛적부터 꼭 하고 싶었는데 여유가 없어 포기해야 했던 일이라든가. 없으십니까? 하기야 화수분 끌어안고 돈방석에 나앉은 양반께서 용상을 제외하고 얻지 못할 것이 무어 있겠냐만.”

“글쎄. 가끔은, 그 노인네처럼 깨 볶을 부인이 있었으면 싶기도 해.”

시원스러운 웃음이 떠나고 난 뒤에 잿가루처럼 까슬한 바람이 찾아들었다. 맑게 재잘거리던 운혁은 꼭 그 바람에 할퀴어진 것처럼 눈가를 찡그렸다.

“하면 부인 데리고 살면 되지요.”

“네가 되어 주려고?”

“저 외에 누가 있겠습니까?”

“하면 서방, 하고 나를 불러야지.”

“노리셨는지요.”

“어서. 나는 부인, 하고 부를 테니.”

제가 말하고도 그 호칭이 썩 마음에 들었는지 심취한 기색으로 내 옆구리를 간지럽혔다.

“낭군은 어떠해.”

“혼례도 안 치렀는걸요.”

“혼례식이 그리 중요한가?”

“딱히 중요한 건 아니지만 이왕지사 제대로 식을 치르고 부부 됨을 고하는 것이…….”

대거리해 놓고 보니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농을 농으로 받아치지 못하고 곧이곧대로 흡수하는 내가 재밌다는 듯이 쿡쿡대고 있었다.

계면쩍은 것은 둘째고, 허리께를 뱀처럼 굽이굽이 쓸던 손이 못내 시커멓다. 배를 맞춘 그 밤의 기억이 황홀하여 곱씹을수록 잠이 달아나는 건 나도 매한가지였다. 하나 기운혁은 나보다 정도가 심했다.

원래 사내란 것이 밤이 되면 금수와 한배를 탄다고, 이후로 운혁은 아주 제 목침을 내 침방으로 들고 오더니, 날이 저물면 깨끗한 물로 씻은 뒤, 침의를 느슨히 풀고 이부자리에 기대어 나를 올려다보는 것이다.

욕망이 깃든 손가락 장단이 느껴졌다. 대게 이런 식의 접촉이 이어지면 끝은 침방이었다.

“우선 일부터 끝내구요.”

“아, 사혜야.”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그래, 오늘이 마지막이니까 더욱 정답게 시간을 보내야지 않겠어?”

“내일은 새벽부터 일어나 상록으로 출발해야 하고, 챙겨야 할 것들을 정비하려면 잠은 일찍 자 두는 편이 도움이 되겠고, 말 먹일 여물을 넉넉잡아 다섯 단 부탁하였으니 외양간지기가 유시까지 찾아올 겁니다. 또…….”

쌓인 일들을 손가락 접어 가며 열거하자 운혁은 입을 다물었다. 단단히 앵돌아진 얼굴로 내 등짝에 서러운 뺨을 묻는데, 죽을죄를 진 것처럼 마음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달래 줄 처지가 못 되었다. 나는 축 늘어진 미역을 허리에 매달고 200장을 채울 때까지 꿋꿋이 부적을 써 내려갔다.

그는 얌전히 누워 있다가도 성난 사람처럼 내 배를 만지작거리고 농밀히 팔등을 쓰다듬다가 싸늘하게 손길을 거두었다. 음울한 목소리로 “사혜야.” 부르며 관심을 끌려 들다가 반응을 안 해 주니 시들해졌다.

한참 몰두하다가 날이 어둑해지고서야 기억났다는 듯이 운혁을 보았다. 그새 평온히 숨을 고르며 자고 있었다.

“좋은 꿈이라도 꾸시나 봅니다.”

올라갈 듯 말 듯 살그미 휘어진 입꼬리가 사랑스러워 쓸어 보려던 찰나였다.

어느 때보다 뚜렷하게 요귀의 기척이 느껴졌다. 상록이 있는 북향이 아닌 지금 이 자리, 꼬집어 말하자면 전면에서 피부에 스밀 듯이 훅 다가들었다.

“…….”

뺨으로 내려앉던 손이 허공에 얼어붙었다. 그를 바라보았다. 귀신 사내의 잔상이 잠든 그의 형체 위로 덧씌워진 것도, 떨쳐 낸 줄 알았던 홍운영의 비소가 귓가에 쓸려 든 것도 전부 헛것이고 환청이었다.

눈을 감았다 뜨니 잔상은 사라지고, 귀를 긁는 소음은 낙엽이 땅을 구르는 소리였다. 그런데도 심장이 무섭도록 울렸다.

나는 잠든 사내의 눈꺼풀을 오래도록 응시했다. 시간이 지나 그가 부스스 눈을 뜰 때까지도 그 잔상에 얽매여 꼼짝을 할 수 없었다.

* * *

상록으로 출발하는 날.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여로에 올랐다. 따라오지 마시라 하였는데도 운혁은 기어코 말 한 필을 더 준비시키더니 보란 듯이 고삐를 쥐었다.

한나절을 걸쳐 해가 서산으로 까무룩 넘어갈 즈음, 우리는 상록에 다다랐다. 마중 나온 이는 왕실의 먼 종친으로, 상록의 군수이자 이름자는 문후라고 했다.

‘문후 공?’

이름이 익숙하다 했더니 종종 무녀원에 들르던 그 서글서글하고 말쑥한 사내가 아닌가. 공 역시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나를 만나 몹시 의외라는 듯 환히 웃었다.

“아니, 오신다는 분이 홍 무녀님이셨습니까?”

“상록의 군수가 문후 공일 줄은 몰랐습니다.”

“반갑습니다, 무녀님. 아직 도곡에 계시는 줄 알았는데.”

그는 뜻밖의 해후에 몹시도 반색했다.

문후 공은 상록의 요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매해 사왕부를 찾았는데, 번번이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당시 내 나이가 열일곱, 공이 무녀원에 들락인 기간이 3년이었으니 이번의 만남으로 4년째 이어진 연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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