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제가 그 괴물을 봉할 수 있을까요.”
“할 수 있어, 너는.”
확신의 말에 기운이 살아났다. 의지를 다지고 도자기 병을 품속에서 꺼내 들자 그는 눈가를 구기며 물었다.
“무녀라면 그 독이 들어먹지 않는 방법을 알 텐데.”
“알다마다요. 다만 제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지라…….”
환몽술의 대처 방법을 알기만 하면 실상 요귀들의 살상법 중 별 볼 일 없는 축에 속했다. 불우한 과거가 없는 유복한 삶의 주인들에게는 말이다.
어두운 과거를 이겨 먹을 만한 행복한 기억을 떠올리면 환몽은 쉬이 물러난다.
운혁이 마개의 뚜껑을 비틀 동안 난 얌전히 눈을 감았다. 고구마 뿌리처럼 텁텁한 안개가 원을 그리며 온실을 에워쌌다.
전번에 아이를 지우려고 극독을 마시던 어머니는 이제 제 배를 찌를 거대한 바늘을 들고 서 있었다. 그것을 손 못 쓰고 지켜보는 나는 점차로 숨이 가빠졌다.
그러다 마침내 어머니가 대바늘을 번쩍 치켜들었을 때.
“사혜야.”
경련하는 눈꺼풀을 커다란 손이 덮어 주었다. 생각보다 더 오랜 시간을 끈 모양이다. 나는 물기가 축축한 눈으로 환몽에서 벗어났다.
“정말 대책 없이 지긋지긋한 눈물이 아닌가요. 평생 이 독한 환몽을 이겨 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정히 없으면 이것으로 지워 내.”
운혁이 나의 시선을 붙들며 차분히 입을 열었다. 처음엔 무슨 말인지 알지 못했으나 뒤이어 그의 그림자에 덮이면서 알게 되었다.
“벼랑 끝에서 널 살리는 이가 있다는 것을. 입맞춤을 기억하여.”
모진 기억들을 지워 내라고 사내가 달게 속삭였다.
우리는 당연한 수순처럼 다정하게 입술을 맞댔다. 정순한 기운이 폐부를 감싸고 머리를 채운다.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듯이.
우는 나를 웃게 만드는, 슬픔을 달게 녹여 안락과 행복을 주는 사내. 아마도 일생 두 번 만날 기회는 없을 한 사람이 여기 있다.
내밀어진 그의 손을 붙잡은 찰나, 아주 옅은 피비린내가 풍겨 왔다. 입천장을 긁는 숨결에는 날 선 희락과 고통이 묻어 있었다.
하나 그 순간에 운혁의 얼굴은 열에 묶인 부나방의 날개처럼 여리고 또 행복해 보여서.
함께 열기로 지펴진 나는 곧 피비린내를 잊어버렸다.
* * *
첫 단풍이 물든 날, 신호가 잡혔다.
팔락.
지도를 살피는데 붉은 나비 두엇이 사납게 양 날개를 팔락대며 위급함을 알리고 있었다.
그들이 날개에 싣고 온 것은 저 멀리 어딘가에서 전해지는 불온한 기세였다. 축축한 늪지대와 독이 스민 안개. 바람을 통해 생생히 와닿는 풍경에 눈살을 찌푸렸다.
“왜?”
지도를 뜯어보다가 흙빛이 된 내 얼굴을 운혁이 쓸었다. 할 일을 끝낸 영물은 파스스 빛 조각이 되어 무릎으로 떨어져 버렸다.
“그 요귀, 이 정도로 또렷이 기척을 낸 적은 처음입니다.”
지도에 표시된 마을은 진하와 상록.
앞선 마을은 먼젓번 나비가 공유한 대요귀의 이동 경로였고, 이제는 상록이었다.
상록은 국호가 바뀌기 전 구왕조의 도읍으로, 옛적에는 교역과 상행이 활발한 대도시였으나 왕권이 교체된 뒤, 정계에서 밀려난 왕실 종친들의 유배지로 쓰였다. 내가 봉해야 할 요귀가 그리로 배를 쓸며 이동 중이었다.
무녀원에서 생활할 적에도 종종 놈의 요기가 전해진 적 있었으나, 진원이 달려갔을 때는 이미 늦었다. 그렇게 여섯 번을 반복하자 진절머리가 난 사왕과 요귀의 지루한 술래잡기 같은 추격전이 장장 4년 동안 이어진 것이었다.
“진하에서 상록까지는 보름이 걸립니다. 녀석의 경로와 흔적으로 보건대 두 이레 뒤 상록에 다다를 테지요.”
나는 붓을 내려놓고 지도의 한 부근을 짚었다.
“슬슬 마중을 나가야겠습니다. 가서 봉인진을 쳐 두려면 이르게 출발해야 해요.”
요귀는 거점을 옮길 때 가장 안정적인 생태를 찾는다. 물의 습성을 지닌 놈이 상록에 안착하였을 때 가장 먼저 몸을 숨길 굴을 팔 장소를 예견하고 그곳을 선점해야 마땅했다.
“4년이라, 참 멀리도 돌아왔네요.”
나는 길게 숨을 뱉었다. 수련원 시절부터 나의 인생은 오로지 놈을 멸하는 것으로 설계되어 있었는데 이제 고지가 코앞이었다.
“역적 같은 것 말고 역사에 길이 남을 무녀가 되었음 싶은데요.”
“그건 장담할 수 있지.”
“어찌 확신하시는지요?”
“이 일은 너밖에 못하는 일이니까.”
“도령도 참.”
그래도 앞으로 이겨 내야 할 난관에 더해진 것이 있다면, 임무를 끝마치고 내가 얻을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었다.
“도령께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은데.”
“해.”
“요귀를 봉한 뒤에요.”
“봉한 뒤에?”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럼 늦을 텐데. 지금 하면 안 돼?”
“낯간지러워서 못해요.”
“해 주지. 듣고 싶은데.”
긴 손가락이 어서 실토하라는 듯 입술을 툭툭 건드렸다. 조롱이떡처럼 만지작대니까 나는 간지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등으로 굴러가며 웃었다.
기운혁은 풀밭에 떨어진 내 옆에 다가와 엎드려 누웠다.
“내가 말해 준 방법, 기억하지?”
“푸른 비늘을 도려내라고 하셨지요.”
그 뒤로 어찌 되는지는 듣지 못했다. 언젠가 다시 물어본 적이 있는데, 뽑아 보면 알지 않겠냐며 모호함만 잔뜩 얹어 놓았다.
혹시 독을 막은 마개를 뽑는 것과 같나. 설마하니 그럴만치 허술해 빠진 요귀는 아니겠으나 비늘을 뽑아 버리면 몸이 터진다거나 생명력이 고갈된다거나…….
상상이 이어지던 그때 그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이건 용수보에서 받으신 선물 아닙니까?”
호헌이 품 안에 떠넘긴 귀한 흑선이었다.
“가져.”
그는 부채를 내 손에 억지로 쥐여 주었다. 방구석에 처박아 두기만 하였는지 호헌이 막 건넸을 때처럼 상한 깃털이 없고 대오리가 빳빳했으며, 향주머니를 달아 둔 깃을 펼치는 순간 금목서 향이 은은히 풍겨 왔다.
금판에는 이 부채를 쥐여 준 사내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어딜 가든 잊지 말고 갖고 다녀.”
“도령은 수호신이니 무어니 그런 미신 안 믿을 줄 알았는데.”
“믿을 구석이 없으니, 이런 거라도 믿고 싶어지는 것이지.”
무슨 뜻인지 모르겠으나 나를 생각해 주는 마음만은 역연히 전해져 왔다. 그의 바람대로 겨울이 지나기 전에 요귀와의 연을 끊어 낼 수 있기를 바랐다.
이듬해 봄에는 수호의 명분이 아닌 한생을 나눌 정인으로 이 사람의 곁에 서게 해 달라고.
* * *
이후의 수련은 순조로웠다. 방식은 전과 다를 것 없고, 몇 번 거듭하다 보니 뭐 기운혁의 도움 없이도 어느 정도 해결 볼 수준에 이르렀다.
다만 그럴수록 함께 있지를 못하니 운혁의 안색은 나날이 시름에 잠겼다. 하기야 근래에 그와 붙어 있는 시간이 부쩍 줄긴 했지.
나는 요력으로 영물의 배를 불리기 위해 수도 곳곳을 쏘다니며 요귀 사냥에 혈안이 되어 있었고, 하루 20장씩 신력을 얹은 부적을 휘갈기거나, 검으로 나무토막을 써는 것으로 빠짐없이 일과를 채웠다.
그리고 해가 떨어지면 운혁이 준비해 둔 약탕에 늘어져 있다가, 이부자리에 눕기 무섭게 곯아떨어지기 일쑤였다.
기운혁은 어느 날부터 일도 팽개치고 내 등만 구경하는데. 철모르고 치덕댄다고 한 소리 들을까 봐서인지, 전처럼 이거 하자, 저거 하자 하며 열심히 꾀어내려 들진 않았다. 저렇게 빤히 구경하는 것으로 부담을 줄 뿐.
“이리 오세요, 도령.”
“어딜 가?”
“날도 좋으니 나들이나 가렵니다. 생각해 보니 도령과 함께 어딜 간 적이 없는 듯하여서요.”
내가 헛기침하며 손을 내미니, 야무진 손깍지가 돌아왔다.
“요 앞 시전도 돌아보고, 강변 따라 쭉 걸을까요?”
“응.”
처음부터 시전에 나갈 계획을 짜 두긴 하였다. 수련도 막바지겠다, 상록으로 출발하기 전 정인과 손잡고 걸어도 보고, 요깃거리를 사 먹기도 하고. 어쩌면 다시는 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일들을 원 없이 해 보자 싶었다.
어제 진원에게 미루고 미루었던 답신을 보냈다. 벽수에 대한 의심은 거두었고, 나는 일찌감치 상록으로 출발하겠으니 눈치껏 전력이나 보태란 내용이었다.
나는 운혁의 손을 붙잡고 앞서 걸었다. 그는 고분고분 내가 향하는 대로, 앞서간 그림자를 사분사분 밟으며 들뜬 걸음으로 뒤따랐다.
넝마를 걸쳐도 번드르르 귀티가 흐를 사내가 반뜻한 관을 쓰고 화려한 의복을 걸치니 길목마다 자연히 사람의 이목을 달고 다녔다.
시전에는 타국에서 들여온 구관조를 늘어놓고 흥정하는 상인들부터 솜씨를 발휘한 다색의 공예품들, 한탕을 노리기 위한 쌍륙과 투전판이 한창이었다.
“도령, 잠시만 기다리세요.”
“곧 시작하는데 어딜 가?”
바지런히 돌아다니다가 사당패들이 재주를 부린다길래 자리를 깔아 둔 참이었다. 남쪽 출신의 기인들을 보기 위해 입추의 여지 없이 몰려든 구경꾼들 틈새로 어렵사리 끼어 앉았다.
“잠깐이면 되니 자리 지키고 계셔요!”
아까 시전을 구경하면서 고급진 장신구를 늘어놓은 매대를 발견하였다. 그래도 깜짝 놀라게 하려고 주려는 선물인데 운혁을 달고 다니면서 고를 순 없고, 살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는데 마침 기회가 온 것이다.
홍수처럼 불어난 인파에 정신없이 치이느라 달려가는 속도가 더뎠다. 미꾸라지처럼 어깨를 치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뚫고 간신히 매대에 다다랐을 때는 녹초가 다 되었다.
“사시게?”
“아, 구경을 좀.”
시정아치가 턱을 쓸며 상체를 내밀었다.
“낭군님 주려고? 보기 좋네그려. 자, 어떤 걸루 드릴까.”
다행스럽게도 좌판 위에 눈여겨보던 술띠가 아직 주인 없이 누워 있었다. 나는 땀에 젖은 이마를 손등으로 훑으며 술띠를 가리켰다.
“안목이 탁월하시네그려. 낭군님과 금실지락이 두텁나 보아. 이것으로 말하자면 사시사철 변함없는 부부의 신의를 상징하는 솔나무색 술, 게다가 요 가운데 장식은 깊은 춘정을 뜻하는 푸른 옥석인지라. 아주 잘 고르셨소.”
엽전깨나 만지셨는가. 인심 두둑히 채운 목소리로 상인이 차지게 혀를 놀렸다. 장황한 설명을 듣자니 괜스레 겸연쩍어 쑥스럽게 달아오른 귀를 만지작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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