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어김없이 붉게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허공에 부유한다. 그 핏빛 잔상을 가리듯이 기운혁이 내 머리맡에 손을 짚고 몸 위로 올라탔다.
널찍한 어깨를 방패 삼아 망령의 눈이 가려지길 바랐으나 여자는 비웃듯이 한결 더 선명하게 존재를 내비칠 뿐. 어루더듬는 손도, 가슴을 누긋하게 쓸어내리는 혀도 나를 완전히 홍운영으로부터 떼어 내지 못했다.
그는 탐욕이 뭉친 눈으로 내게 순종하며 입을 맞추었다. 위부터 아래까지 치더듬으며 잘근잘근 살을 깨물었다.
나는 그의 어깨를 쓸어내렸다. 병목처럼 좁아 드는 그의 허리에 다리를 감자 거칠게 달아오른 숨이 귓가에 쏟아졌다. 그러는 사이에 본능처럼 허리는 밀고 들어오고, 나는 떨면서 운혁의 뒷머리를 휘감았다. 아래로 끌어내리자 숨이 막히도록 입술이 맞물렸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검은 머리카락의 감촉이 좋고, 혀를 누르는 온기가 좋고, 그의 낯선 면면이 황홀할 만큼 좋았다. 까무러치는 열기에 등 떠밀려 그의 팔뚝을 긁었다. 위든 아래든 하나만 했으면 좋겠는데. 욕심 많은 사내는 모두 누리고 싶어 했다.
간간이 뱉는 신음에 운혁은 귀를 새빨갛게 물들였다. 내가 바짝 굳어서 아, 하면 그는 내가 아픈 줄 알고 움직임을 멈춘 뒤에 달래듯이 입술을 핥았다.
사실 아픔은 둘째 문제였다. 천장에 붙어서 무섭도록 빤한 시선으로 날 내려다보는 홍운영이 통증을 잊게 만들었으니.
그는 점점 혼몽해져 더욱 깊숙한 안쪽으로 길을 트길 바라며 매달리는데, 나는 쾌락 열에 취한 와중에도 홍운영을 노려보고 있었다. 운혁의 어깨 너머. 조금이라도 눈길을 비끼면 정확히 시선이 마주치는 그 자리에서 홍운영은 조소했다.
“결국은 너도 별수 없구나.”
이러한 순간마저 저 여자의 조롱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앞으로도 내가 기운혁과 무엇을 하든 빠짐없이 지켜보고 있으리라는 사실이 끔찍스러웠다.
* * *
색색, 기진해 잠든 사혜의 숨소리가 고요히 울렸다. 운혁은 사혜의 뺨에 손을 가져가려다 멈칫했다.
온기가 식고 나니 뒤늦게 제 팔등에 쩍쩍 갈라진 비늘이 보였다. 이 원죄가 주는 통증은 감정이 짙고 정교해질수록 시시각각 깊어졌다.
“…….”
운혁의 시선은 수초처럼 늘어진 머리카락 틈새로 길게 휘어진 입술에 닿아 있었다. 말을 걸어도 대답은 없고 늘 제 할 말만 쏟아 내고 사라지는 원귀.
홍운영이 사라지고 남은 자리에 맴도는 피비린내가, 제 손으로 그녀를 죽였던 전생을 끌어왔다. 지금 보료에 누워 곱게 잠든 여인과 망령의 얼굴이 지독히도 닮아 있었다.
‘후손이 아닌 후생이었나.’
만약 그렇다면 어젯밤 사혜가 보였던 부자연스러운 태도도 이해가 갔다. 분명 자신의 전생을 어렴풋이나마 본 것이다.
어제 여종의 보고를 듣고 수도 외곽으로 갔을 때, 길바닥에 쓰러져 있던 사혜의 몸에서 빠져나가는 홍운영의 혼백을 똑똑히 목도했다. 그런 식으로 사혜가 알아서는 안 될 것을 알려 주고 떠난 것이 틀림없다.
저질러 놓고 후회한들 없던 일로 되돌아가지는 않는 법. 운혁은 이 괴로움의 늪에서 빠져나갈 방도를 알지 못했다.
한참 동안 얼굴을 감싸 쥐고 있던 그는 잠든 사혜의 곁으로 돌아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등을 끌어안고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아무것도 모르길 바랐다. 계속 연모하는 그 마음 그대로 나를 대해 주었으면.
* * *
“아으, 두야…….”
어디 머리뿐일쏘냐. 전신이 찜통을 부여안고 우로 좌로 구른 듯 푹푹 쑤셔왔다.
허리를 짚고 일어나다가 문득 찬 기운이 느껴져 이불을 들춰 보니 웬걸. 함께 꽃잠 잔 사내는 오리무중하고 옷 대신 비단 이불에 싸인 흰 몸뚱어리만 있었다.
나는 허리를 토닥이다가 사람 꼴을 갖추고 마당으로 나갔다. 어제 운혁과 나누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는 그냥 넘어가려 했으나 내 꼴을 보고 마냥 손 놓고 있을 수 없어 수련하는 날 저가 무조건 참석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좋은 아침입니다.”
내가 오기 전 정돈을 해 둘 요량이었는지 기운혁은 온실에 가 있었다. 눈 부신 햇살이 창 아래 선 그의 얼굴 위로 쪼개졌다. 밤을 함께 보내 더욱 돈독해져서 그런지 하루아침에 콩깍지가 세 겹은 덧씌워졌다.
아니, 사실 콩깍지가 아니라 남의 눈으로 보아도 참 고고한 사내이지.
“사혜야.”
한데 자세히 뜯어보니, 나는 허리 아래가 빠질 듯 쑤시는 걸 빼곤 문제가 없었는데 그는 몹시 밤잠을 설친 기색이었다.
“저 때문에 일어나실 필요는 없었는데……. 수련이야 내일이든 모레든 도와주면 그만 아닙니까? 어서 들어가서 주무시지요.”
“약조는 약조이니까.”
연한 풀잎색 포의박대 차림의 운혁이 새신랑처럼 웃으며 내 허리를 당겼다.
“잘 잔 얼굴이네. 아픈 곳은 없고?”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구.”
요귀에게 긁힌 상처를 깨끗이 치료해 줄 때는 언제고, 지난밤 거기를 핥고 빨아 대는 통에 붉은 자국이 더 늘었다. 타박을 놓아도 연정에 물든 사내는 좋다며 심장이 저리도록 웃었다.
“좋았잖아, 그렇지.”
“으응, 뭐…….”
“난 어제 말도 못 하게 좋았는데.”
포근한 햇발이 사내의 흰 피부를 비추고 곧은 눈썹뼈를 따라 흘렀다. 공교롭게도 내가 두른 치마와 기운혁의 도포가 동일한 풀색이었다. 짝지 같은 모양새에 흡족해진 나는 운혁의 허리에 아닌 척 팔을 두르며 물었다.
“해서요, 도령. 앞으로 어찌 저를 도와주신다는 겁니까?”
“우선 환몽은 접때 했던 대로 막아 보고.”
나뭇가지를 쥔 운혁이 매끈한 흙바닥에 무언가를 차근차근 그려 넣기 시작했다.
“요귀마다 핵이 있어 그걸 찾아 부숴야 하는데. 네가 멸해야 할 그놈은 핵이 없어.”
“하면요?”
영핵을 도려내어 무력화한 다음 봉해 마땅한데 뿌리 뽑을 싹이 없다는 것은 성립할 전제가 없다는 의미였다.
“있는데 누구도 발견치 못한 것이 아니고요?”
“그렇다면 기록이 남았겠지. 몇백 년간 무녀들 사이에 그러한 기록이 있던가.”
“어쩌면 있을지도 모르지요. 그럼, 이것을 무찌를 방도가 없다는 것입니까?”
시름에 잠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던 그가 가볍게 웃는 소리를 내었다.
“설마. 외려 핵이니 무어니 눈에 불을 켜고 찾는 것보다 쉬울 텐데.”
이 사내, 무얼 제대로 알긴 아나. 무녀원에서 들어본 적도, 찾아볼 수도 없는 정보들인데.
그래도 명색이 밀국의 제일가는 퇴마사신데, 게다가 기운혁의 성격까지 고려하면 허투루 말을 뱉진 않았을 터다. 그의 능력은 용수보에서 불 요귀와 사투를 치를 때 한 번, 나의 입에 고인 독을 빨아 뱉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보통이 아니었다.
다만 머리론 알겠으나 곧이곧대로 믿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못 믿겠어?”
“진원도 대요귀 때려잡는 비기는 알려 주지 않았는데. 그도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진원?”
아차. 생각이 깊어져 헛말이 나와 버렸다.
“누군데.”
“무녀원에 살았을 적 절 지도해 주신 스승입니다.”
“그래, 사내 이름이네.”
그는 씹듯이 뱉으면서 나를 빤히도 보았다. 어떻게 단박에 알았지? 보통 무녀원이라 운을 띄우면 여인이겠거니 넘겨짚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왜 그런 표정이십니까?”
묘한 반응에 도리어 아리송해진 내가 고개를 기울이자, 그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웃음으로 화답했다.
“정이라도 통한 사이일까 궁금하여.”
“무슨…….”
미소 뒤에 칼을 감춘 표정이었다.
“왜, 매일같이 얼굴 맞대고 수련하다 보면 정도 들고 눈도 맞고 할 텐데. 하물며 네가 그곳에 머문 햇수가 3년. 아니, 4년이었던가. 일단은 그 작자가 사내라니까, 가능성이 없진 않지?”
“윽, 끔찍한 소리 마셔요. 진원이랑 제가 무슨…….”
몹쓸 소리를 하고 있음에도 등 뒤로 허리를 꽉 안고 부비적거리는 몸짓이 애처로워 보일 건 무어람.
솔직히 별것도 아닌 일로 신경 쓰고 조마조마하게 굴 줄은 몰라서 좀 더 골려 주고 싶었다. 하나 끙끙대는 그를 이보다 애태우고 긁을 순 없는 노릇이라.
“정말?”
“그렇다니까요. 도령께서도 어젯밤에 겪어 봐서 알 것 아닙니까? 경험이 있었다면 제가 그리 서툴진 않았겠지요.”
꼭 이리 다 실토하게 만들지.
손부채질하며 투덜대고 있는데 상대가 조용했다. 흘깃 보니 운혁은 아예 내 목에 얼굴을 파묻다시피 하여 투기로 끓는 눈을 숨기고 있었는데, 새까만 머리와 대비되어 유독 흰 귀는 앵두색 물이 들어 있었다.
“아니면 됐어.”
“믿어 주는 거지요?”
“그럼.”
이렇게까지 말 안 했으면 종일 착잡함을 써 붙이고 돌아다녔을 거면서.
다시 기운을 얻은 운혁은 내 뺨에 입술을 붙이며 놀다가 나뭇가지를 주워 들었다.
“어쨌든 놈을 죽이는 방법은 스스로 생을 포기하게 만드는 거야.”
“녀석이 잘도 생을 버리겠습니다.”
어떻게 생겨 먹은 놈인지도 모호한데다, 인간의 악의를 우리고 우려 봉인을 풀고 잡초 같은 생을 이어 가는 놈을 자멸하게 하라니.
“퍽도 제 발로 봉인구로 기어가겠어요, 어디.”
“그게 힘들면 놈의 목 뒤에 돋은 푸른 비늘을 도려내.”
뒷목의 푸른 비늘.
“도려낸 다음엔 어찌 되는 겁니까?”
“목이든 가슴이든 칼로 찔러야지.”
“녀석이 가만있을까요. 말도 못 하게 발광할 텐데.”
“그거면 돼.”
“한데 도령은 그걸 다 어찌 아십니까?”
“나의 스승이 일러 주었지. 겁 없이 요귀 꽁무니를 쫓다가 얻은 값진 깨달음. 대가로 입이 찢어지고 팔 한쪽이 뜯겼지만.”
“아.”
몸속에 꼭꼭 숨어 있는 핵을 찾는 것보다야 비늘을 잡아뽑는 것이 훨씬 쉬운 것은 두 번 말해야 입 아팠다. 진위 여부는 모호한데다, 기운혁의 스승이란 자가 허풍선이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만 어쨌든 내게는 희망인 셈이다.
무엇보다 운혁이 내게 해가 되는 조언을 무책임하게 뱉을까. 주워 모을 수 있는 정보란 다 긁어모아야 했고, 방법의 가짓수는 많을수록 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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