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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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심을 숨기고 꿋꿋이 을렀다. 그때 처음으로 기유의 얼굴에 또렷한 감정이 솟았다. 마뜩잖다는 듯이 찌푸린 표정에 나는 이유 없이 아릿함을 느꼈다.
“귀신과 먼저 혼례 올린 여인을 데리고 살 사내는 없을 텐데.”
“뭐?”
왜 저리 오만상인가. 원치도 않은 성혼을 대뜸 들이밀어 가소롭고 우습나, 했던 생각은 부리나케 꽁지를 감추었다. 사람 찢어 먹는 요귀는 참으로 별스런 고민을 하고 있다.
“너 참 웃긴다. 날 박박 털어 이용해 먹어야 할 입장이면서.”
“해서 네게는 문제가 없다고?”
“그런 거 일일이 따지면 천도 못 한다, 기유야.”
하물며 문제가 있어도 상관없다. 구역질 나는 사내와 부부 놀음하며 두 해를 굴러서 그러한가. 다른 사내들이라면 진저리가 났다.
그리고 스스로도 진저리가 쳐졌다. 물론 천도를 위한 명혼식이라 하나 이 제안은 명백히 홍운영의, 나의 사심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산목숨인 나도 이리 욕심을 부리는데, 죽어 이 땅에 미련도 많고 욕심도 많아야 할 기유가 제 처지보다 나를 더 배려하니 속이 아팠다. 희생당해 요귀가 되었다지만 암만 봐도 그는 요귀가 아니었다.
기유는 말이 없다가 작게 한숨을 지었다.
“하면, 그리해.”
“남편과 사별했어.”
“네가.”
“그래, 내가. 그러니 괜한 것은 신경 쓰지 마.”
그 밤, 우리는 명혼식을 치렀다. 요귀와 혼인한 무녀라니. 스승님께서 알게 된다면 경을 칠 터다.
“기유야, 네가 살아 있을 적 이야기를 해 봐.”
매일같이 몸을 누이던 좁좁한 뒷방에 우리는 나란히 누웠다. 합환주며, 원앙 목각에 얹은 개나리색 초며, 그릇에 괸 정수(淨水) 한 사발이며. 비록 번듯한 혼례복은 없었으나 산 사람끼리 성혼하듯 엉성하게나마 구색은 맞추어 놓았다.
잠을 자지 못하는 기유는 눈을 뜬 채로 말이 없었다. 침묵 속에서 나는 그다지 느끼고 싶지 않은 홍운영의 감정을 체험해야 했다. 닿지도 않는 주제에, 이부자리에 송장처럼 누운 귀신 사내 때문에 가슴이 궁궁 요동치고 있었다.
내 것인데 내 것 같지 않은 감정. 홍운영과 나는 별개의 사람이나 지금 순간만큼은 하나가 된 것 같았다. 그래서 기분이 나빴다. 사내는 하나인데 여인 둘이서 너저분한 감정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왜 네 모습이 내게만 보였는지 모르지만, 난 이것도 연이라고 생각해.”
“…….”
“너와 붙어 사니 전처럼 마음이 허하지 않아. 이제 하다 하다 외로워 귀신에게 마음이 동하다니.”
담담히 말하고 나는 조금 웃었다. 홍운영은 진실로 기꺼워 홍소했고, 나는 지리한 상황이 어이가 없어서 실소했다.
“너는 악귀 주제에 참 곱게 생겼다. 불공평해.”
“그건 너 같은 계집에게 더 어울릴 말이 아닌가? 그리고 무엇이 불공평하다는 거지?”
“그야 너는…….”
상대가 무심히 읊조렸더라도, 이미 마음 반쪽을 나눠 준 이의 입장에서는 달리 들리는 것이다. 기유의 눈에 내가 곱게 보인다는 소리로 들렸다.
나도 모르게 손을 움직여 기유의 팔을 쓸었다. 만져질 리 없으니 그도 피하지 않은 것이겠지. 쑤욱― 통과한 손을 머쓱하게 쥐었다 펴길 반복하는데,
“살육은 내 의지가 아니야.”
“응?”
기유의 눈이 내게로 미끄러져 닿았다. 광채가 도는 푸른 눈은 텁텁한 어둠 속에서 부스러기처럼 떠오른 한 줌의 빛 같았다. 내가 줄곧 찾던 그 빛.
“제물이 되었을 적 내 원망을 잡아먹은 요귀. 그것에게 이성이 먹히는 순간 나는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어. 내키는 대로 살상을 저지르며 본능대로 움직이는 것이지. 그런 와중에 네 목소리를 들었어.”
기유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하면 지금도 위험한 거야?”
“천신당의 기운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네 곁에 머물 때에는 그런 충동이 들지 않아.”
“그건 다행이네.”
나는 그의 마른 손등뼈를 어루만졌다. 살아생전 퍽 고달프게 살다 죽었겠구나. 왕자가 어떤 삶을 살면 뼈마디가 불거질 정도로 말랐나. 어디 뒤주에라도 갇혔나. 그도 아니면 먼 섬에서 귀양살이를 했나 싶었다.
기유에 대해 많은 것이 궁금했으나 제 전생에 치를 떠는 사내에게 물을 수도 없었다. 무엇이 됐건 안쓰럽다. 어루만지는 손짓을 그가 알아보았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다. 귀신에게 무얼 기대하는 것부터가 정신 나간 사고였다.
“언제까지 이런 상황이 이어지진 않겠지.”
“하면 기유야, 요귀가 다시 횡포를 부리기 전에 어서 널 천도시켜야겠구나.”
“만일 실패하거든 그때는 나를 죽여.”
죽여 마땅할 요귀가 죽여 달라 비는데 가슴에 송곳이 꿰이는 듯했다.
“줄곧 원했던 건 그것 하나야.”
이제 닿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그 순간만큼은 홍운영과 내가 유별하지 않았다. 우리의 마음은 통해서 하나를 바랐다.
귀신과 면식을 튼 지 얼마나 되었다고, 나는 무력하게 죽었을 그가 너무나도 안타깝고 애틋했다. 다 포기하고 죽기를 바라는 체념에서 그 언젠가 면경에서 보았던 나의 얼굴이 겹쳐졌다.
기유에게 다가가 팔을 뻗어 벽을 짚었다. 얼결에 나와 벽 사이에 갇힌 귀신은 눈을 찌푸렸으나 눈길을 피하지는 않았다. 지극히 충동적으로 고개를 떨구고, 나는 그에게 미안하다고 말한 다음 눈두덩이에 입술을 댔다. 느껴지는 살갗은 없어도 기유의 한숨은 똑똑히 들었다.
다들 날 미친 여자로 볼 테지. 요귀에게 홀려 정신 나간 년이라고 손가락질하겠지.
입을 맞추고 두 걸음 물러났다. 어쩌면 기유도 나를 미친 사람 취급하겠지만 입 맞추기 전부터 제정신이었다. 방은 침묵에 잠겼고, 나는 귀신의 눈치를 살폈다.
이럴 땐 그가 귀신이라 아쉬웠다. 화가 났는지, 어이가 없는지, 날 패대기 치고 싶은지, 도무지 속을 파헤칠 수 없는 무표정인지라. 그래도 당장 요귀로 돌변해 나를 뜯어 먹을 것 같진 않아서 안심하고 우스갯소리로 물었다.
“내가 입 맞춰도 아무런 느낌이 없어?”
기유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는 날 빤히 바라보았다. 마찬가지로 잡힐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내 팔을 붙들어서 단단히 화가 난 줄로만 알았다. 겹쳐진 살갗이 흐르는 달빛 한 줄기와 섞여 유독 창백했다.
“있을 리가.”
비틀린 입술에 냉소와 경멸이 읽혔다. 나는 따끔한 왼 가슴을 짚었다. 입을 맞추었을 때 동요했느냐고 묻는 것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지 스스로가 제일 잘 알았다.
그는 오로지 천도를 바라고 내 곁에 머무는 귀신인 것을. 반은 농담으로 건넨 말에 온전한 진심으로 대꾸하는 요귀에게 상처받는 나도 참 골 때리는 종자였다.
“기유야.”
“……내게 감정이 남아 있기를 바라는 게 이상하지 않아?”
속삭이듯 낮은 목소리. 그의 무표정 위로 떠오른 우릿한 슬픔을 읽고 말았다. 숨이 멎는 줄 알았다.
“없어, 이제.”
“…….”
“네가 기대하는 감정이 남아 있지 않다고.”
기유가 살얼음 같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슬픔을 잇따른 허망이 모래알처럼 쌓인 얼굴에 나는 다시 손을 가져다 대었다.
“괜한 소릴 하여 미안해.”
괜한 욕심을 부렸다.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욕심껏 뱉다가 지금도 충분히 괴로워하는 이에게 슬픔까지 거저 얹어 버렸다. 사연을 모르니 무엇에 분노하고 무엇에 서러워하는지 모르겠지만 그가 슬퍼하니 나도 덩달아 애달파졌다.
“걱정 마. 널 반드시 천도시켜 줄 테니.”
“…….”
“도와줄게. 내가 널 도울 수 있어.”
“네가 그렇게 애를 쓰는 까닭은 무녀의 사명 때문인가? 차라리 나를 봉하는 쪽이 일 처리가 더 빠를 텐데.”
“물론 빠르기야 하겠지만…… 글쎄. 스승님께 들은 이야기가 있어. 전쟁터로 타 죽은 사람들, 타지에서 고독하게 죽은 이들, 죄 없는 아이들이 한 맺혀 요귀가 되는 거라고. 그 뒤로는 찢고 태워 죽이는 봉마술이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어쩌면 너처럼 누군가 꺼내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영혼도 있겠고.”
귀신은 숨 쉬는 시늉도 하지 않는 것인지, 바닥에 뿌리 내린 기유는 머리칼을 훑는 바람도 느끼지 못한 것처럼 미동이 없었다.
“그리고 내가 이리 애를 쓰는 이유는. 그래, 네 말대로 사명감 때문이겠지. 사명감이어야 해.”
사명 운운하는 내게 다행히 기유는 입맞춤에 대한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스치듯 짧은 접촉이었으니 나만 한 감흥이 없을 수도, 아니면 없던 일처럼 잊어버렸을 수도 있겠다.
“……너, 이름이 뭐야?”
돌연 그가 물었다. 인상을 찌푸려도 사내는 아름다웠고, 밤을 누비는 푸른 별이 오로지 나만을 비추는 듯했다.
잿더미에 파묻힌 심장이 폴싹이며 뛴다. 죽어 휘발된 불새가 기지개를 켜듯이, 눈부신 붉은 빛을 두르고, 새로이 수혈한 붉은 피가 온몸을 휘감는다.
고스란한 설렘은 홍운영의 감정이기도 하였으나 지금껏 그랬듯 나의 몫이기도 하여서. 자연스레 이 몸 주인의 이름을 대려는데 입술이 닫혔다.
“홍…….”
홍운영, 이라고 내뱉기를 거부하는 것처럼 잇새가 옹다물렸다. 이 여자가 날 몸속에 집어넣고 무얼 하던 이만한 거부감을 느낀 적이 없었는데.
“사혜. 홍사혜.”
떨림을 담은 목소리가 입술을 떠나 느릿느릿 기어 나왔다. 나의 반발을 가만두고 볼 홍운영이 아니었다. 날카로운 손톱이 손바닥을 콱 찍어 누르며 선연한 고통을 주었다.
“너, 미쳤니? 지금 누구 이름을 대는 거야.”
머릿속에 호통이 울리고, 찢긴 살가죽은 기어코 피를 보았다. 그러나 내뱉는 목소리는 더욱 커지고 단단해졌다.
“홍사혜.”
“사혜.”
속삭이는 목소리가 별의 꼬리처럼 아스라한 궤적을 남겼다. 그는 내 이름을 찬찬히 곱씹으며 눈을 감았다.
만추의 새벽. 여명은 기유와 나의 눈동자를 반씩 섞은 빛깔로 하늘을 물들였고, 지평선 위로 붉은 나비가 빛을 뿌리며 날아다녔다. 그 아름다운 풍광에 녹아든 사내가 내게 희미한 웃음을 되돌려 주었을 때에. 기어코 욕망에 지고 말았다.
나는 참지 못하고 발끝을 치들었다. 그의 팔등을 잡는 순간 착각처럼 손안에 쥐어지는 감촉이 있었다. 나는 그에게 입을 맞추었고, 그는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벌렸다. 허망한 시도임을 알기에 얼마 못 가 엇나간 장판처럼 떨어져 나갔지만 그래도 좋았다. 닿지 못해도 상관없어.
나는 좋아 웃었는데, 그런 날 안은 기유는 어느 때보다 슬퍼 보여서 이 기쁨 또한 오래가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