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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53/86)

53화

그 밤에 첫 합방을 하였는데, 꽤 만족스러웠던 모양인지 이후로 그는 밤마다 홍운영을 눕히고 박을 탔다. 무늬만 부부가 참 부부가 되었다.

하나 나는 전혀 기쁘지 않고 거북스럽기 짝이 없었다.

“술은?”

그 이유는 원체 서름한 사이이기도 했고, 또 이 홍운영의 남편이란 작자가 술만 들이켜면 개가 되었기 때문이다.

“천박한 무녀 계집아, 너도 내가 이 빠진 승냥이라고 무시하느냐?”

관등 끄트머리에 발이나 걸쳤던 사람이 대단히 잘나가던 백관마냥 객기를 부리고 주정을 하는데, 갈수록 광기가 비쳤다.

죄 없는 아내에게 엄한 화풀이를 하며 사발을 던졌다. 손찌검은 없었으나 아내를 발가벗기고 눕혀서 밤새 괴롭혔다. 접문하면 푹 삭은 문뱃내가 진동하고, 흐무러진 눈에는 초점이 없었으며, 거친 손아귀가 파롱하듯 막무가내로 살을 주물렀다.

“어머니, 저 집 가기 싫어요.”

“왜.”

“그 사내를 보고 싶지 않아요.”

나는, 홍운영은, 출가외인이 된 지 1년도 안 되어 자주 친정을 드나들었다.

“네 지아비잖니. 하늘처럼 모셔라. 어디 부족함 없이 살던 양반께서 입에 풀칠하는 생활이 성에 차시겠느냐. 우리가 부단히 맞춰 드려야지. 네가 노력하는 수밖에 더 있니.”

“어머닌 그게 문제예요.”

“무어?”

“제게서 문제를 찾고 이유를 찾고. 그러면서 제가 왜 이러는지 묻지는 않으시고.”

울컥 슬픔이 북받쳤다. 부엌께로 달려 나가던 나는 문득 뱃속이 울렁거려 급히 입을 막고 주저앉았다. 진진하게 풍기는 음식 냄새도 헛구역질이 날 만큼 마음이 상한 모양이었다.

“욱, 우윽…….”

먹은 것이 없어 위액만 잔뜩 게워 냈더니 서러움은 배가되었다. ‘얘, 운영아. 너 괜찮니!’ 부르는 어미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남편 사는 집까지 비척이며 걸어갔다.

사내는 술이 깨자 도로 점잖게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다. 우리는 의연히 앉아 석반 상을 나눠 먹었다. 한마디 정담도, 다정한 시선도 없는 삭막한 공간. 눈 감고 귀 막으면 견딜 수 있었다.

다들 이렇게 사나 보다, 나만 불운한 게 아닐 테지. 저것 보아, 술만 안 주면 멀쩡한 사내이지 않나.

죽기보다 더한 삶이 이런 게 아닐까 싶었지마는, 그리 자위하면서 홍운영은 꾹꾹 눌러 참았다. 식체라도 온 것처럼 속이 더부룩한 게 임신 때문인지, 외로움과 설움 때문인지 알 수 없으나 무어가 되었든 절망스러웠다.

시운왕 치세 22년, 그 해에 대요귀라는 놈이 처음 나타났다. 혼란이 정점을 찍던 어지러운 시기였다. 어딜 가던 가축보다 더 흔한 것이 요귀였다.

홍운영도 대요귀를 봉하기 위해 투입된 서른의 무녀 중 하나였다. 바닥을 적신 피와 뜯겨 나간 살점은 요귀의 것인지 사람의 것인지 모호했다. 아귀수라장인 전쟁터에서 나는 곡도로 춤을 추듯 요귀를 베어 냈다.

이 여자의 몸으로 검을 휘두를 때마다 느낀다. 노력도 한몫했겠으나 분명 홍운영은 호접신의 사랑을 받는 무녀였다. 검이 선택하고 바람이 복종하는 이다. 그러하니 스승께서도 타고나길 특별한 아이라고 말하셨겠지.

스승을 비롯한 서른의 무녀가 마침내 대요귀를 무릎 꿇렸다. 인의 실에 휘감긴 거대한 괴물은 검푸른 몸통에 새하얀 사슴뿔을 갖고 있었다. 몸은 물고기 비늘인데 머리와 꼬리는 교룡의 그것이다.

나는 요귀의 새하얀 동공에서 이질적인 무언가를 목도하였고, 몸부림치는 요귀에게 홀린 듯 다가가 물었다.

“네 몸속에 울고 있는 수많은 넋이 보인다.”

―…….

“너는 누구이길래 인간의 몸으로 괴물을 받아들여 원치 않은 살육을 반복하나.”

그 순간 괴물의 백색 동공에 새파란 빛 한줄기가 들어찼다. 동시에 나와 홍운영은 그 속에 깃든 무섭도록 아름다운 사내의 혼을 보았다. 꺼내 달라고 애원하는, 혹은 죽여 달라며 울부짖는 애절한 혼백을.

―나의 형제 금양군이 나를 죽였소.

괴물이 음울히 속삭였다. 이에 반응한 호접신이 내 목을 빌려 이렇게 말했다.

「가엾고 가엾다. 역사가 묻은 악습에 희생당해 생을 돌고 돌며 원망을 키웠구나. 공양에 희생당한 아이들의 넋이 네 안에 서려 있다.」

놀란 나는 뒤돌아 스승님께 달려갔다.

“저 괴물과 대화를 해 볼 수 있을 듯합니다. 왕께 기회를 주십사 청해 주십시오, 스승님.”

스승은 홍운영을 아꼈다. 봉마에 들어가는 신력의 양이 방대할뿐더러, 이 이상의 희생 없이 요귀를 봉할 수 있다면 그리 해 보자며 괴물을 내게 넘겨주었다.

제 처지를 실토하고 얌전해진 요귀를 끌고 천신당으로 돌아왔다.

그것이 기유와의 첫 만남이었다.

왕성이 대파되고 마을에 시체 썩는 냄새가 어지럽게 진동했다. 시신을 뒤적이는 관원에게 가 물었더니 어미와 남편은 난리 통 속에 이미 죽었더란다.

집도 가족도 잃었다. 교류 없던 친인척은 찾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량 넓은 스승님께 거두어져, 나는 전쟁 이후 천신당 뒷방에서 홀로 살게 되었다. 으스스한 부유령이 늘 함께했으니 엄히 따지자면 혼자는 아니지만.

“네 기운은 참 신기해. 요귀인데 전생에 사람이어서 그러한가 사람의 기운도 조금 섞였고, 그보다 더 정갈한 기도 품고 있어. 요귀가 정갈한 기운이라니, 우습다.”

내 예상대로 괴물 안에 든 사내는 구왕조 시대에 죽은 호원군 기유였다. 역사 공부를 성실히 하지 않았으면 그의 형제인 금양군이 누구인지도 몰랐을 터다.

조밀한 결계를 두른 천신당에서 그는 요귀로 지낼 수 없었다. 그는 백색 동공에서 스치듯 보았던 미목수려한 사내의 모습을 하고 툇마루에 앉아 있었다.

“신기해.”

긴 눈꼬리와 고매하게 다물린 입, 목련처럼 맑은 피부. 코를 묻으면 정말 목련향이 날 듯 했다.

사내다운 용모인데 어여쁘다. 특히 청조 꼬리처럼 우아한 눈매에 깃든 푸른 눈동자가 하 오묘하다. 살육을 저지른 요귀의 눈이 저리 티끌 없이 청백할 수 있나. 뜯어볼수록 새롭고 놀랍다.

나는 그의 뺨을 쓸어 보고 싶은 충동을 누르고 대신 그의 옷깃을 당겨 보았다. 역시 혼백인지라 쑤욱, 허망히 빠져나간다. 그와 나는 맞닿을 수 없다. 그도 그걸 알고 이상한 눈초리로 나를 보았다.

“천도시켜 주겠다고 했지.”

체념과 약간의 조소가 묻은 사내의 목소리는 음전하였다. 엉겁결에 날 따라 인간들 틈바구니에 낀 제 처지가 낯설고 거북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나 그리 보이는 것마저 나의 상상일 뿐.

‘요귀라 그러한가. 감정도 없는 듯하고 쌀쌀맞네.’

대가리 반쪽이 부서지고 목이 덜렁거리는 놈들은 봤어도 이리 꽃 같은 귀신은 처음 본다. 생기 없는 조화처럼 무미하고 또 무감한 사내의 곁에 가 앉으며 물었다.

“그럼. 한데 인간일 때 기억은 조금도 없니?”

“글쎄.”

기유는 인상을 쓰더니 얼른 자신을 천도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천도에는 몇 가지 조건이 있는데, 49재의 마지막 날 천도재를 올릴 거야. 너는 몇백 년도 전에 죽었지만 제대로 된 장례도 못 치렀으니 그것 먼저 하자.”

“조건은 그게 끝인가?”

“우선은 그렇게만 알아 두렴.”

보이지 않은 끈을 맞잡고 선 듯한 기묘한 동거였다. 밥을 먹을 때도, 수련을 할 때도, 제를 올릴 때도, 잠시 요 앞을 산보할 때도 기유는 내게서 다섯 보 이상 떨어지는 법이 없다.

“이렇게 따라다닌들 당장 널 천도시킬 수 없어. 마흔아홉 밤을 기다려야 한다고.”

“알아.”

“하면 왜.”

왜 자꾸 신경 쓰이게 따라다니느냐고 따져 묻기도 전에 기유가 천신당의 현판을 턱짓했다.

“네가 날 이곳으로 데려와서가 아닐까 싶은데.”

내 곁에서 멀어질 수 없단다. 나와 떨어지면 도로 요귀가 되어 누더기 된 왕토를 짓밟을 위험이 있다고. 섬뜩한 언사와 달리 몹시도 차분한 얼굴이었다.

“그래, 그럼…….”

잘나도 귀신이었다. 처음엔 졸졸 따라다니는 게 으스스하고 불편했으나 스무 날쯤 되니 적응이 되었다.

나만이 보고, 대화할 수 있으며 내 말만을 따르는 사내. 원하든 원치 않든 늘 곁자리를 맴돌고, 밤낮으로 항상 내게 귀 기울이고 나만을 보아 주는 사내라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왜.”

우뚝 멈춰 선 내게 기유가 다가왔다.

“기유야.”

내가 이름을 부르면 그는 싫어했다. 그 이름에 담긴 기억이 싫단다.

“어차피 천도하려면 새 이름을 얻어야 하는데. 내가 지어 줄까?”

“내키는 대로 해.”

“하면 천도 때 구름까지 닿으라고, 운이라 하자.”

그러든지 말든지 하는 싱거운 반응에도 기분이 들떴다.

홍운영은 자꾸 기유를 돌아보고 싶어 했다. 그녀의 마음이 쏠리는 방향으로 나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먼저 말 거는 횟수가 늘고, 어쩌다 시선이 부닥치면 더 오래 붙들고 싶어졌다.

날이 갈수록 귀신에게 정 붙이는 꼴이라니. 정상이 아니구나. 홍운영의 처지가 궁상맞은 한편, 죽은 사람에게 기대고 싶을 정도로 사무치게 외로운 그 마음이 안타깝기도 했다.

외로운 이들은 서로를 알아본다고 하였나. 처음엔 어색해서, 심심해서, 외로워서, 저 귀신의 낯짝이 보기 드물게 잘나서. 홍운영은 온갖 이유를 갖다 붙이면서 내게 변명했다. 한데 나는 또 그런 홍운영이 이해가 되었으니 도긴개긴이었다.

잠에서 깨면 고요히 앉아 있는 기유가 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로 나를 가만히 보는데, 밤새 저러고 지켜보나 싶은 생각이 들면서 저 푸르고 명료한 시선에 가슴이 꿰이는 것이다. 속이 답답하게 울렁였다.

마흔아홉 밤의 절반이 기울었을 때 기유에게 다가가 말했다.

“확실히 천도를 하려면 한 가지 방법이 더 있긴 한데.”

“무엇인데.”

“관혼을 치르는 거야. 한생을 못 살다 간 원혼들에게 먼저 그것을 해 주거든. 아, 너는 왕실 사람이었으니 관례는 일찍이 치렀겠다. 하면 혼인이 남겠고. 나랑 하자, 기유야.”

“…….”

“네가 명부에 오른 나이가 열일곱이라 하였지. 하면 내가 누이겠구나. 귀신과 결혼을 한다니. 이런 경험은 일생 다시 없을 테지만…… 여하하든 명혼식을 올리면 천도가 쉬워진다.”

나는 스승의 가르침을 또박또박 읊었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성혼식. 언뜻 기괴하였으나 효과는 틀림없다더라.

“안 믿겨?”

“…….”

“도와줄게. 내가 널 도울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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