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화악!
피처럼 붉은 잔상이 안개처럼 밀려들었다. 이만한 힘이 남아 있질 않으니 내가 부린 술수일 리가 없다. 느닷없이 나타난 나비 영물을 한 움큼 먹어 치운 요귀는 독이라도 삼킨 것처럼 괴성을 지르며 소멸되었고, 남은 것은 흙먼지를 따라 흩날리는 스산한 붉은 머리카락이었다.
홍운영이 웃는 듯 마는 듯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신…….”
내가 죽기를 바라는 주제에 왜 살린 것이지. 흠 하나 없이 몸을 빼앗고 싶단 걸까.
“왜 내 몸에 그리 집착하는 것이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당신이 무어길래.”
물으니, 망령이 웃으며 속삭였다.
“아직도 모르겠어? 나는 너야. 서로가 이보다 더 닮을 수 있을까?”
여자가 몸을 수그리고 내 귓가에 입술을 붙였다.
“처음부터 우리는 하나였는데.”
……허튼소리. 반박하고자 입술을 달싹였으나 생각을 잇기 전에 시야가 잿빛으로 가무러졌다. 감기는 눈꺼풀 틈새로 여자의 올라간 입꼬리가 보였다. 그 다정한 웃음에 오한이 일었다.
걱정할 텐데. 이리 길바닥에 맥없이 쓰러져 있는 걸 기운혁이 알면, 또 아픈데 말도 안 했다면서 화를 내고 슬퍼할 텐데.
홍운영이 내게 천천히 팔을 뻗었다.
정말, 저 여자는 날 두고 뭘 어찌하고 싶은 걸까.
* * *
몸이 흠씬 두들겨 맞은 것처럼 뻑적지근했다. 산의 정상에 떨어졌나 싶을 정도로 사방천지에 안개가 가득해 눈 닿는 곳마다 경계가 뿌옇다.
대체 여기는 어디일까.
의문이 떠오르기 무섭게 누군가가 내 등짝을 철썩 때렸다.
“얘, 운영아!”
통증도 생생하고 이성도 뚜렷하다. 한데 몸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아 답답했다.
“기쁜 혼삿날에 왜 그리 울상이니. 나라님께서 양반이랑 혼인시켜 준다는데 이보다 더 큰 경사가 어디 있다고. 우리 같은 상것 팔자에, 응? 운영아.”
운영? 대체 무슨 소릴 하느냐고, 사람 잘못 보았다고 항의하려던 순간이었다.
“기분이 좋을 리가요, 어머니. 거 생각을 좀 해 보소. 우리네 같은 액받이 무녀들 신병 옮는답시고 이상한 사내들이랑 짝지어 주는데 그럼, 기뻐해야 하나?”
제멋대로 말이 튀어 나갔다. 놀라 입을 틀어막으려고 했으나 매끄럽게 움직이는 혀는 의지를 따르지 않았다. 심지어 목소리도 똑 닮은 게, 내 머리 한 군데가 어디 망가진 것이 아닌가 싶었다.
“무려 신랑될 이가 양반이잖아, 양반.”
“그럼 무엇하나, 조정에서 내쫓기고 가문은 풍비박산 난 떨거지 사내인 것을. 어머니, 나 시집가기 싫소.”
“얘 좀 보아. 싹수없는 소리 말고 활옷 챙기고 가락지도 껴라. 떨잠이랑 첩지……. 이거 보아라 운영아, 종류별로 있지 않니. 용잠, 매국잠, 호도잠. 이런 건 아무나 받니? 다 나라님께서 널 생각해 주어 하사하신 게지.”
처음엔 환몽을 꾸는 줄 알았다. 기절하기 직전 형제 두 놈에게 붙은 요귀와 사투하다가 잡스런 술수에 당했거나, 최악의 경우 죽은 줄로 알았는데.
한데 그러자면 들리는 것, 보이는 것, 손바닥 아래로 느껴지는 것이 이리 생생할 리 없다.
면경 속 소녀는 열아홉쯤 먹은 앳된 인상이었다. 붉은 머리카락이며 앵두알 같은 눈동자며. 세밀한 이목구비가 달랐으나 가까이 들여다보니 나와 놀랍도록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다.
“운영아. 그러지 말고…… 어미 생각해서 웃어 주렴, 응? 이제 가면 언제 다시 볼지 모르잖니.”
“차암 나…….”
“망한 양반 댁 자제와 혼인한다지만 그게 무어 대수니? 친정이 건실하고 뒤엔 나라님이 계시는데. 너는 내조만 잘하면 된다. 하면 낭군께서도 살뜰히 보듬어 주실 게야.”
왕의 하사품은 비취와 진주, 산호 장신구를 넣은 작은 함이었다. 그 안에 든 왕명서에 수결이 찍혔는데 시운왕이더라.
말도 안 된다. 100여 년 전쯤에 밀국을 통치했던 왕임을 실록으로 배운바, 상황이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뒤늦게 깨우쳤다.
하나 내 몸은 여전히 제멋대로 구두덜대고 팔짱을 낀다. 몸 안에 든 것은 홍사혜인데 홍운영의 감정과 생각이 속속들이 밀려든다. 의지 없는 혼사에 대한 반발, 얼굴도 모르는 지아비에 대한 경계, 눈앞의 여인을 향한 애정 따위가…….
‘아직도 모르겠어? 나는 너야. 서로가 이보다 더 닮을 수 있을까?’
‘처음부터 우리는 하나였는데.’
‘웃기는 짓을.’
나는 바드득 이만 갈았다. 기절하기 직전에 그 여자가 더러운 꼼수를 쓴 게 분명한데, 암만 답답하고 억울해도 표출할 길이 없어 분이 났다.
“그래도 나라님께서 시집보내 주신다길래 기대했더니만.”
“운영아, 전하께서 우리 무속인들의 처우를 좋게 좋게 해 주려고 애쓰시는 것은 알지?”
“난 잘 모르겠소, 어머니.”
무녀들이 천대받던 시대. 홍운영의 몸으로 익힌 지식과 경험이 그리 일러 주고 있었다.
이 질 나쁜 여자가 나보고 제 삶을 한번 살아 보라 한다. 어처구니가 빠졌으나 갑갑한 몸에 갇혀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얌전히 따르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홍운영이 되어 웬 사내와 혼사를 치렀다. 나이 차이가 제법 났다. 서른쯤 되어 보이는 사내는 점잖았고 용모도 그럭저럭 단정했다.
사내는 처음에 액받이 무녀와 말 섞고 몸 섞기도 꺼려 했으나, 버려진 처지에 아내라도 얻은 게 어디냐는 심정으로 이따금 말을 걸었다. 나도 평생 얼굴 맞대고 살 남편이니 억지로나마 정을 줘야겠다 마음을 고쳐먹고 서툴게 응수하였다. 물론 ‘내’가 아닌 홍운영의 의지였다.
그렇게 얼결에 시작된 꿈속의 혼인 생활은 고되었다. 천성 양반이신 남편은 몸을 움직이길 싫어했고, 점잖은 걸 넘어서 벙어리인가 의심될 만치 말이 없었으며, 아내를 딱히 눈여겨보지도 않았다.
방바닥 쓰는 시늉을 하면 엉덩이만 슬쩍 비끼고, 밥상머리 내올 때까지 눈만 꿈뻑꿈뻑. 그런 주제에 또 아내라고 잠자리는 하고 싶어 하는 티를 낸다.
내 유일한 낙은 왕궁 귀퉁이에 붙어 있는 초라한 천신당에서 가르침을 받는 것이었다.
“운영아.”
“예, 스승님.”
스승은 한 명, 나처럼 신을 받잡는 무녀들이 서른쯤. 그 비좁은 무리에서 느낀 대단한 해방감이 내게도 전해졌다.
“어찌, 검무 연습은 잘 되어 가던?”
“안 그래도 스승님께 보여 주고픈 기교가 있는데. 한번 보아 주시렵니까?”
“검무의 목적은 화려함이 아니라니까 글쎄…….”
타박하면서도 스승의 입가엔 인자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겉멋 부리듯 난잡한 것 같으면서도 정밀하고 오차 없는 홍운영의 검무를 알아주는 눈빛이었다.
“그나저나 이 땅에 점점 요귀의 수가 늘어나는구나.”
“도성과 가까운 아랫마을에도 뿔소를 닮은 요귀가 튀어나와 영지를 다져 놨다지요. 시찰 나갔을 때는 분명 요기를 느끼지 못하였는데. 다 제 불찰입니다.”
“아니, 너는 충분히 뛰어나다, 운영아.”
스승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한데요, 스승님. 원래는 요귀보다 신이 더 많았다는데 참말입니까?”
“처음에는 그랬지. 이 땅에 업이 쌓여 갈수록 요귀의 수가 늘어, 더는 신께서 감당하지 못하자 자신들의 자질을 떼어 인간에게 주었단다. 그 선택받은 이들이 바로 무녀고.”
“결국 요귀의 발원은 인간의 욕심이니 저희들끼리 해결 보라는 소리군요.”
“운영아, 너는 좀 더 특별한 아이다.”
“저는 비루먹은 평민일 뿐인데요.”
“귀천을 가리는 신은 없지.”
“왜 없습니까? 입에 풀칠하고 살 운명도 결국엔 다 신이 점지해 주신 것일 텐데. 누구는 규방의 여인이고, 누구는 용상의 주인이시고, 누구는 재수 옴 붙는다며 핍박받다가 높으신 분 아량으로 겨우 사람 대접 받고 살고요. 이 천신당 말이오, 스승님. 고작 20년 전에 어영부영 급조된 기관이라지요? 요귀가 출몰한 뒤로 말이지요.”
“운영아, 너는 입 함부로 열면 안 되겠다.”
“제가 그 정도 사리 분별도 못 할까 봐요. 스승님 앞이라서 답답한 마음에 해 본 소리이지요. 왜 무속인들을 천하다고 차별하고 구별 짓는지 나는 모르겠습니다. 무녀들이 다 신병에 걸리는 것도 아니고, 하물며 옮는 병도 아닌데 나병 환자마냥…….”
나는 한숨을 보태며 중얼거렸다.
“그래, 운영이 너. 혼인했다 하였지. 지아비가 잘 대해 주던?”
“그 사람도 뭐…… 재미도 없는 이런 얘긴 그만합시다, 스승님.”
홍운영이 밝은 목소리를 내고 싶어 하길래 나도 그렇게 했다. 스승을 깊이 신뢰하고 의지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나는 그 뒤로도 홍운영이 원하는 대로 웃고, 말하고, 투정을 부렸다. 팔자에도 없는 꼭두각시 노릇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으나, 일단은 이 기상천외한 상황을 따라가 보기로 하였다.
따라가면 끝에 무언가 있겠지. 괜히 홍운영이 날 제 몸에 욱여넣었겠는가. 두어 마디 말로 일축하기 힘든 전하고픈 상황이 분명 있는 게다.
자유로운 시간은 금세 동이 났다. 집으로 돌아가는 발길이 무거웠다. 투박한 남편이 기다리고 있는 안방에 들 때에는 바윗덩이라도 매달은 마냥 어깨가 꺼졌다.
저 남편 노릇 하는 작자는 제 상황에 체념한 것인지 주위 돌아볼 여력이 생긴 것인지 요즘 들어 허구한 날 날 뚫어져라 보았다.
푹 꺼진 시선이 오싹하였다. 나도 싫고, 이 몸뚱어리의 주인인 홍운영도 남편을 어려워했다. 그러나 이미 맞절까지 한 사이.
“자네.”
부부라지만 통하는 이야깃거리도 없고, 살아온 배경도 다르고, 나이 차도 있어 줄곧 평행선을 달려온 남이 아닌가. 대뜸 나를 부르는 남편의 손에는 혼삿날에도 마시지 않던 합환주가 들려 있었다. 뜨뜻이 데운 구들장에는 이부자리가 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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