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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50/86)

50화

사내는 입을 틀어막힌 채로도 느긋하게 안쪽에서 혀를 휘돌리는데, 나는 받아먹기 급급해 숨을 잴 시기를 헤매고 있었다. 필요 이상으로 오래 치덕대는 것이 수상하다.

이대로 입을 막고 질식시키려는 게 아닐까 싶어질 무렵 그가 손등으로 제 입가를 훔치며 고개를 들었다. 달뜬 시선은 늘어져 붙은 타액에 지긋이 꽂혀 있었다. 그 눈빛에 입술이며 귓가가 화끈거렸다.

“……이제 괜찮아요.”

“이것도 대요귀인지 뭔지와 맞먹기 위한 수련인가.”

“예, 안 그래도 끔찍스럽기 그지없는데 오늘을 계기로 한동안 저 약병은 쳐다도 못 볼 것이 되어 버렸네요.”

“내가 도와줄까?”

“도와주신다 함은.”

“지금처럼 네가 정신을 놓으면 독을 빨아 주고, 환시를 이겨 낼 때까지 반복해서 같은 짓을 하다 보면 분명 언젠가…….”

“아니, 아니. 잠시만, 도령.”

“왜.”

제 입으로 실토했듯이 목적이 뚜렷한 원조였다. 한데 내 머릿속은 이상한 상상의 먹을 덮어쓰고 시커멓게 구겨지는 중이었다.

“도움 주시는 건 감사하나 제가 집중을 못 할 듯하여서요.”

봉마에 사활을 걸어도 모자랄 판국에 수려한 사내와 환몽을 핑계로 입술만 쪽쪽 빨다간 정신이 남아나지 않으리라는 불길한 예감이었다.

기운혁은 내 머리통에서 피어나는 몹쓸 공상을 떠보듯 시선을 맞추고 속이 새까만 미소를 흘렸다. 붓꼬리처럼 휘어진 눈매가 10년 잡순 여우처럼 잘빠졌다.

“하면 어쩔 수 없지.”

“예…… 그렇지요.”

“실망한 얼굴이네.”

“아뇨?”

느닷없이 표정에 생각이 드러난다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불순한 웃음을 피해 무릎을 짚고 일어나 자리를 뜨려던 순간이었다.

“다쳤어?”

달음박질치려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돌연 인상을 찌푸린 그가 채신없이 떠는 나의 왼 다리를 붙잡고 살핀 까닭이다. 무녀원에서 망가졌다 붙은 그 가련한 다리였다.

설명을 요구하는 눈이 발목에 붙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요귀와 맞서다가 다친 상처입니다. 오래전 일이라 문제없어요. 다만 가끔씩 이렇게…….”

“발도 제대로 딛지 못하는 데 문제가 없어?”

무녀원의 치유사들은 보통내기가 아니라 깨끗이 도려내진 살점만 아니면 시간을 들여서라도 복구를 해 놓는다. 해서 나의 다리도 평시엔 문제가 없어 뵈나 날이 무척 궂을 때나 몸 상태가 지나치게 안 좋으면 꼭 사달을 부렸다.

왜 이제야 이런 중한 사실을 말하냐는 듯, 그의 표정이 엄해졌다.

“몸 상태가 나쁘면 통증이 올 뿐 조금 쉬다 일어나면 괜찮습니다. 지금 같은 상황은 외려 양반이지요.”

나는 되레 달래는 심정으로 운혁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 미소를 지었다. 그는 비실거리는 노루 새끼처럼 후들거리는 다리를 달고서 태연히 걸어가는 나를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러나 병든 다리는 지금 논할 거리가 못 되었다.

나는 침실로 돌아와 이마를 짚었다. 괜찮다는 걸 부득불 업어 데려다준 기운혁은 걱정 때문인지 문밖에 잠시 서 있다가 돌아갔다. 문풍지에 비치는 그림자를 보면서 버릇처럼 손톱을 눌렀다.

‘나가, 이 몸에서 당장 나가. 내게 돌려줘…….’

‘처음부터 너는 껍데기였으니.’

조상신을 욕보이고 싶진 않았으나 미친 여자가 틀림없다. 죽어 후대에게 오물을 끼얹는 것으로 모자랐나. 껍데기? 아주 웃기는 소리를 하고 자빠졌어.

버젓이 스무 해 넘는 인생을 홍사혜로 살아왔는데, 아무리 망령의 헛소리는 들어 줄 껀덕지가 못 된다지만 그 상대가 홍운영이라니 기가 차고 얼이 나갈 따름이다.

도대체 언제까지 눌어붙어 괴롭힐 셈인가. 일그러진 낯짝이 이상하리만치 나와 똑 닮아서 더 소름이 끼쳤다.

‘한데 왜 그런 소릴 한 걸까.’

영혼이 구천을 떠도는 이유는 명확하게 짚기 어렵다. 그러나 수만 가지 이유에서 공통점을 찾자면 좋은 축으로든 나쁜 축으로든 ‘이승에 대한 미련’이었다. 한이 맺히거나, 제 명대로 못 살았거나, 누군가를 지독히 그리워하거나 원망하거나.

망령의 목소리가 가치 없는 까닭은 그들이 죽기 직전의 감정만 응축된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이성과 합리는 물거품으로 떠내려간 지 오래고, 원통한 감정의 배만 채우려 들기에 듣는 이가 괴로워하거나 짐짝처럼 여겨도 아랑곳하지 않아서 문제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요귀를 봉하다 죽었다 하였지.’

하면 제 명대로 못살긴 했겠구나. 버둥거리는 요귀가 가여워 천치처럼 풀어 준 주제에 누굴 탓하나.

이승에 남은 미련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나 업이라고 생각했다. 그 여자는 내가 죽어 나갈 때마다 나타났다. 껍데기라고 비아냥대며 몸을 내놓으라고 윽박지르던 것도 내가 죽기만을 바라서겠지.

“하, 참.”

왜 하필 내게 붙어 난리인지 모르겠다. 이제나저제나 내가 죽기만을 바라는 인간들 천지. 이제는 한낱 귀신마저 만만히 볼 지경에 이르렀구나.

어디 뜻대로 해 줄까 보냐. 내가 시체로 구르는 곳은 요귀와의 격전지이지, 노망난 조상의 헛소리에 못 이겨 병사하지는 않을 것이다. 망령은 살아 있는 자의 결심을 이길 수 없다는 운혁의 조언은 참이니, 심신을 바르게 펴고 의지를 닦으면 무찌를 수 있을 것이다.

조상신이고 악귀고 나발이고 반드시 무찔러야 할 짐덩이였다. 비루먹은 몸뚱이지만 누군가에게 미련 없이 줘 버릴 만큼 귀중중한 것은 아닌지라.

“사혜.”

사라진 줄 알았던 운혁이 정숙하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물을 데웠어.”

그제야 땀에 전 처지를 깨달았다. 욕탕까지 혼자 가겠다는 아우성은 혀 아래로 쏙 말렸다. 운혁은 스스럼없이 내 둔부를 팔로 받치고 높다랗게 안아 든 채 방을 벗어났다.

목간으로 향하는 와중에 옷고름이 그의 콧대 위로 거추장스럽게 얹혔는데 그는 되려 옷 벗는 수고로움을 줄여 주겠다는 듯이 잇새로 능숙하게 천을 물어 잡아당겼다.

“앞으로 내가 주는 약초를 탕에 넣고 매일 목욕을 하도록 해.”

“약초를 써도 소용없을 겁니다. 지금껏 좋다는 명약은 다 가져다 써 보았지만 요귀에게 당하고 살아남은 상흔은 완치도 힘들더랍니다.”

“제대로 된 약을 쓰질 못해서 그런 것 아니겠어?”

“그럼 도령이 준비한 것은 잘 들어먹는 약초입니까?”

“약효를 보기까지 달포 정도. 일부러 독한 것을 풀었는데, 네 체질과 맞으면 더 이르게 치료되겠지.”

그는 나를 향나무 내음이 은은한 욕탕 위에 물 주전자처럼 얹어놓았다. 뜨끈한 물 위로 자줏빛이 도는 거대한 이파리가 연잎처럼 동실 떠다니고 있었다. 수삼을 우린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기운혁은 소매 걷은 팔을 물속에 집어넣고 탕의 온도를 가늠했다.

“뜨거워?”

“적당해요.”

“그럼 들어와.”

“나가셔야 옷을 벗지요.”

나머진 시중 없이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으니 더 있으실 필요 없다는 뜻인데. 못 알아먹은 건지, 알고도 무심한 것인지 그는 알맞은 온도를 찾고서도 자리에 눌어붙어 가지 않을 기세였다.

“몸 불편하잖아.”

“다리 조금 저는 것 갖고 거동도 힘든 노인네 취급을 하십니다.”

나는 항의하듯 내 발로 일어나 욕탕을 짚었다. 몇 번이고 겪은 일이라고, 하면 그때마다 귀찮게 손을 빌렸겠느냐며 손사래를 치려다가 멈칫했다.

꼭 지금 같은 일을 겪은 적이 있다. 무녀원에 어디 나처럼 수족이 곤죽 난 이들이 한둘에 그칠까. 죽는 것보다야 싸게 치는 값이라고 위안할 만큼 고된 일을 마치고 상한 몸뚱어리로 돌아오기가 부지기수거늘.

나는 하고많은 부상당한 무녀들 중에서 조금 더 액운이 낀 경우였다. 아프다고, 못 움직이겠다고 엄살 부릴 형편도 못 되었고, 눈물이나 투정을 받아 주는 이들도 없는 설원에서 어지간한 치료나 뒤처리는 나의 몫이었다.

이 악물고 밥상머리로 기어가 그날도 살아야 하니까 수저를 물고, 덜 아문 상처에 물이라도 닿을세라 구부정한 자세로 들들 떨며 머리를 감고.

몸 한 부위가 망가졌다고 일상생활의 사소한 것마저 뜻대로 되지 않았던 시기가 있었다. 도와주는 이는 없다. 당연한 일상이니 가슴의 멍이고 설움이고 비집고 들어갈 틈이 있을까.

그런데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는 게 아니라 들어와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었다. 문득 가슴이 쓰라려 그를 돌아보았다.

“하면 씻겨 주시렵니까.”

목소리가 살짝 흔들렸다. 그는 그 말만을 기다린 것처럼 한 팔로 내 허벅지를 지탱하고 가볍게 안아 들었다. 방벽처럼 든든한 안락함에 긴장이 절로 헤쳐졌다.

그는 무릎에 꿀단지처럼 나를 앉히더니 아픈 다리를 천천히 주물렀다. 경련을 풀어 주듯 녹작지근한 감촉에 눈가가 다 시큰했다.

“네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아프지 않습니다.”

“그게 다 내 탓인 것 같아서.”

“비약도 정도가 있지 그게 왜 도령 탓입니까?”

기운혁은 말 대신 내 뺨에 입술을 얹었다. 뺨에 묻은 물기를 핥듯이 혀로 건드리다가 입술을 모아 쭉 빨고 저 혼자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하나 더 다가오지는 않는다. 더했으면 싶은데. 막상 붙어먹으면 나보다도 먼저 타들어 가는 사내이면서. 기분 탓인지 무언지, 선 긋는 태도에 마음이 살짝 심란해지고 말았다.

토라진 것처럼 뺨을 비끼자 그가 내 손등을 어루만졌다.

“왜.”

“감질나서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평생 소꿉장난만 하고 끝나긴 싫었다. 아주 웃기는 계집 아닌가. 야차도 이보단 겉 속이 같겠다. 환몽을 푸는 방법으로 숨을 나누자 청하는 운혁을 무지른 이유가 수련에 방해될까 봐서였는데 하루도 못 가 태세 전환이라니.

나는 그의 볼을 잡고 입술로 다가갔다. 기운혁은 굳어서 내가 하는 양을 숨죽이고 지켜보았다. 색색 몰아쉬는 숨이 덫에 몰린 짐승처럼 가련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귀가 벌써부터 발개져서는 시선을 내리까는 게 흑심 품은 금수처럼 요망하기도 하였다.

“사혜야.”

“왜요.”

나는 그를 붙들고 아까 전 당한 대로 혀를 먼저 뜨끈한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여우 꼬리처럼 살몃살몃 움직여도 보았다. 요 고르고 딱딱한 것이 치아고, 물컹한 살덩이가 수줍은 혀이고, 당황으로 짧아진 숨이 내가 먹을 것이었다.

입술로 입술을 덮고, 빠져나가려는 숨을 달게 삼켰다. 출렁인 물이 목 뒤로 튀었다. 밀쳐진 그가 뒤로 팔을 뻗어 욕탕을 붙들면서 탁류 같은 숨을 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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