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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49/86)

4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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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손바닥만 한 도자기 병을 쥐고 비장하게 섰다.

“얘, 호야. 지금부터 두 시진 동안은 온실에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해라.”

“예, 아씨.”

호야를 내보내고 자기의 마개를 열었다. 반쯤 빠져나온 마개로 자오록이 퍼져나가는 이 연기는 요귀의 환술을 구현한 것이었다.

사특한 연기가 삽시간에 구렁이처럼 바닥을 기더니 발목을 휘감았다. 얼마를 눈 감은 채로 섰을까, 다시 시야가 밝아졌을 때 눈앞을 채우는 것은 호야와 노력으로 살아난 색색의 온실 풍경 대신 흙먼지가 부옇게 올라온 장터였다.

“당장 저 애를 제물로 바치고 요귀의 화를 달래라! 어서 잡질 않고 무엇 하는 거냐!”

한 아이가 돌팔매질하는 인파를 피해 허파가 터져라 내달리고 있었다. 얼마 못 가 아이는 돌부리에 걸려 땅바닥을 굴렀고, 이내 사정없이 날카로운 돌이 쏟아졌다.

두툼한 손바닥에 뺨을 맞고 나가떨어진 아이는 피투성이가 되어 버린 채 어디론가 질질 끌려갔다. 아이의 어머니는 부른 배 때문에 꼼짝을 못하다 혼절하기 직전 남편의 품에 업혀 피신하였고, 그날 밤 독한 약을 먹고 쓰러졌다.

“이렇게 한들 떨어지지 않우. 남은 아이를 위해서라도 나쁜 마음 먹지 말고 살아야지. 기운 차리소.”

의원이 맥을 짚으며 하는 말에 어머니는 천 자락을 짓씹으며 울었다. 그리고 그 어머니 뱃속에서 콩알보다 한 뼘 자라나 있던 나는 비통한 울음을 모조리 듣고 있었다.

숨 막히도록 찐득한 액체가 나를 수장시키려 들어서 겨우 도망쳤는데, 알고 보니 그것을 저지른 이가 어미이더라. 녹아내릴 뻔한 나는 악착스럽게 살아 종양처럼 뱃속에 들붙었다. 결국엔 살아남았다.

이것이 아마 내게 가장 끔찍한 기억이자 환몽.

오늘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나는 두통을 느끼며 팔을 휘저었다. 환몽에서 벗어날 방법은 제정신을 붙들고 독기를 신력으로 밀어내는 것인데 되레 내가 밀쳐지는 기분이었다.

평소 무녀원에서 하던 대로 단계를 밟았건만 오늘은 무언가 이상했다. 거쳐 간 것보다 더 끔찍하고 음산한 기운이 사지를 긁는 감각.

나는 갈퀴처럼 끌어모은 신력으로 흐린 눈부터 씻어 냈다. 그런 다음 입을 닦고 좋은 추억을 되뇌었다.

“잠 못 드는 아이 곁에 오지 마라, 솔가지를 얹은 망량아. 죄 없는 아이의 눈을 빼먹으려 들다니 천벌이 두렵지 않더냐. 무엇이 원통해 피눈물을 흘릴까, 섧고 서러워 하늘까지 귀가 솟았구나. 욕심이 지나쳐 제 몫 아닌 자리를 기웃대니, 그 아이 육신 탐내지 말고 멀리멀리 떠나라.”

어머니가 잠들 적마다 불러 주신 요람가였다. 이쯤 되면 환시가 떨어질 법도 한데, 덩어리로 불어난 환각은 끝없이 새로운 악몽을 끌어오기만 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모르겠으나 이번에 나타난 것은 언젠가 내가 홍옥이라고 착각했던 붉은 눈이었다. 그 지긋지긋한 눈알이 나를 후벼파 대고 있었다.

“그 몸은 내 것이니 이리 내.”

홍운영이 핏발 선 눈으로 어깨를 잡아챘다.

“내버려 두면 또 배신당해 죽을 텐데. 네 천치 같은 행동을 두고 볼 수 없어 내가 대신 그 요귀를 죽여 주겠다는데.”

날카로운 손톱이 어깻죽지를 파고드는 통증이 실제처럼 생생했다.

“나가, 이 몸에서 당장 나가. 내게 돌려줘…….”

벌떼처럼 웅웅거리는 목소리, 음울한 속삭임과 정신없이 뇌까리는 말소리에 헛구역질이 났다.

통로는 벌어질 대로 벌어졌고, 구천을 유랑하는 혼이며 잡귀 따위가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한꺼번에 밀려 들어와 제 원통함을 들어 달라고 아우성을 쳐댔다.

“처음부터 너는 껍데기였어.”

풍랑을 마주한 몸이 흔들렸다. 악에 받친 비명을 감당하기 힘들어 주저앉아 머리를 쥐어뜯을 때였다.

불현듯 뺨이 잡아채였다. 생생한 온기에 멸망한 세상을 앞둔 것처럼 캄캄했던 시야가 멀겋게 뜨였다. 나는 눈물을 쏟아 내고 있었고, 누군가에게 뺨이 붙들린 채 입을 버끔대고 있었다.

“왜.”

“도…….”

“왜 울고 있어.”

나 못잖게 불안히 흔들리는 새파란 눈을 마주 보았다. 서느런 손가락이 눈가에 뭉친 눈물을 조심스럽게 덜어 내는 중이었다.

글쎄. 내가 왜 울고 있더라. 깨어나니 황천길을 돌아온 마냥 아뜩하다.

어머니가 날 죽이는 환시야 늘상 보는 것이라 새삼스럽게 울 일도 아니고. 하면 조상신의 협박을 좀 받았다고 펑펑 울고 있나. 무언가 이상한데, 내가 왜 우는지도 모르겠고, 내일 즈음이나 돌아와야 할 운혁이 왜 이곳에 있는지도 모르겠고. 여하간 머리가 어지러웠다.

가눌 수 없는 몸 핑계를 대며 기운혁의 품 안에서 조금 누워 있었다. 이상하게 그와 닿자마자 머릿속에 뭉쳐진 혼란이 거품만 남기고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홍운영을 보았어요.”

제정신을 차리니 울음을 보인 게 창피했다. 고개를 돌려 피하려고 했으나 그는 놓아주질 않았다. 볼을 훔치던 손이 잠깐 멈칫하는가 싶더니 다시 침착하게 말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주었다.

“그 여자가 너를 괴롭혀?”

“괴롭히기보다는…….”

악에 받힌 홍운영의 고함과 가뭄 난 땅처럼 일그러진 얼굴을 상기했다. 하는 일이 이렇다 보니 살면서 비슷한 얼굴을 많이 보았는데, 절박한 상황에서 무력함을 깨닫고 절망스러운 사람의 얼굴이 대개 그러했다.

꼭 내가 그 여자를 오랫동안 괴롭힌 것 같아 입이 열리지 않았다.

“언제부터. 내가 없는 동안 그랬어?”

“무어라 말을 하는데 자세히 듣진 못하였고, 꼭 나를 죽일 것처럼 어깨를 흔들었습니다. 나가라고, 몸 밖으로 나가라고.”

“……뭐?”

운혁이 내 앞에 무릎을 굽히고 눈높이를 맞췄다. 유심히 바라보는 시선이 몸 곳곳을 훑었다. 그 시선에 발가벗겨져 얼음판 한가운데에 선 기분이었다.

“한데 도령은 어쩐 일로……. 벌써 일을 마치셨는지요?”

“네가 왜 이런 수련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무얼 하든 나와 함께 해.”

싸느랗게 가라앉은 눈초리는 내 입술에 묻은 피를 향해 있었다. 요기로 빚은 환몽에 짓눌린 내장이 기어코 피를 본 모양이다. 푸르스름한 입술에서 더운 선혈 한줄기가 흘렀다.

“아, 도령. 이럴 게 아니라…….”

나가셔야 한다고, 아직 온실 안에 요기가 그득하다고 다그치려 했다. 내가 이 지경으로 만신창이가 되었으면 저이도 작게나마 영향을 받을 게 분명하니까. 나는 그가 조금의 해도 입지 않기를 바랐다.

“됐으니 잠깐 앉아.”

허둥대는 나를 운혁은 차분하지 못한 손길로 끌어내렸다. 나는 여전히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심장이 아플 만큼 세게 뛰는 탓에 사족이 후들거리고 혀는 지렁이처럼 비비 꼬여 가는데 진득이 고인 요기에도 그는 멀쩡했다.

또다시 속에서 덩어리가 역류할 것 같아 급히 입부터 막았다. 대낮에 풀밭을 구르며 소금을 짜내어 민망한 꼴은 다 보였는데, 여기서 피라도 뱉으면 뒷일은 어찌 감당하나.

“숨 쉬어, 사혜야.”

그는 사시나무처럼 떠는 날 안타까운 듯이 보다가 엄지로 헐떡이는 아랫입술을 눌렀다. 다른 손으로는 안정을 주려는 듯이 옹송그린 내 주먹을 하나하나 펴고 제 손등을 얹어 깍지까지 꼈다.

턱이 먼저 붙들렸다. 그러더니 이후 부드럽게 떨어진 사내의 숨결이 입술을 누르며 파고들었다. 말랑한 살덩어리가 혀 끝을 들추면서 더 깊은 안쪽으로 파고드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내게 입술을 붙이고 혀를 밀어 넣었다는 자각은 한참 늦게 찾아왔다. 놀라 밀쳐 내려는데 그마저도 예상했다는 듯이 커다란 손이 내 뒷머리를 잡았다.

“으읍.”

참으로 생경한 느낌이었다. 호흡을 통해 내게 무언가를 불어넣고 있었는데, 아까 그와 맞닿는 순간 몸이 한결 편안해졌던 것처럼 정신이 맑아졌다. 정화라기보다는 내게 고인 독을 서슴없이 끄집어 삼키는 행위였다.

이러다 기운혁도 잘못되면 어쩌나. 그만두고 떨어지라며 가슴팍을 팍팍 치댔으나 잠시 떨어진 입술은 서릿발처럼 나를 꾸짖었다.

“받아.”

“아니……읏.”

나뭇등걸 같은 팔뚝이 꺾어진 허리를 받쳤다. 그가 짧게 숨을 들이켜며 조금 더 깊숙이 혀를 밀어 넣었다. 연어 꼬리처럼 요살스럽게 치댔다가, 다시 사정없이 빨아들이는 감각에 솜털이 모조리 일어서고 말았다.

그는 놀란 토끼 같은 반응마저 기껍다는 듯이 하얗게 쥔 내 손등뼈를 쓰다듬었다. 이런 감각은 스물한 해 인생 처음이라 눈 둘 곳도 몸 둘 바도 모르겠다.

그래, 운혁은 익숙한 듯 눈을 감고 있었는데 나는 얼치기처럼 치뜨는 것도 모자라 코로 숨을 쉬는 것도 잊고 헐떡대고 있었다. 왠지 나도 그래야 할 것 같아 눈꺼풀부터 닫았다.

그러고 한참 숨결을 섞고 있으니 내장을 찌그러뜨리는 통증이 서서히 물러나기 시작하였다. 온실을 희붐하게 채운 요기가 걷히고 한참 뒤에 기운혁이 타액으로 물든 입술을 떼어 냈다.

“이리하시면 도령의 몸에도, 무리가 가실 텐데…….”

“그 여자 말고 또 무엇을 보았어?”

나는 뺨에 얹어진 운혁의 손을 마주 잡고 기억을 더듬었다.

“저를 죽이려는 어머니를 보았어요.”

“……많이 아팠겠다.”

내 마음을 두고 하는 말인 줄 안다. 그는 먹먹한 내 콧잔등에 달래듯이 입술을 붙이고 등을 쓸어 주었다. 힘들 때 의지할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 나는 기운을 얻었다. 달려와 준 그가 고마워서 그의 어깨를 안았다.

그는 웃으면서 내 입술을 다시 물었다. 아까는 얼결에 휘말렸다지만 지금은 안정적이다 못해 이보다 더 또렷할 수 없는 정신인 것을. 속눈썹이 간지러울 정도로 가까운 시선이나, 혀가 입천장을 살그미 긁으며 비끄러지는 움직임은 두 번 겪어도 익숙해지기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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