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다녀올게.”
미몽을 헤매다 잠에서 깨어났다. 어슴푸레한 새벽하늘을 등지고 선 운혁은 3일간 집을 떠나기 위해 채비를 하는 중이었다.
가을철 싸늘한 바람이 추스린 장포 틈새로 속속 파고들었다. 나는 문간에, 운혁은 그 너머에 서서, 우리는 상반된 얼굴로 바람을 맞고 있었다. 나는 잠을 제대로 못 자 꺼진 눈으로 그를 배웅했고, 그는 개운한 미소를 지었다.
“일찍 나가신다더니…… 첫닭도 울지 않았는데 가십니다.”
그를 떠나보내고 곧장 침방으로 몸을 내던질 생각으로 대청에 걸터앉았다. 어제 기운혁이 홍운영이니 조상신이니 운운한 뒤부터 밤을 꼴딱 새워 그 말만을 곱씹느라 눈알이 빠지도록 피로했다.
신분도 까발렸겠다, 그가 내 조상에 대해 알고 있으리란 예상은 했으나 마치 홍운영과 안면이라도 튼 듯이 굴 줄은 몰랐다. 얼굴도 모르는 홍운영이 보이느냐고 묻는데, 눈에 서린 감정이 똬리 튼 뱀처럼 으슥했다.
‘어떤 여인이 보이긴 한데, 홍운영인 줄은 모릅니다.’
‘그 여자가 말을 걸기도 해?’
‘아뇨.’
‘그 여자가 무어라 하든 믿지 마. 나타나거든 내쫓고, 말을 걸으려 들면 귀를 막아.’
‘……저도 그러고 싶다만, 눈 막고 귀 막아 떨쳐 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네 심상에 영향을 받으니 충분히 떨쳐 낼 수 있어.’
만일 기운혁의 말이 진실이라면 이 상황은 위험했다.
조상신은 지상에 발목 잡혀 천도하지 못하는 찌꺼기 같은 영으로, 곁에 두면 득보다 실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미련이 깊어 명도로 떠나지 못한 영혼은 후대나 후생에도 불건전한 영향을 주는데, 환시, 환청 따위로 정신이 묵삭을 때까지 괴롭히는 것이다.
그 붉은 실타래 같은 머리카락과 시뻘건 동공이 홍운영임을 알아차린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나와 너무나도 닮은 모습에, 내가 홍운영을 빼닮았다는 어머니의 말을 기억해 낸 것이다.
그보다 기운혁이 이걸 다 무슨 수로 꿰고 있는지 모르겠다.
문득, 임영에게 보냈던 서신을 떠올렸다. 아마도 운혁에 대해 세세히 알고 있을 한 사람.
기운혁이 유일하게 입 밖으로 낸 사람인지라 특별한 관계이려니, 하면 서로 간 아는 것도 많겠지 기대를 품고 서신을 전하였는데. 무정한 노인은 달이 지나가도록 무소식이고 운혁은 자신에 대해 밝히길 여전히 꺼려 하니 터지지 않고 버틴 내 복장이 기특하다.
“이만 갈게. 없는 동안 너무 그리워하지는 말고.”
나는 잘 다녀오시라는 뜻으로 운혁의 손을 꾹 쥐었다 놓았다. 그가 내 손등을 가져가 입을 맞추고 떠난 뒤에도 신발코로 바닥만 파다가, 안 들어가시느냐는 종의 물음에 방으로 돌아가 조금 눈을 붙였다.
그런 연후에 해가 중천에 걸릴 무렵 겨우 몸을 추스리고 일어났다. 조상신 얘기를 들은 뒤로 줄곧 정신이 까마득했다. 수련을 다짐한 첫날부터 정신 빠진 꼴이 한심하다.
“기침하셨습니까.”
“그래, 내가 마련해 두라고 한 것들은 어찌 되었느냐?”
“분부대로 준비해 두었습니다. 주인님께서도 자유롭게 쓰라고 허락하셨고요.”
소셋물을 들고 온 종이 방긋 웃으며 답했다. 일전에 수련하기 마땅한 널찍한 장소가 있는지 물어 두었는데, 하나 발견해서는 꼬박 3일 동안 부지런히 치웠다는 것이다.
“장소는 어디지?”
“온실입니다.”
“온실.”
부잣집이라 별별 것을 짓고 사는구나. 수고해 준 종비에게 엽전 한 닢을 넘겨주자 꼬리를 치며 냉큼 받아 간다.
이 집 종들은 까마귀처럼 반짝이는 물건과 돈을 좋아해 받고도 쓰질 않고 꼬박꼬박 모으는 습성이 있는데, 일을 시킨 다음 수고비로 쥐여 주면 몹시 좋아라 하며 충성을 바친다고 했다. 그런 식으로 기운혁은 오랫동안 종들을 매수해 두었다고.
참 별나지 않은가. 수집광인 사람도 있다만 대부분 무언가를 모아 두는 습성은 금수나 요귀의 것인데.
“그러고 보니 아직 네 이름을 몰랐구나.”
돌아서서 주머니에 엽전을 넣던 종이 뒤돌아보았다. 늘상 나서서 시키지 않아도 척척 필요한 걸 내오고, 어쩌다 부를 일이 생기면 ‘얘, 거기 있니’ 한마디면 귀신같이 알아듣고 달려오는 아이였다.
“저는 이름이 없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여종의 나긋나긋한 말이 의외였다.
“저뿐만 아니라 환미당의 모든 종들은 이름이 없지요.”
나의 혼란을 이해한다는 듯이 아이가 웃으며 첨언했다. 다들 눈치가 보통이 아니라더니. 이름이 없어도 무엇이든 척척 처리할 수 있도록 늘 신경을 곤두세웠겠구나.
“환미당?”
“저희들끼리는 이곳을 그러한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흑단색 머리칼을 만두처럼 양쪽으로 묶고 뒷머리를 곱게 풀은 아이는 샘처럼 투명한 눈을 갖고 있었다. 그 자태가 퍽 오묘해 세로줄을 박아 넣으면 요귀가 될 것 같기도, 둥글게 팽창한 동공을 끼워 넣으면 산토끼가 될 것 같은 인상이었다.
아미 사이에 연노랑 점이 찍혀 있고, 속눈썹은 금가루 장식을 뿌렸는지 꽃술처럼 샛노란 색이었다. 부잣집 종들은 제 주인처럼 꾸미고 치장을 한다던데. 그리하여 기운혁이 두고 사는 종들은 이리 어여쁘고 잘났는가.
나는 신기해하며 구경하다가 이름을 정했다.
“네 이름은 호야로 하자.”
“예?”
“어차피 당분간 한집 신세를 질 터인데. 언제까지 얘야, 얘야 부를 순 없는 노릇이니.”
나보다 너덧 살은 어려 보이는 종의 부들부들한 흰 뺨이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하면 호야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온실 가실 때 불러 주세요, 아씨.”
호야는 소세 대야를 두고 사붓이 제 갈 길을 떠났다. 치맛자락 아래로 토끼 꼬리처럼 삐져나온 발이 통통 튀고 있었다.
얼굴과 목을 씻고 정갈한 의복으로 갈아입은 다음 온실을 살펴보고자 나갔는데, 문밖에서 기다리던 호야가 귀신처럼 잽싸게 따라붙었다.
“여긴가. 안개가 짙구나.”
“뒤편으로 울울창창한 숲길이 나 있는데 아마 그 때문이 아닐까요?”
“그래, 오늘 비가 내린다고 하였지. 네 주인이 얇은 장옷 하나만 걸치고 나가 신경 쓰이는구나.”
“걱정 마세요, 아씨. 주인님은 잘 아프시질 않으니까요. 모시는 동안 잔병치레 한 번을 안 하셨어요.”
“그 사람이 어릴 적 병증을 심하게 앓아서 그런다. 걱정이 될 수밖에.”
숲으로 이어지는 가옥 뒤편부터 촉촉한 안개가 아지랑이처럼 길을 만들었다. 그 끝에 도저히 다른 장소로 부를 수 없는 기묘한 공간이 있었다.
유리는 서대륙에서 정해진 양만을 수입할 만치 값비싸서, 왕실 보물들을 전시해 놓을 때만 쓰인다고 들었다. 밀국에서는 제아무리 날고 기는 귀족이더라도 유리 공예품을 손에 넣기 힘들었는데, 이 건물은 양쪽 벽면에 안이 훤히 보이는 통유리였다.
나도 어느 고관대작의 의뢰를 떠안다가 한번 구경해 보지 않았다면 이 신묘한 벽이 유리라는 것을 알지 못했을 터다. 그 값비싼 유리로 공간을 만든 기운혁의 재력에 혀를 내두르며 조심스레 문을 밀어젖혀 보았다. 안은 널찍하고, 빛이 잘 들어와 구들장에 오른 것처럼 따뜻했다.
내가 명상을 위해 적당히 그늘지고 적당히 볕 들어오는 자리를 선점할 동안, 호야는 기척도 내지 않고 한쪽에서 씨앗을 심었다. 간혹 내가 무얼 하나 궁금해하는 기색이었으나 호기심을 누르고 얌전히 제 할 일을 한다.
까다로운 주인을 모시는 이답게 귀신 걸음에 일가견이 있는 아이였다. 덕분에 나는 호야가 주변에 있는지도 모르고 편하게 책상다리를 하고 수련에 집중할 수 있었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눈을 감았다. 명상은 통로를 최대로 벌리는 과정이었다. 이때 온갖 잡귀들이 꼬이기도 하나, 어느 때보다 선명히 신어를 알아들을 수 있기도 했다.
의식을 한곳에 모으면 붉은 공이 허공에 어렴풋이 떠오른다. 그것이 내가 쏠 과녁이자 받잡는 신의 형체였다. 예전엔 빛깔 맑은 사과알처럼 보였는데 기운혁이 남기고 간 말 때문인가, 꼭 그 여자의 흉흉한 눈알 같은 게…….
파르륵.
그때, 잔잔한 흐름을 끊고 부산한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허공에 부유스름하게 떠오른 붉은 과녁을 쏘아 맞추기도 전에 명상이 깨졌다.
마제를 추적하기 위해 수도 도처에 뿌려 두었던 나비 영물이 아주 오랜만에 시들시들 돌아왔다.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내가 묻자, 날갯죽지가 아파 죽겠다는 듯이 힘이 없고 더듬이가 축 처진 영물들이 면목 없다는 듯이 도리질을 쳤다.
“그 비슷한 냄새가 묻은 땅이나, 굴도 없고?”
서로의 눈치를 보는 영물들을 보고 직감했다. 역시 허탕이구나. 하기야 쉬이 발견하면 마제의 위명이 서러워 울겠다.
“어쩔 수 없지. 조금의 흔적이라도 발견하면 즉시 내게 알려다오.”
영물들은 내 어깨에 내려앉더니, 마제 대신 잡스런 요귀들은 많이 보았다며 귀엣말을 보탰다. 치안이 좋지 못해 무시로 질 나쁜 범죄가 일어나는 수도 변두리 쪽에 땅 요귀들이 바닥을 뚫고 나와 활개를 친단다.
“그래, 그쪽으로 한번 가 보렴.”
나는 영물을 멀리 날려 보낸 뒤, 호야에게 지필연을 부탁했다. 한번 깨진 명상을 이어 붙이는 대신 먹을 묻힌 붓을 들어 빈 부적을 한 획 한 획 채워 나가기 시작했다.
마제를 직접 본 적은 없으나 물의 습성을 지닌 요귀라고 배웠다. 움직임을 제하는 주박술과 진을 그릴 때 필요한 파마도(破魔圖)까지 도합 40장의 부적에 모래를 뜻하는 글자와 눈(目)을 수놓았다.
습성에 따라 상충하는 힘을 써야 하는데, 범람하는 물을 묻는 것은 화염이 아닌 매립할 모래였다. 타고나길 바람인 나는 물과 대적하기에 상생도 상극도 아닌 모호한 힘인지라 강을 가르는 정도에 그칠 뿐이다.
부적을 다 썼을 땐 해가 서산으로 굴러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송골송골 맺힌 땀을 쓸어 훔치며 낮 동안 뜨끈히 데워진 바닥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가장 중요한 수련이 남아 있었지만 해 떨어지고 할 일은 아닌 듯싶었다.
간혹 정신계에 탁월한 요귀들이 있다. 사냥감의 무의식을 입맛대로 건드리고 불운한 과거를 끄집어내어 맥을 못 추게 하는 것인데, 거기에 당해 죽은 무녀만 헤아릴 수 없었다. 나 역시 이를 위한 수련 도중 숱하게 넋을 잃었는데, 정신 차리자마자 헛구역질을 얼마나 했는지 모른다.
내게 남은 훈련은 그 환시를 이겨 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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