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엊저녁에 이상한 소리가 나지 않던? 묵직한 게 쿵 떨어지는 듯한 굉음 말이다.”
“쇤네는 듣지 못했으나 아침에 뜰을 청소하던 중 부서진 뒷문을 발견했습니다.”
“도둑이라도 들은 것인가.”
“그럴 리가요. 아마도 주인님이 그리하신 듯하니 염려 마세요.”
“도령께서?”
“예, 수련 도중 종종 그러신답니다.”
집구석에 아작난 대들보며 무너진 헛간 따위가 낡아 바스러진 게 아니라 죄 기운혁의 소행이라는 뜻이었다.
“요란하기도 하구나.”
나는 생선을 향신료와 함께 맛깔나게 버무린 상을 받아들고 깨작깨작 숟가락을 넘겼다. 오늘이 지나면 나는 다시 본분으로 돌아가 그간 소홀했던 수련을 하고, 기운혁의 농간질에 잔뜩 흐려진 심신도 닦을 생각이었다.
수련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요귀를 잡아 요력을 채우는 것으로 무난히 해치우겠으나, 다른 하나는 요귀의 환몽술에 대비하는 것으로 퍽 까다로웠다.
나는 싫은 것부터 끝장을 보는 축이었다. 내일부터 고단한 하루가 되겠구나 혀를 차며 장국을 휘젓는데,
쿵.
“……이게 무슨 소리냐?”
“주인님이 돌아오신 모양이에요.”
밥상을 내려놓자마자 시종이 달려 나갔다. 잠시 뒤 종이 흰 도포 차림의 기운혁을 뒤편에 달고 나타났다. 눈치껏 밥상을 하나 더 내오곤 잽싸게 문을 닫고 나가는 모양새가 잘 훈련받은 번견이었다.
먹음직스러운 냄새를 솔솔 풍기는 상이 눈앞에 있는데도 기운혁은 입맛 떨어지는 얼굴로 상 주변을 맴돌다 내 맞은편에 주저앉았다.
“얼굴에 졸음이 가득한데 침소에 들지 않고요.”
“네가 보고 싶어서.”
고저 없이 뇌까리는 사내의 눈빛이 음울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엊그제 일이 조금 마음 쓰여서 바닥에 놓인 그의 손을 잡았다. 또 어디가 아픈 걸까. 내게 말 못 하는 사정이 있다고 생각하니 조금 섭섭하기도 했다.
“네가 모르길 바라는 일.”
닿은 손등이 계절을 잊고 차가웠다. 온기라도 전달될까 내가 더 꽉 잡으니 그는 조금 놀라면서도 기분이 좋은지 손가락을 풀잎처럼 꼼지락거렸다. 그리곤 잠기가 묻은 눈을 비비더니 아주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포슬포슬한 머리카락을 내 무릎에 대었다.
나는 웅크린 그의 머리를 치우는 대신 손가락을 걸고 빗질해 주었다.
“3일간 집을 비울 거야.”
“일 때문에요?”
“응.”
잠을 한 숟갈 뜬 목소리가 사르륵 밀려들더니, 그의 작은 머리통이 무릎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가 내 배에 얹혔다. 나는 턱에 힘을 주며 간질거리는 느낌을 참았다.
“도령이 집을 떠나 있을 동안 마침 저도 할 일이 있어요.”
“무언데.”
“도령께서 모르길 바라는 일이요.”
“아, 그렇게 나오시겠다…….”
약점이 잡힌 듯했다. 호두알처럼 다물린 턱을 보고 운혁은 나의 취약점을 간파한 듯 고개를 젖트리고 뭉근히 비비적거렸다. 하필이면 감촉이 생생히 통과하는 얇은 비단을 입고 있어 간지럼증이 극에 달했다.
내가 그의 머리를 치우려고 무릎을 험하게 쳐들 때야 그는 죄를 뉘우치는 얼굴을 했다.
“하면 내가 말해 주면 알려 줄건가?”
“생각을 해 보지요. 그보다 불편하실 텐데 침방에 가서 제대로 누워 자시지. 곤하다, 밥맛도 없으시다, 진정 저 하나 보겠다고 여기서 이러는 것입니까?”
“침방에 혼자 있기 싫어. 마음이 춥거든.”
그는 중얼거리더니만 나를 더 꼭 껴안았다. 여름철 고목나무의 그늘에 철썩 붙은 매미 같았다.
“저야 늘상 곁에 있지 않습니까?”
“일생을 함께 하면 좋을 텐데.”
“일생…….”
“그럴래?”
평생을 함께라. 꼭 구혼을 닮은 말이 아닌가. 장난처럼 마음을 지르밟고 홀짝 떠나가는 말을 곱씹으며 씁쓸함을 느꼈다.
대답을 안 해 주니 그가 옷자락을 살며시 흔들었다. 하나 무엇도 약조할 수 없는 입장에서는 그 손을 헛헛하게 쓸어 주는 것밖에 못 했다.
문풍지를 투과하는 볕의 세기가 쨍쨍했다. 어제와 달리 날이 맑아서 다행이었다. 햇빛에 노랗게 적셔진 손을 떼어 사내의 뺨에 가볍게 대 보았다. 또렷한 옆얼굴이 새삼스레 참 고왔다.
연지색이 도는 입술에 절로 시선이 꽂혔다. 욕심 많은 손가락은 그의 머리카락에서 슬쩍 눈가 주변의 관자놀이를 더듬다가, 입술 언저리로 유연히 미끄러졌다. 톡. 과실을 따듯 살며시 입술을 두드려 보고, 야들야들한 입술 선의 궤적을 그려 보았다.
그는 다 이해한다는 듯이 온화한 부처 같은 얼굴이었다. 한 번 만져 보니 두 번 손대고 싶고, 세 번째에는 조갈이 일었다. 이곳저곳 다 만져 보고 싶다는 음험한 생각이 잠시 잠깐 일었는데, 이게 다 염정 소설의 애독자인 요희가 거름망 없이 쏟아 낸 말의 여운 때문이었다.
“날이 좋다.”
종전까지 피로로 비척댄 새파란 눈이 슬몃 뜨였다. 햇살 가루를 묻힌 눈이 무언가를 바라는 것으로 읽혔다. 웃으며 그의 눈썹뼈와 뺨을 차례로 쓸었다.
“또 무얼 하고 싶으십니까?”
“백로에 노루 사냥이 열리는데, 가장 큰 놈을 잡을 거야.”
답지 않게 성실한 마음가짐이 아닌가. 일 치를 때마다 설렁설렁, 대충 건드려 보는 습성을 지닌 그가 무언가에 열성을 보이는 것은 처음이라 또 기특한 마음에 물들고 말았다. 그의 눈꺼풀을 찌르는 햇빛 한 조각을 손으로 가려 주며 웃었다.
“그리고 네게 바쳐야지.”
“가문의 영광이네요.”
수도에서 매해 열리는 사냥 대회에서 가장 귀한 것은 신묘한 분홍 털을 가진 큼지막한 노루였다. 그걸 내게 헌정한다니 기특할 수밖에.
도령은 진지했다. 눈을 감고 입술은 반달은 그린다. 가지처럼 매끄런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으며 중얼대는 목소리에는 아까만 한 열정과 성실함이 묻어 있었다.
“겨울엔.”
“겨울에는.”
“설산에서 별 구경을 하는 거야. 내가 경치 좋은 곳을 알아. 가 보진 못했지만.”
치맛자락에 뺨을 비비며 그는 다음 손가락을 접었다.
“그리고 봄에는…….”
결국엔 저가 나와 하고 싶은 것을 줄짓는 것이었다. 이듬해 봄으로 넘어가, 여름으로, 가을로, 한없이 먼 미래처럼 느껴지는 겨울까지. 나와 하고 싶은 것이 참 많은지 지치지 않고 재잘거렸다. 빈 계절이 없다.
“그래 줄 거지?”
“…….”
“사혜야.”
확신을 업은 얼굴이 참 행복해 보여서 한 발 빼지도 못하겠다.
내가 가만 말을 아끼니, 그는 마음속에 틀어 앉으려고 작정한 마냥 웃으며 다가왔다. 당장 올해를 넘기는 것조차 불확실한 처지인 나로선 유혹에 굴하지 않고 입을 봉해야 했다.
나를 벽 사이에 조심히 밀어 넣은 그가 한동안 물끄러미 시선을 보냈다.
“연모하잖아.”
“…….”
“나를, 연모하잖아.”
나는 눈길을 틀었다. 그러자마자 그는 내 턱을 당겼다. 시선을 들어 마주치라는 의미였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데…….”
“도령.”
“그렇지?”
그의 손이 내 머리 옆 벽을 쓸었다. 귀하고 아름다운 것만을 빚어 만든 매끄러운 얼굴이 점차로 가까워질 때마다 오그라들게 가슴이 뛰었다.
그때 내가 어떤 표정으로 맞섰는지는 모르겠다만 아마 올되어 흐무러진 홍당무처럼 볼썽사납지 않았을까. 짧게나마 모른 척 말꼬리를 잡아 빼려 했던 의지는 무너지고 깨졌다.
매끈둥하게 고개를 기울며 다가온다. 흐트러진 날숨이 코앞에서 분다. 요희에게 들은 것이 있다. 여인에게 가깝게 붙어서 눈을 마주치며 다가오는 사내의 행보는 분명 접문의 징조라고.
심장이 무너지도록 발을 굴러대고 있었다. 기대하던 입술은 순서를 지키듯이 이마와 콧잔등에 가볍게 내려앉은 다음, 뺨에 짧게 머물다 떠나갔다. 그뿐이었다.
그는 한 발자국 물러났다. 접문을 바라듯이 입술을 살풋 내밀고 있던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으니, 낯판에 불붙은 듯 민망해지고 말았다. 운혁은 입술 끝을 떨며 소맷자락으로 회심의 미소를 감추었다.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하게 되었다. 민망스러워 급한 동작으로 엉금엉금 기어 벗어나는데, 이 장난스런 사내는 그걸 보고 또 엉큼한 흥이 동했는지 어슬렁 따라오는 게 아닌가.
한 칸짜리 좁은 방에서의 어수룩한 추격전은 금세 끝을 보았다. 백기를 든 내 양 뺨을 도령이 붙잡았다. 무릎을 쭈그린 그가 다시금 쪼듯이 뺨에 입을 맞추었다.
“운혁, 잠……”
“주인 어르신.”
종이 상을 치우겠다고 나섰을 때야 엉겨 붙은 몸이 떨어지고 혼 나간 정신을 거둘 수 있었다.
대낮에 낯 들기가 부끄러워 죽겠다. 빨개진 뺨을 도령이 손부채질로 식혀 주는데, 그것이 배는 민망스러웠다. ‘많이 부끄럽나 보다,’ 하며 귀에다 속닥일 때는 어깨를 아주 밀쳐 버렸다.
“음식은 입에 좀 맞으시는지요?”
일전에 나의 기호를 알아 간 종이 웃는 낯으로 공손히 물었다. 무얼 드시고 싶은 것이 있는지 묻길래 생각나는 것을 아무거나 둘러댔던 기억이 났다.
“두부조림과 고기완자를 잘 드시는 듯해서, 특별히 신경을 써 준비했습니다.”
주인 앞이라 잘 보이려 애쓰는 마음이 느껴졌다. 순박한 성정을 알기에 약아 보이지 않고 기특하다.
나는 종에게 배불리 잘 먹었다는 말을 전한 뒤에 어서 가져가라며 탁상을 밀어 주었다. 기운혁이 여전히 붙어서 치덕대고 있었기에. 주인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계속 이러고 있을 순 없는 노릇 아닌가.
“한데 사혜야.”
종이 꼬박 고개를 수그리고 나갈 적에, 이마를 쓸던 손이 멎었다. 어느 순간부터 조용해진 기운혁은 창밖에 시선을 던져두고 있었다. 그 표정이 자못 쌀쌀맞았다.
“왜 그러십니까?”
“지금 네 눈에도 보여?”
그쯤 나는 정신머리가 빠져 있었다. 해서 그가 흘린 말의 의미를 단박에 파악하기 어려웠다.
“우리를 지켜보고 있어.”
쭉 펴진 검지를 따라 느릿느릿 시선을 옮길 뿐.
“네 조상신, 홍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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