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중간역에 다다른 가마가 잠시 멈출 때, 기운혁이 가마의 외벽을 두드렸다.
“어머니는 어디 계시지?”
“의료원에서 신세를 지고 계십니다.”
“함께 가지 않아도 돼?”
“……예.”
앞서 말했듯이 나는 수련 시절 어머니를 멀리서밖에 볼 수 없었는데, 그 3년간 나만큼 심하게 마음고생했던 어머니는 정신이 온전치 못하셔서 이제는 딸자식도 못 알아볼 지경에 이르렀다.
일전에 진원이 어머니가 무탈하시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는데 늘 그랬듯 그것으로 위안을 삼을 뿐이었다.
이후 침묵 속에서 꼬박 반나절을 더 이동했다. 마침내 도착한 기운혁의 거처는 왕이 튀어나올 대궐 같았다. 금단청을 새긴 삼단 기와를 얹고 궁에서나 볼 법한 사다리꼴 전각 지붕의 네 귀를 장식한 용머리 잡상이 위세를 떨었다.
으리으리한 집채에 걸맞는 너른 중정, 옥구슬 같은 연못과 바닥을 얽은 가느다란 꽃줄기. 눈을 즐겁게 하는 관상목과 화초가 몽우리 진 내원까지 말해 무엇하랴. 아흔아홉 칸 가옥에 버금가는 호화로움이었다.
교육받은 비복들은 신 끄는 소리도 내지 않았다. 쪼르륵 물 떨어지는 소리만이 평화의 반주처럼 고요히 울렸다.
“돌아볼래?”
기척 없이 다가온 기운혁이 손을 내밀었다.
“네 내실도 보여 주고.”
안내를 받아 안채까지 죽 산보했다. 돌아보니 잘 정돈된 전각이 있는가 하면, 폐가라고 봐도 손색없을 만큼 관리되지 않는 장소도 곳곳에 눈에 띄었다.
벼락을 맞았는지 대들보가 무너진 곳도 있는데, 역마살 낀 주인이 딱히 돌보지도 않을뿐더러 별다른 명이 없어서인지 그대로 방치되는 것 같았다.
“마음에 들어?”
기운혁의 내실과 멀지 않은 내 거처는 다른 방에 비해 유독 공을 들인 모양새였다.
은실이 수놓인 자색 휘장을 걷자 두 단으로 쌓아 올린 푹신한 금침이 번듯하게 눕혀져 있었다. 솜을 그득 먹여 부풀린 이불에 몸을 던지면 거품처럼 가라앉을 것 같았다.
“마음에 들다 뿐일까요. 과분함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만.”
외에도 화려한 옷들이 걸린 단풍나무 의걸이장과 예물을 채워 넣은 화각함이 차곡차곡 귀퉁이를 차지했다.
그 반나절 새에 종에게 내가 올 것을 미리 일러 두고 준비한 것일까. 무녀원에서 쓰던 금침도 이 정도로 사치스럽진 않았다.
“이만한 호의호식을 바란 것은 아니었습니다.”
상등품의 비단옷을 열없이 만지작대고 있으니, 운혁은 그러냐며 연지색 치마를 내 허리께에 가져와 두르더니 실실 웃었다.
그가 장난치듯이 슬쩍 치마 윗자락을 잡아당겼다. 덩달아 나의 허리가 쪼르르 끌려갔다.
“어울려.”
그리 말하는 귀가 여문 복숭아 빛깔이었다. 나도 모르게 사내의 보들한 귀를 만져 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옷이 날개라잖습니까.”
“이것도.”
한바탕 난리를 떨었다. 우리의 취향이 비슷하여 고르고 흡족해하는 옷들이 거기서 거기였다. 하나씩 입어 보고 면경 앞을 기웃거리는 모습이 어찌나 생경하던지. 그가 아니었다면 일생을 모르고 넘어갔을 기쁨이었다.
기운혁은 방물장수처럼 옷과 패물을 품에 안겨 주고 떠났다. 수도를 오래 비워서 처리가 시급한 일이 많은데 나랑 노닥대느라 홀딱 잊어버렸단다.
나는 기운혁이 선물한 보옥과 비단옷을 잔뜩 늘어뜨려 놓고 구경하다가 문득 졸음이 밀려와 눈을 비볐다. 용수보에서 죽어라 물걸레질하다 난데없는 의걸이장 노릇까지 하니 누적된 피로가 쌓인 까닭이다.
호사는 나중 일이고 우선 잠부터 채워야겠다. 어쩐지 내가 곯아떨어져서도 부담스럽게 지켜볼 것만 같아 시비들을 내보내고, 살결을 녹이는 금침을 펴 누웠다.
‘기분 탓인가.’
정신이 혼몽한 게, 발 닿는 곳마다 뭉근히 퍼지는 향초의 냄새가 이성을 풀어헤쳤다. 그러다가 곧 그것이 기운혁의 체향과 비슷하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봄철 춘란 같기도, 여름의 물푸레나무 같기도 한.
나는 마음을 다독이는 향에 감싸여 까무룩 단잠이 들었다.
* * *
그간 아등바등 살았으니 내게 주는 잠시간의 유예라고 생각했다. 딱 일주일. 그동안은 미래에 대한 고민의 무게를 내려놓고 하고픈 일을 하자.
해서 고른 것이 운혁과의 옥 장기였다. 대국을 한 다음엔 내 키에 맞는 과하마를 타고 함께 산책을 즐겼다. 등허리에 미끈하게 안착한 손길, 귓가에 울리는 녹작지근한 저음, 개울처럼 유유한 웃음. 덧없이 피고 이운 하루를 달구는 것은 요즈음 그런 것들이었다.
나를 신줏단지처럼 모셔 온 기운혁은 하냥 짝지처럼 붙어 살았으나 밤중 종종 사라지기도 하였다. 대게 요귀들의 주 활동 시간은 볕이 사라진 밤과 새벽이니 퇴마 의뢰를 하러 나가는 것이겠지. 딱히 이상할 것도 없었다.
그러고는 어스름이 내려앉을 때나 소리 없이 귀가하는데, 이때마다 내가 잘 자고 있는지 눈도장을 찍고 침방에 들었다. 내가 어딜 말도 없이 사라지려는 것도 아닌데. 내가 밤중에 몰래 월담이라도 하진 않을까 엄한 걱정을 쌓아 놓고 살았다.
“주로 낮 시간에는 무얼 합니까?”
운혁도 나도 일이 없던 공교로운 때에 우리는 전각에 마주 앉아 잘 익은 홍옥을 깎아 먹었다.
“밀린 잠을 몰아서 자.”
“아무리 요귀들 쫓기로써니 밤낮 뒤바뀐 생활을 이어 가면 건강에 해로우실 텐데요.”
요기가 상당한 녀석들은 주로 야행성이었다. 지은 업보가 무거울수록 하늘을 바라보지 못하는 법이라. 풋내기 요귀들은 대낮이건 어둠이건 시간을 가리지 않고 뻘뻘 기어 다닌다지만 악의로 뭉개진 상급 요귀들은 처지가 달랐다.
그것들은 밤의 음습함을 고대로 빼어박아 하는 행동마다 무자비하고 악독했으며, 퇴마사의 머리를 딸기 꼭지처럼 떼어 낸 다음 배를 열어 내장을 따로따로 맛보는 습성이 있다고 하였다.
기운혁이 밤마실을 나간다는 뜻은 그런 무도한 놈들만 나서서 해치운다는 소리인데.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바라보자 싱그레 접힌 눈가가 시선을 받는다.
“밤중 요귀들은 끝을 모르고 잔혹해지는데. 혹 방심하다 잘못되실까 봐 염려됩니다.”
“그러고 보니 용수보에서도 넌 내 걱정을 떠안고 살았지.”
토끼 모양으로 깎은 홍옥 두 개가 쟁반에 다소곳이 웅크리고 있었다. 재주도 좋지, 칼을 좀 만져 본 나로서도 하기 힘든 재주를 부려 놓았다.
“그건 습관인가?”
그는 깨끗이 닦은 손으로 토끼를 하나 집어 내 손에 올렸다.
“다른 이들한테도 염려를 퍼 주고 걱정하고 그래? 입도 맞추고?”
용수보에서의 일을 꼬집는 것이었다.
“제가 그리 헤픈 사람은 아니고요.”
“그럼 나라서? 아니면 허물없는 사이면 누구에게나 쏠리는 마음인가.”
허물없다고 배알까지 버렸겠나. 제아무리 가깝다고 한들 여기저기 물 푸듯 걱정 퍼 주고 다니지는 않는다.
하나 반박하기도 전에 그의 손이 턱 밑에 스치듯 닿았다. 운혁의 손끝에 의해 턱이 들려지면서 자연히 아래에 처박힌 나의 시선도 건져 올려졌다.
“그러는 도령께서는 허물없는 사이라서 입맞춤을 돌려주고, 달라붙어 치근덕대고 막 그럽니까?”
“나는 너라서 그런 것인데.”
다정한 손길은 턱끝을 돌아 입술을 두드렸다. 그러더니 손바닥 위의 홍옥을 집어, 내 입가로 가져왔다. 무어라 말할 새도 없이 벌린 입술 안으로 향긋한 과실이 미끄러졌다.
나는 그가 손수 잇새로 물려 준 홍옥을 떨리는 마음으로 씹어 먹었다. 그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꼭 제 새끼 돌보는 어미 새라도 되듯이 입술 언저리에 조금 묻은 과즙까지 남김없이 엄지로 훔쳐 냈다.
그 엄지는 맛이 고픈 기운혁의 혀로 되돌아갔다. 과즙을 사아악 훑는 혀끝이 붉었다.
“넌 아닌 모양이야.”
“저도 도령이 좋습니다.”
“…….”
“이리 저를 아껴 주고 챙겨 주시는데 좋을 수밖에요.”
떨리는 마음을 누르고 답했건만 그는 침묵을 남겨 두고 말이 없었다. 원하는 말을 들어 마냥 좋아할 줄 알았는데, 기쁜 티보다 앞서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 손가락을 두들겼다.
“버들아, 너는 너무 착해.”
“그다지 착한 편은 아닙니다. 잇속도 챙기고, 욕심도 부릴 줄 알고…….”
“그건 사람이라면 당연한 거지.”
“또 어린아이를 협박하기도 했습니다. 미행도 했구요. 뒷조사도…….”
무슨 말을 늘어놓든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물러나는 법이 없었다. 어쩐지 어머니 앞에서 비뚠 마음에 저지른 죄를 낱낱이 고하는 어린애가 된 기분이었다.
주절거리다 말고 개운하게 웃는 그를 힐끔 보았다.
“그러는 도령께서는 제 무얼 보고 착하다 단정하십니까? 어릴 적의 모습은 잊으시지요.”
“내 보기엔 그대로인데? 정에 약하고, 한없이 물러지고, 끝까지 의심할 줄 모르고.”
“제 사람에게만 그런 겁니다.”
“그럼 곁에 나만 둬.”
턱을 괴고 웃는 건지 마는 건지 모를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나 빤히 꿰뚫는 사내의 시선은 일상의 웃음이 없고 빗금 같은 냉기가 배어 있었다.
시름없이 반달 진 눈매에 용케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정면에서 마주한 적이 숱했으나 이리도 노골적이고 이질적인 시선은 처음이었다. 꼭 인간의 것이 아닌 듯한…….
나도 모르게 무릎에 놓아둔 손을 문질렀다.
“내가 널 아끼는 만큼 너도 날 아껴 주었으면 좋겠는데.”
“매사 염려하고 걱정하는 데도 모르겠습니까?”
“아니, 알아.”
다리를 느긋이 편 사내의 목소리는 연정에 취한 노랫말 같았다.
“단순한 염려인지, 그보다 더한 것인지를 알고 싶은 거지……. 무당의 피를 이어서 그러한가. 이리 빤히 보면 가끔은 속내가 읽히기도 하는데 버들이는 정말 모르겠네.”
아, 그러고 보니 여태껏 무당 딸로 알고 있었겠구나. 그가 내 정체를 모르고 있음에 안도해야 할지 죄스러워해야 할지 모르겠다.
비록 함께한 기간보다 이별했던 시간이 더 길지만 이제는 말해도 되지 않을까. 그에게 무언가를 숨기는 것은 그의 뒷조사만으로 끝나야 했다.
“저, 도령.”
할 말을 고르는 입술을 그는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의아함을 담은 눈길이 코를 타 넘어 눈을 맞출 적에, 혀 아래 고아 둔 말을 실토했다.
“사실 제 이름은 버들이 아니고, 홍가의 사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