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합방?”
“그러니까…….”
나는 귓불을 어루만지며 점잖게 헛기침을 했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건지, 알고도 떠보는 건지 아리송하다. 세상 진지하고 탐구적인 눈빛을 보니 설마 나보다 더한 무지렁이인가 싶은 생각이 들다가도, 설마 그럴 리 없지 않나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뒤따르는 것이다.
아, 그렇다고 내가 남녀의 색사니 염정에 빠삭한 것은 아니었다. 요희가 용수보 계집 아이들을 끼고 야시시한 토론을 하였을 때 나는 아는 바가 적어 얌전히 들었던 것이 전부였으니까.
해도 그 경험은 꽤나 값졌다. 이렇게 써먹는 걸 보면.
“가령 부부가 한쪽이 음기가 짙으면, 짝은 양기가 풍부해야 밀월이 오래가고 혼인 생활이 순조로우며 건강한 자손을 낳는다 해요. 서로에게 부족한 기를 덮으면서 재액을 피하고 복이 깃든다네요.”
체질에 대해 논하다가 돌연 주제가 남녀의 음양과 궁합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그는 이쪽에 더 관심이 있어 보였다.
“기운은 늘상 곁에 두고 다녀야 효과를 본다지 않아요. 약보다는 몸에 지니는 호신구가, 걸어 두고 다니는 호신구보다는 품을 수 있는 사람이 제격이지요. 늘 짝지처럼 붙어 다니기엔 성혼한 남녀만 한 관계가 없겠고요.”
“하면 나는 양의 기운을 가진 여인을 만나면 되겠구나.”
“그런 셈이지요.”
서로 몸과 마음을 보듬고 품어 줄 여인.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여인을 향한 그의 눈빛에 어린 기대심에 내 마음은 조금 가라앉고 말았다. 김칫국을 보태 실토하자면 나의 기운은 양보다는 음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사실 음양이니 무어니 개살구 같은 말이고, 내가 운혁과 맺어질 일은 꿈에서도 없을 테지만 말이다.
그는 작은 음조를 흥얼거렸다. 상상만으로도 좋을까.
돈도 재물도 명성도 신분도 다 제 편으로 둔 기운혁은 앞길이 창창한 젊은 사내였다. 나이 스물하나로, 밀국의 결혼 적령기보다 조금 늦은 감은 있지만 현재 그의 지위로 보건대 마다할 여인은 없으리라. 배꽃 같은 얼굴로 한번 웃어 주면 데려오지 못할 처자가 없겠고.
괜한 상상으로 물 먹은 바짓가랑이처럼 마음이 무거워진다. 나는 떨쳐 내듯이 화제를 돌렸다.
“재밌는 것은 요귀들도 인간과는 다른 음양오행을 타고난다는 것인데요.”
“응.”
“불에서 태어난 요귀는 전쟁통의 살의와 분노를 가졌고, 물의 요귀는 억울하게 희생당한 슬픔과 원망을 지녔습니다. 바람에서 태어난 요귀는 객사한 방랑자의 고독과 고향을 그리는 향수, 땅의 요귀는 부모 잃은 어린아이들의 영을 품고 있어 때로는 요살귀(嚙殺鬼)보다 잔인해지지요. 왜, 선악의 구별이 없는 아이들이 더 잔혹하다지 않습니까?”
무녀원에서 가르침을 받을 때 가장 먼저 깨우친 것은 요귀의 기질과 습성이었다. 요귀의 안에 깃든 억울함과 분노를 잘 달래 주면 때로는 봉마의 수고로움 없이도 쫓아 보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속사정을 알고 나면 요귀를 처치하기 망설여질 때가 있어요.”
“어째서?”
그가 자세를 고쳐 앉자 무르팍 위로 스치듯 닿는 팔꿈치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저 사람을 해치는 괴물일 뿐인데 망설일 이유가 있나?”
“그냥…… 그 안에 전쟁으로 타 죽은 사람들, 의지할 곳 하나 없이 타지에서 고독하게 죽은 이들, 죄 없는 아이들의 영혼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면요.”
“외려 기뻐할걸.”
“왜입니까?”
“죽어서도 하늘에 닿지 못하고 괴물이 되어 버렸으니 누군가 자신을 꺼내 주기를 바라겠지.”
물안개처럼 아스라한 목소리가 귓가에 스며든다.
그가 손끝에 힘을 주어 나를 잡아당겼다. 달의 인력에 속수무책인 해수처럼 내 몸이 당기는 대로 그에게 가까워졌다. 접촉한 건 손뿐이지만 숨을 받아 마실 만큼 가까운 거리인지라, 이유 모를 긴장에 발끝이 오므라들었다.
그는 허둥거리는 나를 안심시키듯이 잘 붙들어 안았다. 도독하게 튀어나온 사내의 목젖에 지그시 뺨이 눌렸다.
“버들아, 나는 아직 네 대답을 기다리고 있어.”
웅웅, 살갗을 타고 부드러운 음률이 진동한다. 정신을 깊숙이 빨아들이는 목소리였다.
“안 그래도 그, 말을…… 하려고…….”
지난한 고뇌의 끝에서 찾아낸 해답은 명쾌했다. 할 일을 팽개치고 구렁에서 허우적댈 성격도 아니지만, 어쨌거나 지금 당장 내 마음이 쏘아지는 방향으로 걸어가 보자는 것이었다.
요귀 퇴치는 퇴치대로, 기운혁은 기운혁대로.
“함께, 수도로 가겠습니다.”
세상은 깜깜하고 비는 쏟아지는데 운혁의 표정만 환히 개었다. 그 얼굴을 보자니 아흐레 동안 송장처럼 틀어박힌 사내를 웃게 만든 내가 뿌듯했다.
수줍게 귀를 물들인 그가 내 어깨를 쓰다듬었다. 두 눈에 별처럼 맺힌 것은 모자람 없는 기쁨이었다.
“진정?”
“따라가지 못할 이유는 또 무어랍니까.”
인생의 유일한 지침인 어머니를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은, 나는 저렇게 살지 말아야겠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자식과 남편을 잃고 울분 속에서 살았다. 그것만이 먼저 간 사람에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위로라도 되듯이 말이다.
그렇게 과거의 슬픔과 미래를 향한 불안으로 현재까지 채찍질해서야 남는 것은 무기력과 회한뿐이라는 걸 배웠다. 악다구니만 남았다고 그게 삶이 되던가.
나의 목표와 욕망은 두 갈래 길로 갈라져 있었다. 끝이 어찌 될지 모르는 마당에 진원의 말대로 이것저것 재서 무엇할까. 그와 조금이라도 함께할 수 있다면 기꺼이 그러고 싶었다.
나는 기운혁을 내 생에 찰나의 행복 같은 것으로 생각하기로 했고, 덜어 내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맺고 끊음이 확실해야만 출구가 보이는 선택이었다.
“아아.”
요요히 웃음을 흘리는 그를 따라 미소를 그렸다. 사뿐히 옆자리를 차지해서는 드세게 끌어안았다.
제 날개를 태우며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부나방의 내심이 이러할까 싶지마는. 나는 막 그 열에 취한 터라 훗날의 고통이나 후회 같은 건 뒤로하고 그저 운혁을 계속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지고 마는 것이다.
“한데 도령, 한 가지 물어도 됩니까?”
“무엇이든.”
“전부터 저와 닮은 듯 아닌 듯하다는 둥 했던 말은 무업니까? 설마하니 옛 정인을 못 잊고 제게서 찾으려는 것은 아니라 믿어요.”
내 말에 그는 쓸개를 받아먹은 얼굴을 했다.
“옛 정인? 그런 게 있을 턱이.”
오만상으로 말미암건대 허언은 아닌 듯싶고.
“참말이지요?”
봄꽃처럼 뺨을 물들이고 허리는 거지반 물에 담근 채 우리는 연인처럼 몸을 붙이고 앉아 있었다. 젖어 입느니만 못한 사내의 욕의는 제 구실하기 글렀다. 젖은 흙을 품은 것처럼 단단하면서 무른 가슴팍이 등 뒤로 버티고 있었다.
조붓이 맞닿아 작게 움직이는 감촉마저 고스란히 느껴졌다. 꼭 붙은 몸의 열기를 차디찬 빗물이 식혀 주었다.
“따뜻해, 버들아……. 이리 다정히 끌어안고 있으니 보듬고 살 정인이 이런 것일까 싶고.”
뜨겁다 못해 익어 가는 내 귀에 자비 없이 입술을 붙이고, 파롱하는 사내처럼 숨을 비비적거린다. 면역 없는 나를 알아보고 갈수록 얄궂어지는 것이다.
나는 한껏 취해 여려진 운혁의 눈꺼풀을 살살 쓸고 그 위에 살포시 입술을 붙였다 떼었다. 폭포가 게워 낸 수증기로 시야가 온통 흐렸다. 그 부윰한 수면 위로 일렁이는 괴괴한 그림자만 유독 선명했다.
나를 잡아먹으려고 안겨 드는 그림자를 보며 잊어서는 안 될 다짐을 새겼다. 좋다 한들, 이대로 한없이 연심에 절여지고 싶다 한들, 잡고 빠져나올 그루터기 하나는 남겨 두자고.
‘우리네 삶은 정박하지 못하고 방랑할 운명이니 떠나갈 때 무엇도 남기지 말고 무엇도 탐내지 말아라.’
늘, 언제나 그랬듯이.
* * *
팔려 가는 신부 꼴이 딱 이러하지 않을까 싶은 아침이었다.
“나으리, 언제든 또 용수보에 들러 주십시오. 열과 성을 다해 극진히 모시겠나이다.”
화려한 말과 수레, 가마의 행렬. 떠나가는 퇴마사를 향해 호헌이 오만 너스레를 떨었다.
“이것은 감사의 의미로 준비한 선물이온데…… 약소하나 퇴마사님의 앞날에 늘 광명이 깃들기를 염원하여 준비하였으니 부디 받아 주십시오.”
호헌이 넙죽 허리 숙여 건넨 것은 검은 부채였다. 서역의 검은 공작새 깃털로 엮어 만든 도곡의 특산품이자 귀족들이 자랑삼아 애용한다던 귀물이랬다.
흑선(黑扇)의 손잡이에는 때깔 좋은 금판이 반들반들 붙어 있었다. 거기에 연을 맺은 정인, 가족, 친우나 자식의 이름을 새기면 수호신이 되어 준다는 그럴싸한 미신 덕에 신력이라곤 조금도 담기지 않은 저 부채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단다.
물론 부채를 하나라도 더 팔아 보려는 상인들의 얄팍한 상술이었겠으나, 외관이며 재질이 가공할 값어치인지라 그러한 미신마저 나름의 설득력을 얻었다.
“하면 살펴 가십시오.”
기운혁은 쫙 펴놓은 부채를 감상하더니만 그것을 살랑살랑 내 옆에서 흔들었다.
여름이 다 끝나가지만 늦더위는 여전했다. 이마에 묻은 열기를 식혀 주는 몸짓이 남들 눈에는 정인을 비춰질 만큼 지극하고 또 다정하여. 지켜보던 용수보 사람들은 ‘그럼, 그렇지’ 하고 우리의 관계를 수긍하고 마는 것이다.
그가 나비처럼 사뿐히 사인교에 올랐다. 그 뒤, 화려한 구슬 장식이 꿰어 있는 붉은 채련이 내가 타고 갈 것이었다.
“버들아, 이리로.”
열흘 넘게 용수보에서 푹 쉰 기운혁은 수분을 담뿍 먹은 화초처럼 싱그러웠다.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 없는데.”
“왜?”
“과하십니다.”
도곡을 떠나 수도인 율성부로 향하는 내내 기운혁은 내 손에 무엇인가를 바지런히 들려 주었다.
꽃잎을 곱게 갈아 향초와 섞은 향낭, 달큰한 연유 과자와 설탕을 입힌 말린 과일, 알록달록한 다식, 왕후나 입을 법한 봉황문을 수놓은 비단, 수도의 여인들에게 입소문 난 비취를 박은 옥가락지.
“사람들은 이런 것들로 환심을 사던데.”
모두 다 그가 얼마나 들떴는지를 보여 주는 증거였다. 용수보에서 누린 것의 배를 호가하는 진귀품 속에서 나는 이마를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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