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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42/86)

42화

“스승님…….”

자꾸 ‘그놈’, ‘그놈’ 하시는데 말입니다. 대체 그 망할 놈이 무엇인지요? 죽어도 입 한 번 벙긋 안 하시니 속이 터져 나가는 쪽은 제자였다.

동자는 꺼져 가는 가슴팍을 재차 두들겼다. 스승이 두려워하던 한 가지란 것은 알겠는데 입 밖으로 내면 큰 화라도 입을 것처럼 구시니.

“그놈을 봉하지 못한 것이 한이야.”

“아차차, 스승님이 10여 년도 전에 그림 속에 봉하려던 것이 ‘그놈’입니까? 왜, 입 못 그려서 초를 쳤다는. 해서 이리 팔도 뜯기고 입도 찢어지셨다면서요.”

“그래, 입 속에 숨긴 간사한 요귀 송곳니 네 개를 깡그리 뽑아 버려야 했는데. 100년 전에도 저게 인간인지 요귀인지 모를 해괴한 기운을 뿜고 다니더니 어째 기운이 더 요사스러워졌어. 해가 갈수록 뒤죽박죽으로 섞여서는…….”

“아이고, 스승님. 보약이라도 한 첩 달여 드릴까요? 스승님 연배가 여든이 아니라 백여든이었답니까?”

노망난 노인의 식언쯤으로 여기는 제자에게 임영이 벌컥 목청을 돋웠다.

“그놈에게 물려서 그런다!”

“에엑, 하면 설마설마하니 100년 전에도 스승님께서 살아계셨다는 말이 참말이랍니까? 내 스승이 이리 대단한 귀인이셨다니!”

“이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 못 하는 소리가 없구나. 그건 그렇고 정녕 네 놈 자식 눈에는 저 여인의 정기밖에 안 느껴지더냐?”

“아무렴요.”

“배운 만큼 보인다던 옛말 틀린 것 하나 없다더니. 저 여인의 눈 말이다. 깨끗한 것과 별개로 단단히 마가 꼈어. 영혼 두 개가 섞여 내 몸이네 마네 싸우다가 제 명대로 못살다 요절하고 말 거다. 나이도 어린데 불쌍하게 되었다.”

“두 개요? 신병 같은 겁니까? 하면 다른 영혼은 무엇이랍니까?”

“모호해서 보이질 않아.”

남한테 관심 둘 분이 아니신데, 저 아래로 멀어진 붉은 머리카락을 노려보는 스승의 시선이 썩 편치 못했다.

“모르신다라. 제가 스승님을 계속 사사해야 하는지 의문이 드는데요…….”

“네 놈은 물에 처박으면 입만 동동 뜨겠구나.”

“한데요 존경해 마지않는 스승님, 혹시 저 여인을 아십니까?”

“모른다. 그건 왜?”

“꼭 아는 사람처럼 말을 하시길래.”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이 팔짱을 끼고 곰방대를 씹던 임영이 내키지 않는 투로 뇌까렸다.

“비슷한 사람은 안다만.”

그것이 누구냐고, 되바라진 제자가 묻기도 전에 스승은 미간을 종잇장처럼 짜부라뜨리고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 * *

용수보로 돌아왔을 때는 짙은 어둑발이 내려앉아 있었다. 기껏 토암산을 올랐는데 찾는 이는 없고 얻은 것은 임영 제자의 해괴한 눈썰미와 기특한 충심뿐이라니. 시간을 버린 기분이라 뒷맛이 영 떫었다.

투둑, 툭.

하산 도중에 조금씩 내리던 빗발이 어느덧 어깨 봉우리를 축축이 적셨다. 게다가 부슬부슬 흐르는 비가 옛 추억까지 끄집어 건지는데, 이 정도면 참 중증이 아닐까 싶었다.

무릿매골에 1년을 살면서 있는 줄도 몰랐던 외딴 숲. 사당의 저주인지 무언지 비가 대책 없이 퍼붓는 그 숲에서 기운혁과 길을 헤맸었지.

물론 그 뒤로도 무수히 많은 비를 여러 상황에서, 여러 사람과 함께 맞았으나 애틋하도록 생생한 기억은 그날 하나뿐이었다.

“마지막 가시는 날까지 퇴마사님 잘 모셔라.”

용수보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호헌이 내 어깨를 노천탕 쪽으로 밀어 넣었다.

앞을 가리는 뜨거운 연기 사이로 욕탕의 인공 폭포 소리가 천둥처럼 우르르 퍼졌다. 혼자서, 더군다나 비까지 퍼붓는 와중에 저 너른 탕을 재력으로 독차지할 수 있는 사람이 용수보에 달리 있을까.

그는 죄인을 호송하는 포졸처럼 날 붙들고 가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내 빈손을 보았다.

“퇴마사 나으리 드리겠다던 과실은?”

“내일은 새벽부터 나가 봐야겠습니다.”

“나 참, 내 그럴 줄 알았어! 왕의 다과상에 올린다던 과일을 귀족들이 가만 지나치겠어? 모이 앞에 던져둔 참새 새끼들마냥 쫓아가 진즉 털어먹고도 남았지!”

그는 성을 내며 과일을 빼돌린 귀족이라도 되듯이 날 노려보았다.

“퇴마사님께서는 언제부터 나와 계셨습니까?”

“반 시진 못 되었다. 아무래도 명일 떠나실 듯한데…….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이냐?”

“어쩌긴요. 그간 감사했다고, 차후 또 들러 주십사 큰절하며 배웅해 드려야지요.”

“쯔으, 하루라도 더 질기게 붙들어 둘 생각은 못 하고 소갈머리 없긴! 이렇게 돈 쓸어 담을 수 있는 기회가 어디 흔한 줄 알아?”

더는 돈줄을 붙잡아 둘 명목이 없어 수척해진 호헌이었다. 그는 볼 장 다 봤다는 듯 나를 퍽 떠밀며 기운혁에게 전달할 욕의를 들려 주었다.

사람의 물욕은 끝을 모르는 법이라지만, 기운혁이 이곳에 머무는 열흘 동안 식사며 약재값을 비롯해 악단이나 연극, 노름 등에 탕진한 유흥비가 산만 해 용수보의 물값을 죄 대었다고 봐도 무방할 지경이었다.

그만큼 뽑아 먹었으면 되었지. 한데 호헌은 암만 부족한지 사심을 덜 채운 얼굴로 성화였다. 저러다 몽땅 잃어 봐야 정신을 차리지.

나는 새 물내가 나는 욕의와 영건을 들고 돌 처마 입구로 걸어 들어갔다. 여물어 가는 가을바람의 심술이 제법 쌀쌀맞다.

아무리 수온이 뜨끈해도 밤공기가 차고 이리 비까지 퍼붓는데 굳이 야외에서 목욕을 즐길 필요가 있나. 참 취향 알다가도 모를 사내라고 생각하며 걷는데, 저 멀리 어둠에 파묻힌 검은 머리통이 보였다.

말갛고 뜨끈한 수면에 코까지 담근 운혁이 흔들리는 연잎처럼 허우룩하게 물에 잠겨 있었다. 돈 많은 양반 하나를 위해 이 늦은 밤 향긋한 감탕물을 데웠을 일꾼들의 노고야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무심한 뒤통수였다.

나는 그에게로 걸어가면서 마음을 굳혔다. 운혁을 따라 수도로 가자고. 암자의 동자에게 답신의 수신지로 기운혁의 보금자리를 대었을 때부터 끝을 본 고민이었다.

“도령.”

실상은 내 발걸음 소리만 들어도 알아챘으면서 불러도 요지부동이다. 아주 고집스럽게 시선을 정면에 두고 있다가 한 번 더 부르니 마지못해 내게 눈길 한 자락을 선심 쓰듯 나눠 주었다.

“야밤에 일꾼들을 깨워 부득불 온욕을 하셔야겠다니. 아주 세상이 도령 발아래 있는 것 같고 만만하고 그러지요, 예?”

웃으라고 가볍게 튼 농담조였으나 그의 입은 웃는 법을 모르는 것처럼 매정한 일자였다.

딴에는 지난날의 어색함을 덜어 내려는 노력이었는데 반응이 미적지근하니 농할 맛도 달아났다. 쌍그러니 돌아선 등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쿡쿡 아리는 것은 둘째고 부아가 치밀었다.

“도령.”

지금껏 잘만 들이댔으면서 느닷없이 내외하는 것도 아니고. 속 썩힌 나는 보이지도 않는 모양이지.

“저 다시 돌아갑니다. 여기 갈아입을 옷 두고 갈게요.”

무정한 반응에 똑같이 갚아 주려는 차 발길을 트는데, 물살이 급히 파도치는 소리가 들렸다.

“버들아.”

나는 회심의 미소를 안고 느긋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한데 양갓집 도령의 꼴이 참으로 볼만했다. 푹 젖은 머리칼이며 뺨이며, 대체 저러고 몇 시진을 눌어붙었는지 알 길이 없어 다가가니 기운혁이 비 웅덩이에 구른 강아지처럼 풀 죽어서 나왔다.

“가지 마.”

“진즉 그렇게 나오실 것이지.”

나는 물 자국이 남은 편편한 돌 위에 욕의를 내려놓고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그가 내게 잡아 달라는 듯이 한쪽 손을 내밀었다.

나는 물 젖은 손을 자연스레 맞잡았다. 조심스럽게 깍지 껴 잡은 커다란 손은 추녀 끝에 달린 고드름보다 찼다.

“내 몸 말인데.”

조용한 말소리가 퍼졌다. 제 몸 운운하면서 그는 차분한 눈길로 내 눈, 코, 입을 뜯어보았다.

“아무리 해도 따뜻해지지를 않아.”

“이러고 계시니까 그렇지요. 몸도 덜 회복되신 분이 탈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가을비를 고스란히 맞고 있습니까?”

하나 불행히도 내 말을 듣는 눈치가 아니었다. 기운혁은 한 손으로 반쪽이 된 수척한 얼굴을 덮었다.

그가 지금껏 주문한 약재와 약탕이 한결같이 온양이 목적임을 모르지 않았다. 하물며 가볍게 드는 찻잔에도 양의 성분을 띤 재료를 넣어 먹었으니.

재수 없게 불의 요귀에 걸려 체온을 빼앗기고 있다고 확신했는데. 그리고 봉했으니 해결된 일이라 여겼는데 아무래도 체질적인 원인이 아닐까 싶었다.

“그래도 네가 만져 주면 괜찮아져서. 신기하다고 생각하긴 했어.”

이슬 매단 속눈썹이 소박맞은 새색시처럼 처연할 건 무언가. 달이 풍덩 빠진 눈이 시선을 붙들었다. 나는 심히 안타까운 기분이 되어 그의 차디찬 손을 쓸어 만졌다.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도 음양오행의 영향을 받는다지 않습니까? 아마도 도령께서는 음의 기운을 갖고 태어나신 모양입니다. 좀 심하게 많이요.”

“내 몸도 너처럼 따뜻했으면 좋겠는데.”

“그리되실 겁니다.”

“너처럼 사람이 되고 싶어.”

“예?”

“팔도 따뜻하고, 배도, 가슴도, 뺨도…….”

“바른 치료법만 익히면 도령의 체질도 변할 것입니다.”

“어떻게?”

“음…….”

초조하게 제 손을 쥐락펴락하는 운혁의 걱정을 덜어 줄 겸, 나는 그가 앉은 반석 위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내 무르팍에 턱을 내려놓았다. 예나 지금이나 치대는 게 숨 쉬듯 자연스러운 사람이었다. 아흐레 동안 이어진 우리 사이의 묘한 거리감을 뒤끝 없이 잊은 모양이었다.

지금의 행동도 무의식적으로 나온 것일 뿐 사사로운 의미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동요가 덜 했다.

“사람의 기운이란 건 상당히 중요한 고려 사항이라서, 사주를 보거나 점을 칠 때도 필수적인 요소라 하더랍니다. 그 때문에 성혼 절차에서 으뜸으로 중요시하는 것이 가문보다 남녀의 기운인 것이고요. 성혼을 하면 자연히 기운이 섞이니, 서로 간에 넘치거나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 있지요.”

“어떻게 기운을 섞는데.”

“길일을 따져 합방할 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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