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사흘?”
“예.”
기운혁은 사흘 뒤에 수도로 떠날 거란다. 촉박한 일수를 남겨 두고, 나는 떠날 테니 너는 그동안 저와 함께 수도에서 호의호식할 것인지 용수보에서 남의 옷감이나 빨고 욕탕이나 닦으며 쥐꼬리만 한 푼돈 벌지 자알 생각해 보라는 매정한 뜻이었다.
“그리고 그 밤의 일은 잊어 주십시오.”
“잊으라고?”
“예. 그날 보신 것들 말입니다.”
말을 전달한 호위는 제 주인을 닮아 싸늘하고 가차 없었다. 마치 그가 틀어박혀 기행하는 까닭을 내게서 찾는 것처럼 표표한 눈이라니.
‘기운혁을 따라나서면 그 뒤로는 어찌 되는 것이지.’
나는 내가 뭘 두려워하는지 잘 알았다. 이대로 함께 손잡고 떠났다가 발도, 마음도 묶일까 봐 무서운 것이다.
남모르게 그의 뒤를 캐는 상황을 매기단할 때가 되었다는 걸 알지만서도 무녀원 쪽으론 길도 틀고 싶지 않아 하는 발이었다. 고생으로 부르튼 손은 그의 부들부들한 손맛을 한번 맛본 뒤 구들장처럼 기대고 싶어 했다.
‘돌아가기 싫지?’
마음속에 기생한 욕망이 다정하게 속살거렸다. 해악한 벌레는 마음을 간사스럽게 흔드는 재주가 있었다.
한참 전에 씻겨 나간 감촉인데도 나는 이부자리에 드러누울 때마다 운혁의 입술이 스치고 간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나를 번뇌로 처박은 양갓집 공자께서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느라 두문불출하는지 궁금했다.
아흐레하고도 이틀이 더 지날 무렵에는, 나는 그 야속한 얼굴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 신세였다. 그때보다 더 살이 내렸으면 어쩌지 싶어 염려스럽건만. 상대는 고작 호위 따위나 보내서 의사를 전달한다.
‘설마 그날 충동으로 입을 맞춘 걸 후회하고 있진 않겠지.’
서툴게 각자의 자리에 입술을 문대고 며칠 동안은 허허한 짝사랑이 아니구나 싶어 들떴으나 그도 잠시, 냉전 상태가 지속되자 기분이 까라지는 것이다.
내 얼굴 보기가 싫으신가?
분위기에 끌려 벌인 짓이라면 절망스럽다. 게다가 호위 무사가 ‘그 밤의 일은 잊어 달라’는 말까지 하고 갔지를 않나. 시키지도 않은 말을 전달할 린 없고, 그렇담 그건 기운혁의 뜻이겠지.
기쁨은 찰나고 심란함은 오래 이어졌다. 농락당했다고 단정 짓기에는 나를 끌어안았던 사내의 얼굴이 지극히 애틋했다. 그는 망설이다 내 이마에 보드라운 입술을 찍어 누를 때까지 참 다부지게도 껴안고 있었다.
사사로운 감정은 독이라던 진원의 말이 떠올랐다. 이유를 물으니 얻는 만큼, 때로는 얻는 것보다 더 큰 것을 잃어야 하기 때문이란다. 당시에는 이해를 못 했으나 지금에 이르러 감이 잡혔다.
이렇게 끙끙대다 골병 앓는 건 나일 것 같아서 자리를 털고 바깥으로 나왔다.
“저, 버들아. 너한테 서신이 도착하였는데.”
내가 여인임을 알고부터 겸연쩍게 구는 요희가 대추나무 향이 풍기는 종이를 내밀었다. 이렇게 내 앞에 서기까지 큰 용기가 필요했는지 힘을 꾹 준 손끝이 옴팡지게 오므라져 있었다.
피차 마주치기 불편한 상황. 용건만 받고 돌아서려는데 그 애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있잖아.”
“왜?”
“내가 미안해.”
“갑자기?”
“너 곧 떠날지도 모른단 말을 들었어. 이 말 꼭 하고 싶어서.”
그 뒤에 무슨 말을 덧붙이려는 듯하다가 요희는 풀 죽은 어깨를 달고 돌아섰다. 그날 요희가 하려던 말이 함께 저녁을 들자는 것임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요희는 처음에 내가 남장하고 용수보에 숨어 들어온 여인임을 알고 자지러졌다가, 내게 다가오지 못하고 내 뒷말을 씹어 삼키는 동료 일꾼들 속에서 갈팡질팡 숨어 있다가, 나중 가서는 내가 퇴마사의 총애를 입은 것도 모자라 농 속에 감춰 둔 꿀단지처럼 수시로 불려가는 걸 알고 질투에 눈이 멀었다.
그리고는 나를 험담하던 무리 속에서 함께 욕을 끼얹다가, 곧 부끄러움을 느끼고 며칠 전부터 멀리서 내 주변만 달팽이처럼 맴돌았다.
전말이야 어찌 됐던 더는 볼일이 없는 사이였다. 처음 잘 대해 준 것에 대해 고마운 마음은 있으나, 요희가 신경 쓰는 만큼 나는 그 애에게 신경을 주고 있지 않았다.
“어딜 가느냐?”
신 뒤축을 구겨 신는 내게 호헌이 험상궂게 물었다.
“잠시 시전에 다녀오겠습니다.”
“무슨 일로? 가뜩이나 분위기가 바닥을 치다 못해 굴을 파는데 너까지 사라지면, 어?”
그의 말은 퇴마사님이 단단히 골난 상태인데 전담 시종인 네가 상주해야지 감히 어딜 싸돌아다니느냐 묻는 것이다.
“아무래도 그분께서 도곡에 싫증이 나신 듯하여서요. 때마침 보국에서 귀한 과실이 들어왔다고 하여 구해 볼까 합니다.”
“아, 그 선홍색 과일. 이름이 홍도랬나. 그걸 퇴마사님께서 먹고 싶다 하시더냐?”
“그런 말은 없으셨지만 밀국에서 쉬이 나지 않는 과일이니만큼 진상하면 좋지 않을까요.”
“그래, 그럼.”
기운혁 핑계를 대니 단박에 외출 허가가 떨어졌다. 나는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허언을 한 뒤 곧장 서신을 안고 토암산으로 향했다.
* * *
요희가 건넨 서신은 진원이 수소문해다 준 임영의 거처가 적혀 있었다. 이토록 중요한 편지가 마음 고쳐먹은 요희에게 떨어져서 다행이지, 나를 질시하는 다른 애의 손을 거쳤다면 일이 날 뻔했다.
답신에 딸린 지도를 손가락으로 짚어 가며 오른 산길의 끝. 닳고 닳은 초라한 암자가 무너질 듯 서 있었다.
“누구십니까?”
마당을 비질하던 불목하니가 인기척에 이끌려 잔디 풀 같은 머리를 들었다. 항아리처럼 통통한 얼굴엔 찌를 듯한 경계심이 옹골져 있었다.
“임영 어르신을 만나고자 찾아왔는데.”
“스승님께선 출타 중이신데요.”
“출타라니. 언제 돌아온단 말씀은 없으시고.”
“예, 한데 뉘십니까?”
“그분의 제자와 친분이 있는데 몇 가지 여쭤볼 것이 있어서 그런다.”
둘러댈 말이 부족해 기운혁과 막역지우라고 얼버무렸다. 그 노인이 진정 기운혁을 가르쳤다면야 틀린 말은 아니지 않나.
“제자분과요?”
고개를 모로 기울인 어린 동자의 눈발이 한결 수굿해졌다. 동자는 긴가민가하면서도 낯을 바꾸고 공손하게 양손을 모았다.
“하면 제자분의 함자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기 도령이라고 전하면 알아들으실 게다.”
“예, 알겠습니다.”
“어르신께서는 오래 자리를 비우신 모양이지?”
내가 막힘없이 술술 대답하니 이제는 깍듯이 모셔야 할 귀빈 대접이다. 동자가 다람쥐처럼 손을 모으고 제 스승 대하듯 예를 갖추며 이르기를,
“스승님께서 언제 귀가하실지 알 수 없어 확답은 어렵지만 예까지 왔으니 차라도 한잔 들고 가시렵니까?”
하며 나를 호젓한 대청으로 손수 안내했다.
잠시 뒤 아이가 내온 달게 익은 오미자차를 한 모금 마시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이는 수련 기간이 짧았는지 임영에 대해 아는 바가 적었다. 스승이라는 호칭을 못 들었다면 허드렛일하는 종으로 여겼을 것이다. 하는 짓을 보아하니 영 틀린 말은 아닌 듯 하나.
“그림이 많구나.”
“예, 스승님께서는 화폭에 아름다운 정취를 담기를 즐기시지요. 한번 둘러보시겠습니까?”
내뱉는 어조에 임영의 제자된 자로서의 자부심이 묻어 있었다. 어서 스승의 일품 서화를 자랑하고 싶어 안달 난 기색으로 종종걸음치는 걸 느긋이 뒤따랐다.
암자의 처마에 부적처럼 검고 누르스름한 족자들이 빨래처럼 나풀대고 있었다. 임영의 수인이 찍힌 묘한 그림이 시선을 잡아챘다. 떨어지는 은행이나, 우물가에 늘어진 괭이 따위의 한적한 정경을 담은 것은 소수고, 기괴하여 오래 눈 마주치기가 쉽지 않은 것들이 태반이었다.
솔나무 밑 기괴한 그림자, 을씨년스러운 정자 앞에 굽은 등을 보이며 돌아선 팔 잘린 노옹.
저것을 아름다움으로 포장하는 동자의 말이 스승을 향한 아부인지, 남다른 심미안에 근거한 찬양인지 의심스러워졌다.
한데 저 그림 끄트머리에 찍힌 수결이 어딘가 익숙하단 말이지.
“아무래도 오늘 만나 뵙긴 어려울 것 같구나.”
“하면 어디로 소식을 전하면 될까요?”
때아닌 그림 구경도 시들하고, 찻잔마저 다 비울 적에 운을 띄우자 동자가 넌지시 물었다. 나는 고민하다 일전에 기운혁이 일러 준 수도의 거처를 댔다.
“율성의 오가 거리요?”
“왜, 아는 곳이더냐.”
“아닙니다. 모쪼록 헛걸음하게 하여 죄송합니다. 스승님께 꼭 말씀 전해 둘 테니, 살펴 가십시오.”
싱겁게 응수하는 아이를 뒤로하고 어둑해진 산길을 타 내렸다. 무거운 먹구름이 주홍빛으로 가라앉은 해를 잡아먹고 산마루를 덮었다. 아무래도 곧 비가 올 모양이었다.
* * *
아이는 멀어지는 여인의 뒷모습을 보다가 내려 둔 빗자루를 조용히 집었다.
“스승님.”
낮게 소리 죽인 동자의 목소리가 마당에 수북한 낙엽 위를 가로질렀다.
“왜 숨으신 겁니까? 저 여인에게 이렇다 할 사특한 기운이 느껴지질 않았는데요.”
의아함이 똘망똘망 뭉친 시선은 팔 잘린 노옹의 서화에 닿아 있었다. 그러자 그림 속 노인이 그륵그륵 움직이는가 싶더니 미적대며 정자를 돌아 다가왔다.
주름진 손이 서화의 가장자리를 불쑥 짚더니, 곧 그림 속에서 노인이 구르듯이 빠져나왔다.
“그러니 네가 아직 멀었다는 뜻이다.”
“착각이 아닙니다! 개울처럼 맑은 여인의 눈을 스승님께서도 틀림없이 보셨을 텐데요?”
“하기야 ‘그놈’의 요기는 겪어 보지 않는 한 알아차리기가 어렵지.”
임영이 곰방대를 찾아 물며 노쇠한 어깨를 두드렸다. 눈치 좋은 동자는 재빨리 타구를 가져다주었다.
세상에 두려울 거라곤 하나뿐이라며 호언장담하던 스승님께서 저 여인이 다가오는 기운을 50리 바깥에서 느끼더니 물던 곰방대도 떨어뜨리고 잽싸게 서화로 숨어 버렸다.
해서 저 여인이 스승이 두려워하는 요귀인가? 싶었더니 글쎄, 눈은 정기로 가득하고, 신력이 또렷하며, 눈매는 반달처럼 고운 무녀가 아닌가.
“머리카락이 붉은 것을 보니 소문난 사왕의 마지막 무녀인 듯한데요.”
“저 여자에게서 ‘그놈’의 요기가 들러붙어 있어. 구역질 나도록 칭칭 얽힌 것도 모자라 발목까지 싸고돌고 있다, 이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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