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물끄러미 나를 뜯어보는 운혁은 잠깐 말이 없었다. 민망해진 내가 어제의 화제를 끌어왔다.
“도령께서 수도 양반가의 양자로 들어갔다 하셨지요. 그러면 대감께서는 그날…….”
“죽었어.”
그의 표정은 씁쓸한 듯 아닌 듯, 서글픈 듯 만 듯 하였다. 무어라 위로를 건네야 할지 알 수가 없어 운혁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려 주었다.
“용수보에 온 목적이 달리 있습니까?”
그는 대답 대신 제 옷을 풀고 가슴 윗부분에 난 화상 자국을 드러냈다.
“이곳에 좋은 약탕이 있다 들어서.”
“요귀에게 당한 상처입니까?”
“아흐레 밤 여기에 나타날 거야.”
그는 자신을 상처입히고 달아난 요귀를 마저 봉하고자 이곳에 왔다는 것이다.
나도 뭐라도 거들어야 하는 건 아닌가 싶은데 그러려면 내가 사왕의 무녀임을 밝혀야만 했다. 하나 되찾은 추억 속에 오물을 끼얹기 싫었다.
“위험한 놈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 정도의 상처를 낼 정도면 꽤 성가실 듯싶은데…….”
“예나 지금이나 걱정이 많은 네 그런 점이 좋아.”
“걱정이 될 수밖에요.”
“닮았어.”
“누구와 말입니까?”
“닮지 않은 듯도 하고.”
“그러는 도령께서는 예나 지금이나 이상한 소리 툭툭 던지시고. 변함이 없으십니다.”
나를 대하는 기운혁의 태도는 시종 다정했다. 어렸을 적 거리낌 없이 달라붙을 때처럼 내 어깨나 머리카락 따위를 건들고 갔다. 내 시선은 식어 가는 찻잔을 배회하였고, 그는 내 옆에 딱 붙어 입을 놀렸다.
무녀원에서 키운 건 경계와 불신이었다. 그 방벽이 한 사내의 손짓과 말에 허물어지는 것을 실감한다. 사실은 그날 죽이지 못했던 것이다. 애당초 연모를 밟아 꺼뜨린 적이 없으니 임자를 만나 불붙는 것도 순식간이겠다. 그와 만난 지 고작 닷새 만에.
보석처럼 파묻어 둔 연정의 추억은 질기고 끈덕졌다. 상대는 가리면서 상황은 가리지 않았다.
그 밤, 나는 진원에게 보내는 서찰을 썼다. 알아보니 요귀가 아니었다고, 엄한 사람을 붙잡았다고 쓰려다가 내용을 바꾸었다. 보기에 의심 가는 점이 없으나 당분간 시간을 두고 지켜보겠다고.
귀가를 늦출 핑곗거리였다.
* * *
기어코 기운혁이 들어 버렸다.
그가 떠날 시일은 다가오는데, 기껏 곱게 치장해서 보낸 계집은 옷차림 하나 흐트러지는 법 없이 단정히 방을 나오니, 안달이 난 용수보의 주인장이 나를 끌고 가 무어라도 해 보라며 윽박지른 것이 화근이었다. 마침 뒤뜰을 거닐던 도령이 쩌렁 울리는 고함을 듣고 만 것이다.
“호헌이 원하는 게 이런 걸까?”
그다지 알고 싶지 않은 용수보 주인의 이름은 호헌이었다. 운혁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내 등을 슬며시 끌어안아 보았다.
“말해 봐, 그렇지? 이런 것이지.”
이번엔 작정하고 허리를 간지럽힌다.
“우리가 이런 걸 하길 바라서…….”
입술로 내 목깃을 물고 은근히 잡아당기는 척하는 건 덤이었다. 하마터면 놀라 다부진 어깨를 철썩 때릴 뻔하였다.
“저, 도령.”
“응?”
“어디서, 어디서 이런.”
요망한 짓거리를 배웠느냐고 물으려다 어제 일을 상기하고 입을 다물었다.
‘예나 지금이나 걱정이 많은 네 그런 점이 좋아.’
‘걱정이 될 수밖에요.’
‘닮았어.’
‘누구와 말입니까?’
‘닮지 않은 듯도 하고.’
4년이다. 그동안 정인을 품었을 수도 있고, 오며 가며 여인들을 거치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미색도, 신분도, 재물도 부족함 없는 사내인 것을, 성년이 되고도 여인 한 번 끌어안아 보지 못했을까.
혹 이별하고 잊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어찌하나. 만약 사실이라면 나를 달게 어루만지는 행동의 이유는 무엇일까. 묻는다고 이실직고할 기운혁도 아니겠으나, 그의 입에서 무엇이 나오든 듣기 꺼려졌다.
그는 허리를 감은 팔을 풀고 꿀 녹여낸 목소리를 내 귓가에 발랐다.
“진심이 느껴져?”
“……농이 심하십니다.”
팔등으로 밀어내니 그는 하하, 웃는 시늉을 내곤 미련 없이 허리를 풀어 주었다.
숨죽여 맡던 어릴 적 체취며 머리통 하나는 더 커진 키, 굵직한 손목이나 너른 어깨 따위의, 확연히 사내다워진 몸태와 여전히 곱상한 용모까지 쓸데없이 세세히 보여서는 두 눈을 못살게 굴었다. 적나라한 변화에 속이 다 울렁인다.
운혁은 열일곱 때도 또래보다 키가 월등한 편이었는데, 좀 자라는 듯하다 3년째 그대로인 나와 달리 그의 눈높이만 또 껑충 멀어져 버렸다.
문득 그의 눈에 비친 나는 어떨지 궁금하였으나…… 역시 불필요한 잡념이겠지.
“호헌 그자는 속이 시커먼 인간이니 신경 쓰지 마세요. 이상한 오해를 하는 것이니까요.”
“버들아, 목이 빨개졌어.”
“…….”
“어릴 땐 귀를 물들이더니.”
애써 모른 척하려는데 콕 집어 언급한다. 진묘한 것 보듯 들여다보는 눈길이 온화하다. 이리 낫낫하게 굴다가도 다른 이들 앞에 서면 대책 없이 서늘하고 가혹해진다. 실상은 돈을 꾀하고 달려든 이들을 향한 것이지만.
관심 좀 적선해 달라 애걸복걸하는 사람들을 죄 밀치고 내게만 살갑게 구는 운혁이 싫을 수가 없었다.
기운혁은 호헌에게 엽전이 두둑이 담긴 돈궤를 내렸다. 내게 입힌 옷이 몹시 곱다는 하찮은 이유로 기어코 또 사치를 부린 것이다.
저 욕심이 덕지덕지 묻은 영감이 그 많은 돈을 받았다는 게 마뜩잖았으나, 이후 놈이 나를 뒤뜰로 끌고 가 관아로 처넣겠다며 협박하는 일은 다시 없었다.
“도령, 한데 손이 왜 이렇게 차십니까?”
운혁은 내게 시중을 들게 하지 않았지만, 일단은 종노릇 중이니 이따금 수발들 때가 있었다. 막 환복한 그의 소매를 접어 주는데, 피부가 한겨울 냇가보다 찼다.
“퇴마 도중 부상을 입어 정양 중이라고 하셨지요. 요귀의 독기라도 서린 것입니까?”
벌겋게 부푼 흉측한 화상 자국이 떠올랐다.
요귀에 당한 증상은 제각각이나 개중 불에서 태어난 요귀들은 사냥감의 체온을 빼앗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들도 있었다. 불을 뿜는 놈들이니 운혁의 어깻죽지에 남은 화상 자국은 사투의 흔적일 테고, 급이 비등비등했기에 결딴내지 못하고 서로를 난도질하다 끝났을 것이다.
요귀는 한번 품은 원한을 잊지 않는다. 몸에 저렇게 큰 상처를 낸 요귀인데 혼자 상대하게 놔둬도 되는 걸까. 마음이 불안으로 수런거렸다. 게다가 근래의 모습을 보건대 지금도 그는 열을 빼앗기는 듯했다.
어쩐지 그가 매일같이 주문하는 약탕은 몸에 열기를 넣어 주고 피가 잘 돌게 하는 효능이 있는 것들이더라니.
“아마도?”
“한데 이리 태평해도 되는 것입니까?”
나는 그의 상처에 약초를 얹어 주며 근심을 표했다.
“지난번 아흐레라고 했던 날도 멀지 않았습니다. 무녀들도 전투를 보름 앞둔 시점부터 철저히 준비를 시작하는데, 제단이라도 차려야 하는 것 아닌지요.”
“괜찮아.”
걱정으로 근질거리는 나와 다르게 기운혁은 고민을 모르는 낯이었다. 어루만져 주는 손길에 기분 좋은 태를 내며 뺨을 비볐다. 끙끙 앓는 내 속도 모르고.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왜?”
“요귀가 습격해 올 것을 아는데, 이리 무방비하게 있으시다니요.”
엿새째였다. 세 밤밖에 남지 않았는데도 운혁은 제의 도구도 뭣도 없고, 날밤을 까고 부적을 쓰는 것도 아닌데다 봉인진을 위한 제 피를 모아 두지도 않았다. 급 높은 요귀를 상대하려면 진이나 부적의 개수도 그만큼 늘려야 할 텐데.
그러다 문득 진원의 말이 떠올랐다.
‘퇴마하는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여 주지 않는다더군.’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걸까.’
나는 마음 편히 있을 수 없었다. 뿔난 요귀들이 얼마나 난폭해질 수 있는지 몸소 겪지 않았나. 나는 여전히 어머니의 예언에 묶여 있었다. 사실은 열일곱 살에 죽을 운명이 아니었을까?
고민으로 하룻밤을 꼬박 새우고, 결국 참다못해 내 치마폭에 쌓인 도령을 질질 잡아끌어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마음 같아서는 직접 나서서 돕고 싶지만 신분을 감추고 있는 신세이니 다른 방법으로 원조할 요량이었다.
“불의 요귀는 물로 제압하면 되니 용수보는 최적의 장소입니다.”
“응.”
대답은 설렁설렁. 기운혁은 옆에 붙어 서서 제 일이 아닌 것처럼 무신경이 발목만 흔들었다. 두 밤이 남았을 때에는 내 닦달에 못 이겨 느적느적 먹을 가는 시늉을 했다.
“도령께선 어떤 식으로 봉인을 합니까?”
“먹어.”
“봉인진을 그린다는 뜻입니까?”
수련 무녀 시절 다양한 방법의 봉마술을 펼치는 무녀들을 만났었다. 날 때부터 신을 받고 태어나지 않는 퇴마사들은 도구를 이용하기도 하고, 실이나 족보, 구슬 따위의 기물을 이용해 가두기도 하였다. 사당 같은 특정 장소로 유인하여 서낭신의 힘을 빌리는 경우도 왕왕 있고.
여하간 먹힌다는 의미는 봉인진에 삼켜진다는 뜻이려니 하였다.
“좋습니다. 요귀는 사람 많은 곳을 질색하니 정체를 숨기고 숨어들 테지요. 사람으로 변하거나 불 속에 모습을 감추고 나타날 겁니다.”
“골치 아프게 되었네.”
“1층에 지하수를 끌어다 쓰는 거대한 탕옥이 있으니 그리로 유인하세요.”
필요한 봉마진이 두 개. 유인용과 봉마용. 요귀는 통상 인적 드문 새벽 사이에 쏘다니니, 어떤 식으로 숨어들지 훤했다. 하여 준비만 하면 되었다.
기운혁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호헌을 시켜 자시부터 인시까지 누구도 1층에 얼씬거리지 못하게 하였다. 일꾼은 별관에 묶어 두고, 손님들의 출입을 통제하였다. 그리고 용수보 입구부터 봉인진을 그릴 욕탕까지 작은 등불을 매달아 두도록 시켰다.
욕탕 주변에 덧문을 다섯 개 정도 달고, 부적을 서른 장 매달아 두었다. 그렇게 이틀이 쏜살처럼 흐르고 마지막 밤, 바닥에 그릴 두 개의 봉인진을 그리는 작업만 남았는데.
투둑.
기운혁은 서슴없이 제 팔뚝을 칼로 그었다.
“무얼 이리 많이 도려냅니까?”
서너 방울이면 충분하니 엄지를 찔러도 될 것을. 넘치도록 팔뚝을 타고 철철 흐르는 피에 나는 기겁하고 말았다. 진을 처음 그리는 사람처럼 무식하게 많은 피를 쏟아 내는 그는 정작 고개를 기울이고 묻는 것이다.
“왜. 피를 내야 한다면서.”
*****************************************************
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http://novelagit.xyz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