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하여 확신했다. 안일하게도 사왕의 짐작이 맞았다.
감히 어떻게 죽은 기운혁의 시신을 뒤집어썼는지는, 또 무슨 운명의 장난처럼 도령과 내가 엮였는지 모르겠지만, 야료를 부릴 생각이라면 단단히 실패했다. 이 자는 요귀임이 틀림없었다.
느껴보지 못한 분노가 들끓었다. 내 수련이 부족한지 상대에게서 여전히 요기라곤 느껴지지 않았으나 일단은 사람 속을 뒤집는 저 매끄러운 살가죽을 벗겨 본체부터 뜯어내야 좀 진정이 될 것 같았다.
“나를 죽이려고?”
여유가 사라지고 상처를 후벼 패인 사람처럼 그가 나를 바라보는 순간, 내 팔에 묶인 바람의 결이 일부 흩어졌다. 어림없다는 듯 재차 끌어모았다.
야광주처럼 시퍼런 빛을 뿜던 그의 눈알에 먹빛이 섞이고 명도가 낮아졌다. 내가 기억하던 감파란 눈동자가 틀림없는데. 내 마음을 물렁하게 만드는 애처로운 눈빛까지 기운혁을 빼어다 박으니 이루 말할 수 없이 괘씸했다.
나는 그의 목덜미를 휘어잡아 쓰러뜨렸다. 죽어서까지 더러운 요귀에게 농락당한 운혁의 가엾은 육신을 생각하니 치가 떨렸다. 손날을 검처럼 그의 턱 밑에 가져다 댔다.
“헛소리 집어치우고 정체를 밝혀라. 사특한 요귀야.”
“버들아.”
그가 부드럽게 불렀다. 드러누워 멱살을 잡힌 채 손을 뻗어 내 허벅지에 자연스럽게 올리니, 그 역겨운 짓거리에 소름이 끼쳤다. 즉각 무릎으로 쳐 내고 그 주제 모르는 손바닥을 바닥에 박았다.
“닥쳐. 네가 기 도령의 꼴로 돌아다니는 걸 보니 필히 그를 아는 모양이구나. 고하라. 무릿매골에서 기어 나온 요귀인가.”
“나야.”
“무…….”
“기운혁. 이름까지 줘 놓고서 왜 기억을 못 해.”
기운혁. 도령과 나만이 아는 이름.
“거짓말.”
“무엇이.”
“네 놈이 뱉는 모든 말이 거짓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괴물은 눈에 띄게 동요를 보였다. 사납게 눈썹을 구기고, 존재를 부정당한 사람이 지을 수 있는 모든 표정을 내 앞에서 보였다.
내가 어쩌나 보려고 당해 주고 있었나. 그가 내 무릎을 잡아 밀치려고 했다. 바람으로 억눌러 놨는데 그 바람을 상쇄하는 힘이 그에게서 살처럼 뻗어 나오고 있었다.
“어째서 거짓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왜, 내가 괴물 같아? 죽은 줄 알았는데 다시 네 앞에 멀쩡히 나타나서, 응?”
허벅지 아래에 닿는 가슴팍이 단단하였다. 요귀의 피육처럼 돌기가 붙었다거나, 냉하고 축축하거나, 썩은 고목처럼 속이 비어 있지 않다.
단 한 번의 기억으로 잊을 수 없게 된 그 단단한 감촉은 인간 사내의 낫낫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
“너는 분명……!”
“그건 너의 상상이고, 지금 네 앞에 있는 내가 실재 아니겠어.”
“그렇다면 넌 날 어떻게 알아본 거지? 대답해라.”
4년 전과 지금의 나는 비슷한 듯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이목구비야 변함없다지만 젖살이 빠져 인상이 달라진데다 하물며 머리카락의 색도 달라졌다. 사왕의 비호 아래 더는 붉은 머리를 숨기지 않고 돌아다녔으니.
나는 여전히 놈을 믿을 수 없어 손에 쥔 목깃을 놓지 않고 윽박질렀다. 그는 대답 대신 손을 뻗어 소름이 쭉 돋도록 내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내려가더니 똑같이 내 목깃을 잡아 벌렸다. 그 안에서 목줄에 걸린 홍보옥을 빼냈다.
“여태 갖고 있었네.”
마침내 내 바람이 완전히 힘을 잃었다. 썰물처럼 맥없이 빠져나가 발치를 뒹굴다 흩어져 버렸다. 답답한 내실에 난데없이 몰아치던 바람은 그의 곧은 머리칼을 잔뜩 흔들고 날아갔다.
나는 말을 잃었다. 숨을 죽이고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원수라도 되듯 벽수, 아니 기운혁을 파낼 것처럼 뜯어보았다. 팔을 뻗어 우악스레 그의 턱을 붙들었다. 그는 피하지 않고 얌전히 내게 잡혔다.
얼굴이 이리저리 돌아가고 콧날이 잡아당겨지고, 무람하게 뺨을 더듬고 검은 머리카락을 뽑는데도 불쾌한 기색 없이, 간지러울 땐 움찔거리기까지 하며 나의 취조를 버텼다.
나는 기가 막혀 도망치듯 그에게서 멀어졌다.
“말도 안 돼.”
“내가 단 한 사람에게만 준 것을 차고 있는 것도 모자라 이름까지 겹치니 우연이 아니란 걸 알았지.”
나는 사색이 되어 손을 떨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목적이 무엇인지조차 헤매다가 손을 꽉 덮은 온기에 정신을 차리고 나니 그가 성큼 가까워져 있었다.
한쪽은 예기치 못한 해후에 즐거워하고, 다른 한쪽은 여전히 혼란함에 잠겨 있었다. 그는 황망히 주저앉은 나를 끌고 병풍 안으로 데려갔다. 있는지도 몰랐던 정갈한 다과상과 마주 본 방석 두 개가 이질적이었다.
“그간 어찌 지냈어?”
몸소 나를 비단 방석에 앉히고 차를 따라 주며 반갑게 이것저것 묻는다. 내가 느끼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복잡한 심정에 비해 기운혁의 얼굴에 덧씌워진 감정은 반가움 하나였다.
‘하기야 상대가 죽었다고 믿은 나와는 느끼는 감상이 다를까.’
죽다 살아난 자치고 고생 없이 편히 지낸 듯한 얼굴은 덤이었다.
“도령께서는요.”
“이름을 불러 줘야지.”
“……운혁.”
“내가 얼마나 외로웠는 줄, 알아?”
그러면서 내게 팔을 뻗는다. 반가워 얼싸안기라도 하고 싶은 눈치이지만 나는 자세한 설명을 듣기 전까진 아무것도 내어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분명 강의 요귀에게 잡아채여 파도로 빨려 들어간 그였는데, 어떻게 살아남았으며 그간 뭘 하며 살았는지. 질문을 쏟아 내며 그의 면전에 손바닥을 들이댔다. 포옹을 거부당한 그가 눈썹을 찡그리며 멈칫한다.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지.”
“그런 말로 모든 게 설명되리라 생각하십니까?”
“그럼 무얼 듣고 싶은데.”
그는 세세한 사정엔 입을 다물었다. 여북 고생스러웠으면.
나 역시 누군가가 지난 4년의 안부를 물었다면 부득불 대화를 피할 것이기에 운혁이 말하고 싶어 하지 않은 것까지 파고들 생각은 없었다. 무녀원의 생활은 쉰내가 나도록 곱씹어도 좋은 기억이 없으니.
“하면 어쩌다 퇴마사가 된 것입니까?”
“스승을 찾아갔어.”
“임영 말입니까?”
생각지 못한 이름이었다. 그의 얘기인즉,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으나 가진 것이 없어 몸을 의탁할 곳을 찾다가 옛 스승을 찾았다고 한다. 어찌저찌 함께 지내다, 그의 밑에서 봉마술을 익히고 업으로 삼았다고 한다.
“임영이 퇴마사였습니까?”
“과거에는 그랬지. 지금은 아이들이나 가르치는 신세지만.”
“그 스승이란 자가 도곡 출신이라 하지 않았나요. 하면 이곳에 거하시겠네요.”
“그건 모르겠어.”
스승 밑에서 2년 못 되게 배우고 출가하여, 찾아뵙지 못한지도 2년째라고 하였다.
“너는 어떻게 지냈어?”
“어머니 약값을 벌기 위해 용수보에서 단기 일꾼으로 자리를 얻어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도곡에 오래 머무를 것 같지는 않아요.”
사왕의 개가 되었다는 것까지 밝히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와 좀 더 이야기를 나누다 방을 나왔다. 그는 아직도 제가 준 홍보옥을 달고 다니는 것에 퍽 감동한 눈치였고, 난 여전히 귀신에 홀린 듯하였다.
‘그렇다면 어머니의 예언이 틀린 것인가. 죽다 살아났으니 반만 맞은 것인가.’
진원이 수상하다며 조사한 이가 기운혁이라는 사실 역시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버들아!”
1층으로 내려가니 소문이 일파만파 퍼져 있었다. 요희는 내게 와락 달려들어 퇴마사와 밀폐된 방에서 단둘이 무엇을 했느냐고 꼬치꼬치 따져 물었다.
“말 상대.”
“세 시진 동안 말 상대를 해?”
“허언이겠지!”
다른 여자애들까지 달려와 사달이었다.
시간이 그만큼이나 흘렀나. 나는 그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골백번은 파도를 탄 기분이었다. 머리가 깨지도록 혼란스럽다가도 가슴이 아릴 만치 먹먹하고.
다 떠나보낸 줄 알았던 여린 감정들이 조약돌처럼 굴러 들어와 쌓였다.
‘나를 즐겁게 하는 것이 네 의무잖아, 버들아.’
내가 모시던 기 도령은 제 소중한 벗이 이만 일어나려는 낌새를 보일 때마다 다정하게 손을 잡고 도로 끌어 앉혔다. 부정할 수 없는 얄미운 말까지 보태면서.
“분명 더러운 짓을 해서 벽수님의 눈에 들었겠지.”
“버들이는 너처럼 웃음이나 파는 애가 아니야.”
조호가 비웃자 요희가 내 편을 들며 이를 드러냈다.
안 그래도 사내 일꾼들에게 미운털이 단단히 박혀 있던 나는 그날 이후로 똥구덩이에 처박아도 시원찮을 질시의 대상이 되었다.
운혁은 매일 나를 불러 기름을 끼얹었다. 원래 들이던 일꾼들도 죄 쫓아내고, 전적으로 내게만 시중을 들게 시켰다.
용수보의 주인은 냉큼 나를 끌고 가 단장을 시켰다. 그러다가 여인인 것도 들통나 버려 용수보가 발칵 뒤집어졌다. 특히 요희는 길 가다 뺨이라도 얻어맞은 사람처럼 충격과 배신감이 그들먹한 눈으로 나를 보더니 도망치듯 뛰쳐나가 버렸다.
하지만 속이고 들어온 죄를 묻는 것도 나중 일이었다. 그 퇴마사께서 점찍은 아이가 아닌가. 탐욕이 두둑이 붙은 용수보의 주인은 차라리 잘되었다며 그분의 마음을 단단히 휘어잡아 열흘이고 세 이레고 눌러앉혀라, 명령했다.
물론 나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왜 그런 차림이야.”
마치 신방에라도 든 듯 우스꽝스럽게 꾸며진 내 몰골을 기운혁이 봤다.
“벌써 여인인 걸 들켰어?”
“예.”
나는 내 앞에서 생동감 있게 움직이는 사내가 4년 전 죽었다고 믿고 잊으려고 발버둥 친 사람임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요새 무릿매골이 자주 꿈에 나타나더니. 혹시 그 여파로 헛것과 대화를 나누는 건 아닌지 내 정신머리까지 의심이 갈 지경이었다.
하나 그는 내 눈이 닿는 곳마다 보란 듯 존재했다. 어제도, 오늘도. 앞으로도.
“불편해 보이네.”
“겹겹이 입은 게 많아서요. 장신구를 잔뜩 올려놔서 머리도 무겁고.”
이딴 싸구려 치장을 돈 많은 양반께서 진정 좋아하리라 여겼나. 사는 동안 귀한 것만 보고 듣고 맛본 사내일진대.
나는 억지로나마 조금 웃어 보이다가, 웃는 입꼬리가 어색해진 스스로만 발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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