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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35/86)

35화

“어머, 너 예쁘게 생겼다.”

몸에 두른 장신구가 최소 네 쌍인 귀족들만 받는다는 용수보는 일꾼들마저 허투루 뽑지 않았다. 계집애들은 왕의 침소를 오가는 궁인만치 어여뻤고, 사내놈들은 튼실하니 건장했다.

여기서 나는 후자였다. 건장하다는 뜻이 아니라 사내 취급을 받는다는 의미다. 도곡의 기혼 여인들은 쪽을 지고 미혼은 낭창하게 등허리까지 머리를 푸는 게 관례라고 하였다.

“저것들은 무시해.”

의도치 않게 또래의 여아들에게 둘러싸인 나였다. 아까부터 조잘조잘 말을 붙이는 요희의 손가락을 따라 목을 비트니 흉악스레 눈알을 치뜬 덩치 큰 사내들이 보였다. 제 것을 빼앗길까 봐 경계하는 모양새.

용수보에서 남자 일꾼만 구한다는 벽보를 보지 않았더라면 사내놈처럼 보이고자 부러 머리를 자르지 않았을 터다. 그러니 감독관은 나를 기생오라비로 단정 지었고, 이어 줄줄이 같은 취급이었다.

도곡의 여인들은 미끈한 얼굴이 취향인지 한결같이 날 보고 눈을 빛냈다.

“네가 할 일은, 저기 소 발굽 모양 탕부터 쭉 이어진 족욕탕까지 박박 닦는 거다.”

해 뜰 때부터 질 때까지 한 일이라곤 편편한 사암을 넓게 깐 욕탕과 씨름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썩 나쁘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무녀의 행차랍시고 진주와 꽃으로 장식한 가마에 엉덩이를 얹고 요란하게 등장할 수도 있었으나 그럴 이유는 또 무어란 말인가.

나를 공경하면서도 두려워하는 시선은 1년도 못 되어 나를 바싹 마르게 했다. 말 섞을 이뿐이라곤 하루에 서너 마디가 전부인 진원인데, 그자와 어울리느니 방구석에 앉아 홀로 풀을 씹는 게 나았다.

“버들아.”

요희가 은근한 어투로 속삭였다. 계집애가 귀여운 구석이 있어서 머리를 양 갈래로 늘어뜨리고 달려오는 데도 거부감이 없었다. 그녀는 내 팔을 잡아당기며 제 배를 문질렀다.

“일은 끝났어? 곧 식사 시간이야.”

“또 반찬은 나물 무침인 모양이군.”

“국은 아욱국. 반찬은 나물 한 개지만 밥이랑 국은 원하는 만큼 먹을 수 있잖아.”

용수보의 일꾼들은 합숙 생활을 한다. 이제 이틀째가 되었다. 나는 여기서 인연을 만들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생겼다. 귀찮아서 제대로 응수해 주지 않았는데도 이 애는 부득불 나를 끌고 제 친구들에게 소개해 주는 수고로움까지 보였다.

나는 적당히 어울려 주며 너른 용수보에서 벽수의 행적을 쫓았다. 하지만 산더미 같은 빨랫감을 여섯 수레째 나를 때까지 퇴마사의 털끝도 구경하지 못했으니.

불행 중 다행이라면 일꾼의 신분으로서 일거리 핑계를 대고 웬만한 공간은 쏘다닐 수 있다는 점이었다.

“5층에 귀빈들만 모시는 특실이 따로 있대. 그 사람도 거기에 있을걸.”

영 소득이 없는 건 아니었다. 놈의 얼굴이 얼마나 대단한지 여자애들이 모였다 하면 같은 주제로 입방아를 찧었으니 말이다. 아라, 난희를 떠올리게 하는 아이들 사이에서 귀만 열었다.

“아무나 못 들어간대.”

“귀빈들이 워낙 까다로워야 말이지. 직접 자기 수발들 수족을 뽑는다는 거야.”

“뽑히면 대박, 일하다 쫓겨나면 쪽박.”

“보수가 많아?”

“응, 게다가 총애를 받으면 귀한 패물도 한가득 준다는 거야. 넉 달은 거뜬히 먹고살 수 있을걸?”

“곧 뽑는 댔어.”

“곧, 언제?”

“그분이 나오시면.”

특실의 귀빈 중에서도 으뜸인 벽수는 꿀을 잔뜩 품은 꽃이었다. 꿀을 핥으려고 눈을 빛내는 벌레들이 득시글 꼬였고, 나도 개중 하나가 될 참이었다. 이유는 다르나 목표는 같았다. 그의 지척을 차지하기 위한 투쟁인 것이다. 경쟁률이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엿새째 되는 날. 죽은 건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잠잠하던 퇴마사가 드디어 귀한 용안을 내비쳤다는 속보를 들었다. 아이들이 우르르 발을 굴리며 달려갔다.

용수보에서 욕탕 한 번 쓰질 않고, 방에서 몸만 말다가 나온 사내는 옥을 반질반질 닦아 놓은 것처럼 매끄러웠다. 잠을 개운히 잔 표정으로 걸어 나와 아방궁처럼 드넓은 용수보의 주인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갑을이 명백했다. 이 온천의 주인도 필시 대단한 거부일 텐데, 굽은 허리가 펴지는 꼴을 보기 힘들었다.

“버들아, 봤어? 봤어?”

못 봤다. 소식 듣고 버선발로 앞질러 간 요희와 달리, 나는 인간 울타리에 둘러싸인 퇴마사의 높게 치솟은 대가리만 구경하다 돌아왔다.

“정말 눈이 파래.”

“거리에 나가면 많던데.”

“저렇게 투명하고 새파란 눈은 처음 봤어.”

“외국인일까?”

“밀국어가 유창하던데.”

우글대던 인파가 한쪽으로 쏠렸다. 퇴마사가 움직인 것이다. 엮은 굴비들을 끌고 가는 듯 우스꽝스러운 광경이었다.

“우리도 가 보자.”

이 얼굴 반반한 퇴마사를 환영한답시고 입구에서부터 푸른 연꽃등을 세 열로 걸어 놓았다. 심드렁한 눈으로 보다 도떼기시장을 방불케 하는 지원자들을 헤치고 요희 옆에 섰다.

“아이고, 나리. 어서 이쪽으로 드십시오!”

“나리께서 좋아하시는 음식들을 미리 전해 받고 정성을 다해 차려 두었습니다.”

단상에 오만하게 앉아 한쪽 다리를 접은 저 사내가 바로 벽수였다.

챙이 넓은 흑립을 썼다. 비스듬히 젖혀진 갓 아래로 깎아지른 윤곽이 숨어 있었다. 작은 얼굴, 갸름한 윤곽과 섬세한 이목구비. 청초한 눈매와 그렇지 못한, 어딘가 음산한 분위기까지.

괴리를 알아본 이는 숫제 나뿐이었다. 가식의 미소를 끼얹어도 미혹적일 사내라며 요희가 내 어깨에 팡팡 주먹다짐을 했다. 상등품의 비단옷과 허리띠, 거기에 과실처럼 주렁주렁 여문 보석들을 군침 삼키고 보는 자들도 여럿이었다.

타고난 얼굴이며 걸친 것들이 분명 사람의 눈을 멀게 하는 자인데.

마음에 찬물을 끼얹는 듯했다. 내가 불쾌감을 느낀 것은 모두가 흠앙하는 저 가식적인 미소도, 우아한 자태에 숨은 깔보는 시선도 아니었다. 푸른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는 먼 곳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나른히 눈을 비비는 사내가 마음 웅덩이에 처박아 둔 기억을 입질하듯 끌어 올렸다. 나는 산 사람을 보고 죽은 사람을 떠올리고 있었다. 4년 전 명을 달리한 벗이 장성하면 딱 저런 외양이지 않을까 가당찮은 생각을 급히 떠나보냈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

볏가리 털 듯 털어 냈다. 위험스러운 직감이 등골 위로 주륵 떨어졌다.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감시해야 할 대상인데. 나는 눈앞에 있는 사내를 더 쳐다보지 못하고 찌푸린 눈을 내리깔았다.

저자의 시종으로 들어갈 기회를 노려야 하는데 잠깐 넋을 빼놓는 사이 수십 개의 손이 뽑아 달라 아우성쳤고, 뒤늦게 나도 손을 들려 하니 선발은 끝나 있었다.

“저들이라고?”

“예, 퇴마사님.”

선발된 시중인은 도합 셋이었다. 식사 내올 아이, 침구를 갈고 의관을 정제해 줄 아이, 약탕을 달이고 목욕재계를 도울 아이.

단상에 올라 코앞에서 벽수를 마주 볼 영광을 차지한 세 아이는 어깨가 산봉우리처럼 치솟아 있었다.

퇴마사의 호위가 아이들의 면면을 뜯어보았다. 수상한 관상은 아닌지, 손발이 희고 부들부들한지, 눈이 강직한지 그런 우습지도 않은 것들을 따져 엄선하는 것이다.

벽수는 눈을 휘며 제 수발들 이들을 개 닭 보듯 했다. 일말의 관심도 흥미도 없고 그저 무료함에 몸을 비트는 중이었다. 하필 저 반질반질 웃는 낯짝도 죽은 기운혁을 빼닮았다.

나는 다시 기운혁을 털어 내고 눈앞의 사내에만 집중했다. 알려진 벽수의 신분을 떠올렸다.

‘어드메 양반 댁 차남이라던가.’

“다 되었으면 가지.”

시중인 셋이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앞서 걷는 퇴마사를 뒤따랐다. 선택받지 못한 이들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마냥 모여 웅성대다가 풀 죽은 얼굴로 해산했다.

제비보다 빠르게 손을 치켜들고 단상 앞까지 헤엄쳐 간 요희는 죽상을 하고선 돌아왔다.

“위로해 줘.”

“무얼.”

“왜 나처럼 어여쁜 아이를 뽑지 않지?”

낙오자가 된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요희는 나를 위로했고, 나는 시무룩한 요희에게 내 몫의 고기완자를 먹으라고 주었다. 기분이 좋아진 퇴마사가 내어놓고 간 잔칫상이었다.

실제로 뿌린 건 돈이었겠으나, 그 돈은 용수보의 주인에게 돌아갈 것이었고 일꾼들은 봉급이 오르는 대신 고기가 들어간 완자를 반찬으로 배급받았다.

형편이 나아졌으나 어릴 적 못 먹고 살아 그러한지 먹을 것 앞에서는 늘 적극적이었다. 나는 모처럼 배부르게 먹고, 이부자리로 돌아왔다.

그 후 낡은 장판지에 이불을 깔고 여덟 명이서 몸을 부대끼고 누웠다. 독방에 독채에, 수련실마저 홀로 썼던 무녀원 시절보다 조금 불편하더라도 이편이 나았다.

‘나는 여기에서 사내놈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중이라 결국 혼자나 다름없지만.’

이불을 어깨까지 덮고 눈을 감았다. 사내놈들이라고 과묵하기만 한 건 아니라, 지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재수 없는 손님부터, 웃돈을 얼마나 받았느니, 애인과 접문을 했느니 시시덕대다가 자정이 훌쩍 넘어서야 방 안이 조용해졌다.

지칠 줄 모르는 수다를 듣노라면 무릿매골에서 억울하게 죽은 난희와 아라가 떠올랐다. 그리고 나 하나를 잡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죽든 말든 팽개친 진원이 부상했다.

벌써 4년이 흘렀다. 누굴 원망하고 복수를 다지고. 그런 것들은 흐르는 세월에 쓸려 재가 되었으나 갈 길 잃은 그리움이 맴돌았다.

내가 걔들을 그리워할 줄은 몰랐다. 무릿매골에서 보낸 봄날이, 그 봄볕이 드리워진 대청이 문득문득 꿈에 찾아올 줄은 몰랐다.

대청마루에 누운 건 수련처럼 어여쁘게 웃는 도령이었다. 가식 없이 웃으라니까 정녕 그리해 주던 사내.

악몽 대신 요즘엔 그런 것들을 꿈에서 만난다. 뱃머리에 은은히 떠오른 물풀 내음, 강가에 비친 하얀 얼굴. 나의 이름을 궁금해하던 누군가가.

달지 않은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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