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근래에 값비싼 사왕의 무녀 대신 적당한 대가를 받고 젊은 퇴마사를 찾는 이가 많다고 하였다. 나이는 이립쯤일까. 오만상을 찌푸리고 남자의 신상을 대강 그려 놓은 종이를 바라보다 물었다.
“한데요. 이자의 어디가 의심스럽다는 것인지.”
“퇴마하는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여 주지 않는다더군.”
“겨우 그런 걸로 조사를 명하시니 무녀원도 참 한가한 모양입니다.”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니 의심을 받는 거다.”
“해서 뒤라도 밟으란 소리신지.”
“확인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이자에 대해 조사해.”
몇십 년 요기를 묵힌 요귀들이 사람 흉내를 내고 돌아다니는 꼴을 보긴 봤다. 4년 동안 두 번쯤. 긴장이 무색하게도 칼을 디미니 겁을 먹고 홀랑 본모습으로 돌아가 줄행랑치는 시시한 잔챙이들 뿐이었다.
애당초 상급 요귀가 연약한 사람의 피육을 뒤집어쓰고 다닐 이유가 없었다. 몸 크기를 바꿔 가며 인가로 파고드는 놈들은 보아도, 사람인 척 우왕마왕 어울리는 놈들은 150여 마리를 뒤져 한 마리 볼까 말까 할 정도로 찾기가 힘들다는 뜻이다.
4년 동안 마제의 행방에 대한 소득이 없으니 아무나 찔러 보자는 수작인가. 부쩍 신경질이 빈번해진 늙은 왕야를 떠올렸다.
“그래도 지금껏 네가 맡은 의뢰보다는 점잖은 축 아니냐.”
인정하기 싫으나 옳은 말이었다. 근처에 다가가기만 해도 독기로 사람을 말라 비틀게 하는 놈부터, 수십 개의 창살 달린 꼬리를 땅에 묻어 두고 지뢰처럼 퇴마사의 배를 뚫는 놈, 뒤집어 놓고 발목부터 잘라 먹는 놈. 별별 그악스런 요귀들과 혈전을 벌인 것에 비하면, 사람 하나 미행하는 게 뭐 대수라고.
“이름이 벽수입니까?”
“본명은 모르나, 사람들이 그리 부른다더군.”
설령 요귀인들 하찮은 놈임이 분명하다. 다른 포식자로부터 제 몸 지키기도 급급한 마당에 무녀의 눈도 피해 다녀야 했으니 차라리 사람 틈바구니에 숨어 사는 게 안전하다고 착각하는 나약한 종들 말이다.
사혜는 한숨과 함께 낡은 종이를 챙겨 들었다.
“해가 밝는 대로 떠나겠습니다.”
“무녀원에 들르지 않고?”
벽수의 행선지는 수도만큼 번화한 대처인 도곡이었다.
“갈라집시다.”
사혜는 그 한마디를 던지고 방을 나가 버렸다.
탁, 양 문이 싸늘한 공기를 뱉고 닫혔다. 진원은 떠나간 사혜의 자리를 침묵 속에서 응시하다 곧 등잔의 불을 껐다. 벽수. 그자의 얼굴을 맞닥뜨리고 홍사혜가 동요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 * *
무역항을 끼고 있어 그런지 도곡의 분위기는 화려하고 경직된 수도의 분위기와 사뭇 달랐다. 눈 돌리는 곳마다 자유의 냄새가 물큰했고, 듣도 보도 못한 언어가 한데 섞여 활기차게 시전을 누볐다.
수도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인데 이쪽이 훨씬 다채롭다. 까무잡잡한 피부, 감람색 눈, 드높은 매부리코가 인상적인 붉은 머리칼의 사내. 누리끼리한 색이 섞인 적발로, 풍림에게서 대물림되는 찬연한 붉은 빛과는 사뭇 다른 결이었다.
어머니와 도곡에 정착한다 한들 감시는 피할 수 없겠다고 생각하며 사혜는 걸음을 옮겼다.
‘그나저나 벽수인지 뭔지 찾기가 쉽지 않겠구나.’
한순간 기억 속의 망자를 떠올렸다. 푸른 눈 하면 떠올리는 사람이 기운혁 한 명일 정도로 희귀하다 여겼는데, 도곡에 와 보니 세상살이 모르는 나를 비웃듯 뜨문뜨문 벽안을 가진 이국 출신들이 보였다.
눈을 찌르는 햇귀가 거슬려 손날로 차양을 만들고 경계 없이 걸어가던 차였다.
탁!
코를 찌푸리는 냄새가 나더니 누군가가 날쌔게 그녀의 어깨를 치고 도망갔다. 사혜는 허전한 제 허리에 손을 올린 채, 엽전 주머니를 훔쳐 이미 저 멀리 달아난 꼬마 아이를 응시했다. 소매치기가 빈번한지, 지나가던 사람은 그녀를 흘끗 보기만 하고 도움 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도곡은 지금껏 요귀의 출몰이 없어 사왕의 무녀가 다녀간 곳도 아닌데다, 설마 귀인이 이렇게 홀로 거리를 방황하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는지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도 없었다.
눈에 띄는 건 빼어난 이목구비뿐이나 젊은 처자가 도둑질을 당했다고 생각하고 말뿐, 제 일이 아니니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는 자도 없다. 그녀가 비명을 지르는 것도, 벌벌 떨며 도움을 청한 것도 아니라 더더욱.
사혜의 동공이 일순 불그스름하게 빛났다. 도둑의 궤적을 따라 긋는다. 이윽고 살랑이는 미풍과 함께 발이 떼어졌다. 인기척이 없는 곳에 다다라서야 다물린 사혜의 입이 짧은 신어를 뱉고, 그 즉시 그녀의 시야를 채운 풍경이 뒤바뀌었다.
“허억……!”
대낮에 주머니를 털어 간 간 큰 도둑이 비명을 지르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사람이 나타난 꼴이니.
겹꽃잎처럼 펼쳐진 붉은 천이 허공을 휘돌아 소리 없이 착지했다. 무섭도록 창백하고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이 부풀었다 꺼진 치맛자락 위로 드러나자 아이는 사색이 되도록 떨기 시작했다.
“괴, 괴물……!”
도주를 시도했으나 사혜가 먼저 도둑의 발을 걸어 넘어뜨렸다.
‘잘못 걸렸다.’
절망에 찬 아이가 양손을 싹싹 비비는 척을 할 때에.
“아이야.”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손을 치켜든 것도 아닌데 팍 웅크려지는 아이의 어깨에 사혜가 순간 멈칫했다. 틈을 놓치지 않고 도둑은 잽싸게 발을 놀렸으나 안타깝게도 불발이었다.
“악!”
사혜는 재차 바닥을 굴러 혼이 나간 아이에게 다가갔다. 반항을 멈추고 떠는 어깨 위로 손을 가져가 움켜잡았다.
“이자를 본 적이 있나. 바른대로 고하면 관아에 끌고 가진 않겠다. 정보 값도 치르지.”
다른 손으로 벽수의 용모파기를 펼쳤다. 골목을 쏘다니는 어린 소매치기. 척 봐도 도곡의 개미굴 같은 길을 손금 보듯 알고, 한낮에도 이쯤은 별것도 아니란 듯 당당하게 도둑질하는 배짱을 보여 주었다.
“해, 행렬이 요란하여 똑똑히 기억이 납니다.”
전의를 상실한 입이 막힘없이 뚫렸다. 고분고분해진 아이의 말에 의하면 벽수는 나흘 전 도곡에 도착해 밀국의 3대 온천 취락인 용수보(龍水堡)에 머물 예정이라고 했다. 지금은 한창 국화꽃 축제를 즐기고 있다고.
“다른 건.”
“어…… 여, 열흘간 정양하실 거라고 들었어요.”
거지들은 패를 이뤄 크고 작은 소문을 물어 온다. 겁을 집어먹고 손가락을 베베 꼬는 모습을 보니 돈 뽑아 먹고 튀려는 거짓말쟁이는 아닌 듯했다.
“진짜예요.”
애가 닳은 목소리로, 흘끔흘끔 돈주머니를 흘긴다. 답을 구한 사혜가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굽힌 무릎을 폈다.
‘사람을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는 자가 요귀일 확률이 얼마나 될까.’
없겠지.
쯧, 곱씹을수록 시간 낭비를 하고 있다는 생각에 혀를 찬 사혜가 소리나게 두루마기를 접었다.
“아이야. 오늘 네가 본 것은 전부 잊어라.”
귀찮은 일은 질색이다. 임무를 완수하기도 전에 포졸이 들이닥쳐 그녀의 정체를 파헤치려고 든다면 그보다 골치 아픈 일이 있을까.
“내 귀에 네가 떠벌린 이야기가 들어오지 않기를 바란다.”
사혜는 주머니를 끌러 덜덜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에게 일주일은 너끈히 먹을 양의 엽전을 쥐여 주고 보냈다.
‘이제 파고들 틈을 찾아야 하는데.’
용수보로 향하면서 벽수와의 적절한 만남을 떠올려 봤으나, 모로 봐도 같은 객으로서는 경계만 얹을 뿐 불가능했다. 신기를 모조리 숨기고 자연스럽게 접근할 방도.
‘무슨 수를 짜내야 할까.’
몇 가지 고민하며 걷다 보니 왕의 궁전만 한 용수보에 다다랐다. 상아를 깎아 만든 둥근 벽 너머로 노천탕의 뜨거운 김이 산처럼 뭉글뭉글 치솟는다.
온천. 살면서 단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이라, 벽 뒤의 풍경을 막연히 상상할 뿐이다.
그 벽에 사람을 쓴다는 벽보가 붙어 있었다. 하필 지금이 국화 축제라 관광객이 끓어 용수보도 심히 일손이 달리는 듯했다.
“…….”
하늘이 도운 거지. 정면 승부를 선호하지만 지금은 미행인데다, 난생처음 진원과 외따로 떨어져 맡은 임무라 신중을 가할 필요가 있다. 나름의 신뢰를 얻은 것 같다. 감시가 떨어지고, 이곳 도곡에서는 변복한 그녀를 누구도 알아보지 못한다.
사혜는 날카로운 단도로 거침없이 귀 밑머리를 잘라 냈다. 서걱서걱, 발치로 떨어지는 흰 머리카락이 묵은 때를 벗기는 듯했다. 꼭 열일곱의 자신으로 돌아간 듯하여 감회가 새로웠다.
서늘한 가을바람이 눈처럼 흰 목덜미에 붙은 머리카락을 남김없이 쓸어 갔다. 잠시 잠깐 그 자리에서 찬바람을 맞던 사혜가 이윽고 용수보의 입구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문제 있습니까?”
“문제 많지.”
쓸 만한 인재를 추려 내겠다는 감독관은 통이 넓은 청록색 바지에 상의 대신 수건을 목에 걸친 거구의 사내였다. 구릿빛의 미끄덩한 근육이 육체노동의 고됨을 일깨워 주었다.
턱을 쓸며 고민에 잠긴 나를 어처구니없다는 듯 보던 사내가 한마디 씹어뱉었다.
“암만 봐도 힘쓸 골격이 아니라서. 물 꽉꽉 채운 나무 양동이를 하루에 몇십 통씩 퍼 날라야 하는데.”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습니다.”
“그래도 안 돼.”
이런, 동정표도 통하지 않는다면…….
나는 하는 수 없이 시범을 보였다. 몸만 한 나무 물통 두 개를 어깨에 이고 무리 없이 이동하는 나를 미친 사람처럼 보던 사내가 마지못해 계약서에 인을 찍어 주었다. 확실히 술수가 없었다면 해내지 못할 노동이었다.
나는 요귀에게 된통 당하고 몸이 망가지고 난 뒤부터 무력에 한계가 있었다. 무거운 곡도를 쌍으로 들고 칼춤을 췄지 않느냐 묻는다면 신의 안배 덕택이었다. 지금도 매한가지고.
양동이를 이는 척 남모르게 바람을 부리니, 그걸 휘파람 부는 꼴로 오해한 사내는 저를 놀리기라도 하는 줄 알았는지 ‘시건방진 놈’ 씹어 대며 입에 문 담뱃잎을 튕겼다.
“이름.”
“버들이오.”
내 이름을 듣던 사내가 해괴한 걸 들은 사람처럼 표정을 구겼다. 어디 촌구석에서 굴러먹다 온 놈이구나, 조롱이 깔려 있었다.
그러건 말건 나는 사내를 지나쳐 용수보의 시종들이 머무는 별관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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