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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32/86)

3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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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여러 번 바뀌어도 ‘그 마을’에 대한 음산한 소문은 토암산을 넘을 때마다 꼬리표처럼 붙어 다녔다.

지금은 수장된 마을. 무릿매골은 한때 소문을 듣고 찾아온 방문객들로 북적였으나 한 계절 만에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지나가기만 해도 저주를 입는대요.’

‘요귀가 사람들을 쓸어 먹은 마을이라 하더랍니다.’

300여 명의 마을 사람들이 흔적도 없이 물에 잠겼으니 필경 강의 저주다. 온갖 흉측한 소문이 토암산을 넘어 수도로 향하는 행인들의 뒷덜미를 오싹하게 식혔다.

전말에 대해 무어라도 밝혀 주면 소문이 좀 사그라들련만, 밀국의 왕은 물에 잠긴 마을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으니, 외려 밀국의 오점을 영영 지울 수 있어 개운해한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참상이 따로 없군요.”

“그러게 말이오. 요귀가 마을 하나를 초토화시키다니.”

하나 보는 눈과 듣는 귀를 모두 피해 갈 순 없는 법이다. 제아무리 지고한 왕이더라도 무릿매골 사건을 완전히 덮어 둘 순 없는 노릇이라, 어찌할 수 없이 조사단을 파견했다.

구색만 맞춰 볼품없는 행렬이었다. 어명으로 무릿매골의 참상을 조사하러 온 어사도 노골적으로 귀찮은 기색을 보였다.

“무얼 조사할 게 있겠습니까. 척 봐도 건질 것 없는 폐가인데.”

옆에 선 보조 감찰관도 적당히 끝내고 술이나 푸러 가자는 손짓을 해 보였다.

“한데 어사님, 이거…… 보기 드문 경우 아닙니까?”

“자네 100년 전 나타난 요귀가 수도를 째로 부숴 밀국의 도읍이 율성부로 옮겨졌다는 사실 잘 알 테지. 드물다 뿐인가. 자그마치 100년 만이라네.”

“그런 일이 있었지요, 참.”

두런두런 담소하며 앞서 걷는 두 사람의 뒤를 병마절도사와 무녀가 따랐다.

“무어 발견한 게 있으면 즉각 보고해 주시길 바라오.”

어사가 뒤따르는 이들에게 당부하니,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방향을 돌렸다. 마을 자체의 규모는 작은데 샛길도 많고 산으로 통하는 길도 적잖아 지금부터는 패를 나눠야 제시간에 일을 끝마칠 수 있었다.

“무녀님께서는…….”

“이쪽으로 가 보지. 호위는 되었소.”

어사는 묻지 않고 즉시 그러라며 비켜섰다. 하여, 진원은 누구의 방해도 없이 홀로 폐허가 된 마을을 시찰하게 되었다.

느긋하게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공활한 집터에 다다랐다. 지금은 대들보며 서까래며 불타 무너진 흔적만 남았으나, 터의 웅장한 크기를 보건대 필시 배부른 양반의 가옥이 분명했다.

진원은 기억을 더듬으며 잠깐 멈춰 섰다. 사왕의 짐작대로 거슬리는 무언가가 남아 있었다. 진원은 손을 뻗어 불타 엉망이 된 서화를 들어 올렸다.

한눈에 보아도 미색이 대단한 젊은 사내는 얼굴 반쪽이 녹아내려 흉한 몰골이었다. 반반의 간극이 극심해 기괴하게 느껴지는 그림 속 사내는 눈언저리가 온통 그을려 꼭 눈알이 파헤쳐지고 시커먼 피눈물을 흘리는 듯하였다.

서화를 잡아 드니, 그 빈 눈알에서도 징그러운 지네 요귀가 네 줄로 쏟아져 나왔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진원의 입꼬리가 경련하며 위로 들렸다.

‘께름칙한 것이라면 뭐든 갖고 오라 명하셨지.’

그는 주저 없이 지네 요귀가 알을 깐 서화를 무명천에 싼 뒤 챙겨 넣었다.

“무녀님, 수상한 점이라도 있습니까?”

같은 자리에서 한참을 서 있던 무녀를 발견하고 어사가 다가오다, 너울 뒤 서슬 퍼런 눈동자를 맞닥뜨리자마자 삐질삐질 물러났다.

“나,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철수하는 편이 낫겠다는 말을 드리려고.”

허둥지둥 한마디 남기고 다람쥐처럼 제 동료들에게 쪼르르 달려가는 꼴이 우스웠다.

진원은 고개를 돌렸다. 스산한 바람이 휘도는 외로운 전각. 어둑서니가 내려앉은 그곳에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작게 꿈틀거렸다.

허깨비를 보았나.

그의 눈초리가 의심으로 가늘어졌다. 진원은 기척을 죽이고 앞으로 나아갔다. 요귀면 찢어 죽이고, 설마 그럴 일은 없겠으나 이곳에 쥐새끼처럼 들어와 살고 있는 걸인이면 쫓아낸다.

그런데 다음 순간 진원의 시야에 들어온 건 둘 중 무엇도 아니었다.

“제, 제발. 용서를…… 으, 허윽, 잘못했어. 제발…….”

어렴풋이 들리는 곡소리는 분명 환청이었다. 그 곡소리의 주인이 어디에도 없으니까.

진원은 차게 식은 눈으로 산 사람처럼 바닥에 무릎 꿇은 유골을 응시했다. 단정하게 비단옷까지 갖춰 입고, 마치 누군가가 억지로 제자리에 앉혀 놓은 것처럼 흐트러짐 없는 가지런한 자세라니.

스스스, 지척에 다다르자 뻣뻣하게 세워진 유골이 허물어지며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굴러떨어진 정자관은 망자의 신분을 말해 주었다. 이 너른 터의 주인으로 군림했을 자.

진원은 죽은 뼈를 산자처럼 움직이게 만든 것이 그 뼛조각 틈을 파고든 지네 요귀임을 깨달았다. 무녀의 신기를 알아차리고 발 빠르게 도망치는 것이다.

“저주받은 마을.”

진원은 달아나는 지네들을 구태여 쫓지 않았다. 상대하기도 시간 아까운 하급인 것은 둘째고, 놈들이 알을 깐 터전은 필시 뒤가 지저분했기 때문이다.

진원은 터의 주인이었을 기 대감을 기억 바깥으로 끄집어냈다. 사람 좋게 웃는 낯짝, 아부하지 않되 예가 배인 몸가짐. 무릿매골 거민들의 대단한 지지를 받고 있다고 하였나.

하나 지네 요귀가 말해 주고 있었다. 이 자는 호인의 거죽을 쓴 파륜자라고.

아마 사람을 죽였을 것이다. 하여 그 죗값을 지금에 이르러 받는 모양이지. 진원은 유골이 되어 버린 대감을 향해 혀를 차고 돌아섰다.

무릿매골 조사를 지시한 건 사왕이었다. 필히 거기에 요귀에 대한 단서가 있으리라 믿는 눈치였고, 진원도 그에 동의했다.

요즘 같은 때에, 그러니까 100년 전 봉인된 대요귀가 기지개를 켠 때에 전과 다른 거대한 중상급 요귀들의 출몰은 대요귀를 추적하는 중요한 증거였다. 강한 놈이 우두머리로 군림하고 그 주위로 굴복당한 졸개들이 몰리는 생태였으니.

‘떼거리로 불어나기 전에 무너뜨려야 한다.’

사왕의 말에 동의했다. 하여 수상한 것들은 모조리 채집해 오는 게 이번 일정의 임무였으나 목적이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밀국 왕의 가장 큰 골칫거리는 응당 불어나는 요귀 떼였다. 마땅한 장기 대책 없이 고식지계로 해결하는 것도 한계가 있는데, 이런 때에야말로 민심을 잃기 십상이었다.

특히 요귀의 시발점이라 볼 수 있는 인신 공양의 역사를 지닌 무릿매골을 옛적부터 탐탁지 않아 했는데, 때마침 불미스러운 사건이 터진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덮고 싶어 할 만하다.

딱히 가련한 백성들을 면면히 굽어살피는 분이 아니셨다. 왕은 앓던 이를 빼 버린 셈 쳤다. 수장된 마을을 미련 없이 지도에서 지워 버렸다. 거기에 얹어, 어지러운 세태에 대한 백성의 분노를 왕실 대신 홍운영의 후손으로 우회시켰다. 그편이 통치에도 편했다.

포상금의 액수가 신분패를 사들이는 것과 맞먹다 보니 백성들은 눈앞에 던져 준 미끼에 쉬이 홀렸다. 그렇게 한 일가에게 만백성의 원망이 가중되게 두고 왕은 용상에 앉아 구경만 하면 끝이다.

거슬리는 것들을 째로 없애 버리는 왕의 행보는 진원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그 역시 두 왕의 농간에 놀아난 과거가 있지 않나.

진원은 요기의 핏자국과 독액이 묻은 흙을 한 움큼 덜어 냈다. 은빛 액체가 찰랑이는 작은 병을 꺼내 그 안에 흙을 쏟아부었다. 그 뒤 유골을 단지에 수습하고, 유골에 걸쳐진 낡은 비단옷까지 전부 챙긴 뒤 말에 올랐다.

“혹시 이곳에 살던 자를 잘 아는 사람이 있소?”

지나가듯 어사에게 물었다. 마을의 생존자가 없으니 기대도 없다만.

“거부로 이름 날린 기 대감 댁이지요? 마침 그의 인척이 와 있습니다만.”

과연 어사가 가리킨 곳에 훌쩍대는 여인이 있었다.

“대감의 누이 되시는 분이라던데, 유해라도 수습할 수 있을까 하여 찾아왔더랍니다.”

늙은 여인은 초상이 담긴 족자를 끌어안으며 울었다.

“잠깐 볼 수 있겠습니까?”

진원이 다가가 물었다. 여인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족자를 펼쳐 주었다. 기씨 일가가 그려진 그림. 익숙한 얼굴도, 낯선 얼굴도 섞여 있다.

“……이 자가 막내 도령이라고?”

진원은 4년 전 무릿매골에 들렀을 때 본 기 도령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했다. 그 묘려한 얼굴은 쉬이 잊힐 법한 것이 아니었다.

한데 초상화 속 아홉 살로 추정되는 막내 도령은 그가 기억하는 낯과 확연히 달랐다. 자라면서 역변했다고 해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상이한 얼굴이라. 눈을 의심하며 재차 보았다.

투박한 이목구비, 포동포동 살이 오른 양 뺨과 대감을 빼닮은 좁쌀처럼 작고 까만 눈. 너부데데하게 퍼진 콧볼.

“무슨 문제가 있나요, 무녀님?”

여인이 쉰 목소리로 물었다.

“이 아이, 정녕 이 댁 막내 도령이 맞습니까?”

“예, 이름도 못 받고 죽은 가엾은 막둥이입니다. 몸이 많이 허약한 아이였는데. 오는 해에 꼭 이름을 지어 주겠다며…….”

그는 대답 대신 수거한 유품 몇 개를 여인에게 건네주었다. 꺽꺽대는 목울음을 뒤로하고 무릿매골을 빠져나오는 걸음은 무거웠다.

대체 어찌 된 영문일까.

* * *

“전에는 눈에 안 띄게 조용히 다니더니만, 요즘은 저렇게 짝을 지어 활동한다더군.”

“그편이 일 처리가 쉽기 때문 아니겠나. 우리 같은 촌민이야 무어가 되었던 감지덕지할 일이지. 사왕의 무녀님 덕택에 이번 겨울은 손가락만 빨고 지내지 않아도 되겠어.”

쿵!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물소의 몸통만 한 원뿔을 단 징그러운 머리통이 바닥을 굴렀다. 너른 땅 위에 내장이 터지고 머리가 따여 축 늘어진 요귀의 사체가 거대했다.

농업으로 빌어먹고 사는 남쪽의 작은 촌락에 거대한 요귀가 난동을 피운 지 이틀째 만에 제압당했다. 그 이틀은 소식을 듣고 무녀가 이곳까지 오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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