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0/86)

30화

거대한 단상이 소루강 하류에 마련되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집결하라는 현감의 명령에, 나와 어머니도 어쩔 수 없이 그리로 향했다.

‘쓸데없이 이게 무슨 짓이지.’

마을 사람들 앞에서 보란 듯이 굿판이라도 벌일 셈인가. 혹 다른 숨은 의도가 있나.

사왕이 보냈다는 무녀는 같은 공간에 있는 것조차 독이었다. 정말 가고 싶지 않으나 하루만 조심하면 될 일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금일 밤 어머니와 마을 뒷산으로 빠져나갈 테니까.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느적느적 옮기다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길게 뻗은 기와 담장 너머로 햇빛이 반쯤 기울어 있었다. 지난 1년간 수없이 인사 나누던 담장을 따라 걷다가, 마침내 도령의 전각이 보였을 땐 완전히 멎었다.

나는 품속에서 작일 밤 붓끝을 씹으며 공들여 완성시킨 서신을 꺼내 들었다. 읽고 쓰는 데 맛들린 나는 어머니 눈 밖에서 틈만 나면 배를 깔고 엎드려 서툰 필체로 글자를 끼적였는데, 이 또한 도령이 내게 떠안겨 준 소중한 취미가 되었다.

작별의 서신 따위 보내려 하지 않았으나 내 마음이 허락지 않았다. 떠난다고 말이라도 남겨 두지 않으면 나를 그리 따르는 도령의 마음이 아플 것 같아서. 제 아비처럼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할 게 뻔한데, 오해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나는 편지 끝에 조약돌을 묶은 뒤 담 너머로 던졌다.

툭.

담장 밖까지 쏟아진 가지에 조약돌이 걸렸다. 이내 버석한 땅으로 굴러떨어진 돌멩이가 제법 또렷한 소리를 냈다. 도령이 먼저 발견하고 주워 갔으면, 할 때에 누군가가 소리를 듣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천 자락이 뭉그러지는 소리가 샌 직후에 바닥에 떨어진 종이가 손안에서 바스락거리며 펼쳐졌다. 나는 그게 도령이라고 확신했다. 그냥, 그가 내 걸음걸음을 알아맞히듯 나도 자연히 그의 발소리를 구별할 수 있었으니까.

단 두 줄 뿐인 편지를 참 오래도 읽는다.

나는 그가 편지를 내던지고 간 사람을 찾기 전에 노을이 피처럼 흐르는 하늘을 등지고 강둑까지 내달렸다.

* * *

재를 두둑이 채운 거대한 향로 네 개에 둘러싸인 무녀가 기이한 춤사위를 벌였다. 마을 사람들은 경외와 공포가 혼재된 눈으로 저들끼리 수군대며 제의를 지켜보았다.

땅거미가 지고 어둠이 찾아왔다. 밤의 제의는 한낮의 제의보다 짧았다. 이 향을 밤새 피워야 하니 지킬 사람이 필요하다며 무녀가 마을 사람 둘을 골랐다.

“지키고 있다가, 요귀가 나타나면 어찌하지요?”

“내게 달려와 알려야지.”

겁먹은 사람들이 두려움을 표했으나 무녀는 조금의 사정도 봐주지 않고 매끄럽게 웃어넘길 뿐이었다.

‘달려와 알릴 틈은 있고?’

어처구니가 없다고 여긴 건 나만이 아닌 모양인지 사람들의 눈길에 불신과 공포가 비질비질 새어 나왔다. 나는 혼란에 빠진 마을 사람들 틈에서 열심히 누군가를 찾았다. 사람들이 죄 모였으니 필히 기운혁도 있을 터인데.

그 찰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익숙한 신형이 눈에 들어왔다. 부모와 형제들 사이에 끼지 못하고 가장 눈에 띄지 않은 곳에, 도령이 홀로 강가를 내다보며 서 있었다.

손에 든 편지가 내 심장을 눌렀다. 오늘이 지나면 다시는 보지 못할 사내에게로 자꾸만 시선이 새어 나갔다. 그는 역시 내가 선 쪽은 돌아보지도 않고, 또한 나를 찾는 기색도 없이 망부석처럼 강만 바라본 채였다. 그 모습에 괜한 섭섭함을 느끼는 내가 이상한 것이겠지.

그때였다. 제단 위에서 허리를 굽힌 채 희생자들을 굽어보던 무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먹구름이 가득 낀 하늘은 오늘 밤 억수 같은 비를 퍼부으리라 예고하고 있었다.

한순간 바람이 세게 불어와 향로의 불을 앗아 갔다.

딸랑, 딸랑―

무녀의 허리를 감싼 비단 천에 달린 금색 방울이 사정없이 부딪히며 음산하게 울려 퍼졌다.

“기다렸다는 듯이. 이리 빠르게 나타날 줄은.”

갑작스럽게 몰아닥친 강풍에 지켜보던 사람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무녀는 그러건 말건 시커먼 강물만 직시한 채 무언가를 중얼거렸고, 어머니는 내 손을 꽉 움켜잡았다.

“사혜야.”

어깨를 감싸고 끌어당겼다. 떠날 채비는 마쳐 두었고, 혼란한 틈을 타 쥐도 새도 모르게 마을을 벗어나 산을 타 넘을 시간이었다.

쿵―!

그 순간 지면이 무언가에 떠밀리듯 크게 요동쳤다. 강물이 하나의 힘이 되어 사방으로 땅을 밀어내고 잡아 뜯는 듯하였다.

“알아서 대피시키시오.”

싸늘한 무녀의 명령에 현감은 사색이 되었다. 화산재가 폭발하듯 강물의 높이가 한꺼번에 높아진 것은 그때였다.

달조차 뜨지 않은 어둠이었다. 무녀와 나와 어머니를 제외한 누구도 어둠 속에서 으슥히 솟구쳐 나온 요귀를 식별하지 못했다. 시퍼런 비늘이 몸통 가득 돋쳐 있는데, 저게 다리 달린 물고기인지, 무엇인지 판별할 여유는 없었다.

내 아랫입술이 덜컥 떨어졌다. 살면서 많은 요귀를 맞닥뜨린 것은 아니었으나 맹세컨대 저 정도로 사악한 요기를 품은 것은 보기 힘드리라. 소루강 인신 공희의 희생자들로 말미암은 원념은 무시무시하게 덩치를 불렸고, 핏발 선 악의는 찌를 듯한 요기가 되어 하늘까지 검게 태워 버릴 지경이었다.

“사혜야!”

마을이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범람한 강물이 마을 사람을 덮쳤다. 강이 아니라 선단을 때려 부술 바다의 해일을 보는 듯하였다.

사왕의 무녀는? 다급히 돌아보니 그는 높다란 제단 위에 뿌리내린 채 시커먼 하늘 속에서 요귀의 눈을 찾고 있었다.

사람들이 다 물에 쓸려 가는데 저치는 무얼 하고 있나. 구경만 할 거면 무엇하러 야밤에 사람들을 끌어모아 이 짓거리를 하는가. 바득 이를 갈 때, 기이한 것을 보았다.

바닥까지 치렁한 무녀의 검은 머리칼이 거미줄처럼 가닥가닥 땅 위에서 퍼져 나간다. 강물과 맞닿는 즉시 물줄기를 실처럼 묶고 매듭짓는 진묘한 광경이 뒤따랐다.

“사혜야, 어서!”

멍하니 지켜보던 내 손을 어머니가 우악스레 잡아끌었다. 강물은 마을을 수장시킬 기세로 사위에서 덮쳐드는데, 무녀의 속도에는 한계가 있었다. 설마 저 능력 하나를 믿고 혈혈단신으로 뛰어들었다고.

“악!”

사람들의 날카로운 비명이 고막을 찢었다. 어린아이 몇몇이 발목을 잡힌 채 속수무책으로 강가로 끌려간다. 강물이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달려 나가려는 나를 어머니께서 잡아채고 고개를 저으셨다.

“보지 마라.”

비정한 눈이 젖어 있었다. 어머니는 볼이 터져라 이를 악물고 세게 나를 잡아끌었다.

“보지 마, 홍사혜.”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목도한 것은 그때였다. 이번에야말로 내 발길이 우뚝 정지했다.

저 사내는 왜. 강물이 덮쳐 오는데도 왜 가만히 서 있는 거지. 왜 다른 사람들처럼 피하지 않고 죽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하염없이 서 있기만 하는 거야?

대감은 식솔들을 챙겨 사라진 지 오래고, 그 무리에 속하지 않은 한 사내만이 버려져 누군가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손에는 내가 던져두고 간 서신이 구겨져 있었다.

“도령!”

기어코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는 정수리 위로 솟구친 집채만 한 해일을 멍하니 응시하다가 천천히 나를 돌아보았다. 이 아수라장 속에서, 용케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나를 본다. 버들아. 입술만 벙긋거려 나를 부른다.

반사적으로 행동이 앞섰다. 낙뢰처럼 강물이 내려치기 직전 도령에게 팔을 뻗었다.

“찾았다.”

덥석. 그 순간 손목이 휘어잡히며 음산한 웃음이 안개처럼 휘돌았다. 불그스름한 나의 신기가 도령에게 닿은 것과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풍림의 쥐새끼.”

너울이 벗겨진 맨얼굴이 흉하게 웃고 있었다. 무녀의 눈을 봉안한 실이 튿어지고, 안에 숨은 붉은 눈동자가 번쩍 뜨이자, 새까만 실타래 같은 것이 전과 비할 수 없는 속도로 빠르게 지면을 덮기 시작했다.

나는 손목을 털어 낼 생각도 못 하고, 이미 쓸려가 흔적도 남지 않은 도령을 목 놓아 불렀다.

나의 신은 그를 건져 내지 못했다. 강의 요귀가 한발 더 빠르게 잡아채 갔다. 눈앞에서 잃었다. 그는 회오리치는 물속으로 영영 자취를 감추었다.

죽을 운명이란 게 이런 뜻이었나. 병환으로 말라 가는 것보다 지독한 운명이다. 차라리 병들어 죽는 편이 나았겠다. 내 앞에서 죽을 거라면, 그 손이라도 붙잡아 주게 침상에서 눈 감는 편이 나았다.

눈물이 부서진 둑처럼 흘러내렸다. 흐린 시야를 헤치고 아무리 둘러봐도 도령을 삼킨 강물의 흔적만 땅에 패였을 뿐. 기운혁은 영영 사라져 버렸다.

“놓아!”

정제되지 않은 기운이 공처럼 튀어 올랐다. 나를 해치고, 적을 해하고. 정돈되지 않은 기운은 폭주와도 같다.

날카로운 바람이 나의 살갗을 난도질하는데도 멈추는 법을 몰랐다. 눈앞의 무녀를 찢어발기려고 혈안이 된 나의 감정을 고스란히 빼닮은 바람은 빌어먹을 무녀의 몇 마디 손짓에 쉬이 제압당했다.

무릎이 푹 꺾이고, 나는 두 번의 악몽을 맞았다. 저 멀리서 입을 틀어막고 나를 바라보며 우는 어머니가 계셨고, 우리 모녀 주위를 사신처럼 둘러싼 가면 쓴 종비들이 보였다.

“어리석구나.”

사왕의 무녀에게 머리채를 잡혔다. 나는 몸부림치며 도령이 파도에 쓸려간 자리를 울면서 바라보았다. 손을 뻗었다. 도령뿐일까. 떠내려간 수십 구의 시신이 다시 한번 끔찍한 현실로 나를 패대기쳤다.

“뭐 하는 겁니까? 당장 마을 사람들부터 구하지 않고!”

“네가 저것들을 걱정할 때인가.”

그가 꺼져 가는 내 목소리를 짓밟았다. 몰아치던 해일은 곧 무녀의 능력으로 잠잠해졌으나 이미 강물에 휩쓸려 목숨 잃은 자들이 다수였다.

처음부터 능력을 양껏 발휘하면 될 것을. 왜 뒤늦게 재주를 부리는가. 머리를 어지럽히는 해일에 숨쉬기가 버거웠다. 울분이고 슬픔이었다.

그러다 문득 아직도 이자에게 머리채를 붙잡혀 있다는 것을 깨닫고 반사적으로 무녀의 손목을 잡아 쥐었을 때. 소스라치게 놀랐다. 손등 뼈와 핏줄이 불거진 커다란 손과 무시무시한 악력.

아, 여기 거짓의 탈을 쓴 자가 한 명 더 있었다. 이 자는 사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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