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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29/86)

29화

“그래, 이틀 뒤 현감이 내려온다더구나. 사왕의 무녀와 함께.”

1년간 탈 없이 지나치게 평화로웠다는 생각은 했다. 불행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고 하였나. 어머니의 침중한 말에 나는 말을 잃었다.

사왕의 무녀.

한번 벼랑 아래로 떨어진 심장이 몇 바퀴를 굴렀다. 침착함을 가장하는 어머니의 눈에는 공포와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마을의 기현상을 조사하고 요귀 둥지를 제거한다는 명목이나……. 너도 알지 않니. 그들의 목적이 그뿐만이 아닌 것을.”

밀국에는 두 왕이 있다. 현왕과 그의 아우인 왕야.

한쪽은 상부, 즉 산 자를 다른 한쪽은 하부, 즉 죽은 자를 다스린다고 불리는 왕이었다.

밀국의 백성들은 황천에서 올라온 원령들을 잠재우고 퇴마에 힘쓰는 왕야에게 지옥의 사자 대신 사왕이라는 그럴싸한 칭호를 붙여 주었다. 하나 사왕의 관심사는 오로지 사악한 잡귀와 세상을 어지럽히는 요귀들을 사로잡아 장식품처럼 제 별실을 치장하는 것. 그는 권력과 정치에 티끌의 관심도 없었다.

날 때부터 신내림이 예정된 사내라, 처음엔 왕가의 수치로 불리었다가 종국엔 영기를 인정받아 왕가의 종묘와 사직 대제를 책임지는 제사장으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이는 대외적일 뿐, 괴악한 자질과 방랑벽이 있는 사왕은 자주 자취를 감추었고, 왕성으로 돌아올 때마다 꼭 제 수족을 하나씩 달고 등장했다.

마침내 그 수족이라 불리는 무녀들이 열일곱에 이르렀을 때,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무녀원을 세우고 자신의 휘하에 두는 것이었다. 하여 설립된 무녀원은 사왕의 든든한 기조이자 베일에 둘러싸인 신비로운 공간으로 굳어졌다.

그러나 소속 무녀에 대해 무엇 하나 제대로 밝혀진 바가 없어 온갖 괴이한 소문이 나돌았다. 사왕이 여색을 밝히어 부러 미목수려한 여인들을 예하로 두고 밤일을 즐긴다, 무녀가 아닌 십수의 첩이다, 따위의 음담패설이 난무했으나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누구도 몰랐다.

나와 어머니는 일생을 사왕의 무녀들에게 쫓기며 살았다. 수많은 마을을 전전하는 이유가 있었다. 반역자 척살을 부추기는 벽서를 지시한 것도 그들이었다.

포악한 성정을 가졌다고 소문난 두 왕이다. 현왕은 선조부(先祖父)가 홍운영이 풀어 준 요귀에게 당한 것을 잊지 않았고, 두 형제는 홍운영의 죗값을 그녀의 후손에게 물렸다.

하나 나는 그들에게 복수 이상의 속내가 있음을 알았다. 표면적으로는 제 할아버지의 원을 갚는 것이겠고, 실상은 밀국의 불운을 떠넘길 제물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라가 어지러우면 백성들은 왕을 탓하게 되고 불신이 깊어지니 그 화살을 돌릴 과녁이 필요했고, 수치스러운 과거를 가진 홍운영의 자손은 더없이 훌륭한 제물이었다.

“며칠 꿈자리가 사납더니.”

어머니는 내가 받아 온 통행패를 손마디가 하얘져라 쥐어 잡았다.

“시간이 없다, 사혜야. 명일 해가 지는 대로 떠날 채비를 하자.”

집은 언제든 떠날 수 있도록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예정보다 이른 출발. 이별은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법이었다. 마음속에 제멋대로 뻗은 넝쿨을 잘라 내기도 전이었다.

* * *

초장부터 일이 틀어졌다. 현감과 사왕의 무녀가 하루 일찍 무릿매골에 당도한 것이다. 사정을 들어 보니 붉은 반점이 요귀와 긴한 상관관계가 있어, 속히 피해를 잠재우고자 이르게 파견되었다고 했다.

그 새에 병의 증상은 더욱 심해져 게거품을 물고 졸도한 이가 다섯, 까만 넝쿨로 만들어진 요귀의 가시 둥지는 여섯 곳에서 발견되었다.

“마을에 재앙이 닥친 게 분명하오.”

“요귀에게 홍 무녀의 후손을 가져다 바치면 해결된다 하지 않았소?”

우환이 닥치면 늘 비슷한 결론으로 모였다. 마을 사람들의 양손에는 사왕이 뿌린 벽보가 들려 있었다. 불안과 분노는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갔다. 삽시간에 침과 발자국으로 너덜너덜해진 벽보를 보고 있노라면 나는 당장 목이 졸려 질식할 것만 같았다.

“오지 산간 숨어 사는 자들을 무슨 수로 끌어내겠다고. 무녀님이 납셨으니 어떻게든 해결 보겠지.”

“그래, 무려 사왕께서 파견해 주시지 않았나.”

희고 붉은 무복(巫服)으로 전신을 두껍게 감싼 무녀는 이른 아침 화려한 행렬을 끌고 구원자처럼 나타났다. 여인치고 몹시도 큰 키에, 홍색 비단을 늘어뜨린 몽수를 써서 얼굴을 식별하기 힘들었다.

현감의 뒤편에 귀신처럼 미동 없이 선 장신의 무녀를 보고 마을 사람들은 짧게 숨을 들이켰다. 매운 향내와 음산한 기운. 본능적인 거부감이 신경을 건드린다.

저자가 사왕의 수족인가. 나는 낡은 방갓을 정수리에 뒤집어쓰고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 무녀를 염탐했으나, 몹시 건조한 기운만 느껴질 뿐 무엇도 캐낼 수 없었다. 한데 저 긴 검은 머리칼이 어딘가 익숙했다.

기세에 압도당한 마을의 어른들은 사왕의 무녀를 믿어 보자며 쭈뼛쭈뼛 흩어졌다. 나 역시 본능적인 위기감을 느꼈다. 소수이긴 하나 퇴마사들 중에 타인의 기를 민감하게 알아채는 귀기를 지닌 자들이 있다. 무녀의 눈이 보이지 않으나 군중들을 투영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의 시선이 무녀의 눈길을 피해 발치로 꽂혔다. 마주치면 변고를 당하리란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 * *

“사람을 모으시오.”

“예, 예……. 이장에게 그리 일러두겠습니다.”

희끄무레한 주홍빛 등이 어둑한 방을 밝혔다. 무녀의 별실에는 매캐한 향내가 가득했고, 사위에서는 싯붉은 비단이 너울처럼 펄럭였다.

현감은 찝찝한 눈으로 조심스럽게 내부를 돌아보았다.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이곳까지 들어왔으나 사실은 발끝도 걸치고 싶지 않음이 본심이다.

무녀의 검은 머리카락이 의자 발치까지 길게 흘러내렸다. 현감은 귀신이니 요귀니 그런 것들에 무지하나 이자의 급이 보통 무녀가 아님은 눈치껏 알았다.

“마을에 삿된 기운이 가득하니 제사를 거행함이 마땅하겠소.”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탁한 음성이 협탁 위를 웅웅 가로질렀다. 무릇 일을 논의하는 자리에는 예의상 차라도 대접해야 마땅했으나 나무 협탁은 텅 비어 있었다. 정가운데에 홀로 놓인 촛대가 다 녹아갈 때까지 무녀의 뒤에 그림자처럼 선 시종들은 차 시중을 드는 일이 없었다.

목이 말라 괜스레 혀로 입술을 축이고 침을 넘기게 된다. 마음 같아서는 당신 원하는 대로 알아서 하라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지만 일단은 이번 사건의 공동 책임자로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삿된 기운이라 하심은…….”

“말 그대로. 놈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곳에 스며들어 둥지를 틀고 쥐새끼처럼 나올 기회만을 엿보았을 것이오. 해 봤자 50년 안팎이겠지. 근본은 마을을 둘러싼 너른 강일 것이고.”

무슨 소리인지 단박에 알아먹기 힘들었다.

‘뱉으면 알아서 주워 먹으라는 건가.’

하지만 무녀에게 자세히 알려 달라 청할 만큼 현감의 담력은 좋지 못했다.

“무지막지한 강의 요귀가 튀어나올 예정이고, 그게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봉해야 함이 옳다는 뜻입니까?”

“그러하니 향을 피워 놈은 물 밖으로 유인할 것이오.”

제사를 지내 요귀를 달래기라도 하는 줄 알았더니, 되려 향으로 자극하여 강에서 고기 낚듯 건지시겠다?

일생 단 한 순간도 퇴마술을 눈앞에서 본 적 없는 현감조차 멈칫했다. 마을에 당도한 지 하루도 되지 않아 사특한 기운을 간파하고 수까지 짜내는 걸 보니 과연 사왕의 무녀라 하겠으나, 안전한 방법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하면 놈을 끌어냈을 때 제압할 군졸들을 집결시켜야 되는 것 아닌지.”

무릿매골 거민들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요.

현감이 물으며 초조하게 협탁의 모서리를 문질렀다. 그 한마디를 했을 뿐인데 뻗쳐 오는 살기가 직격으로 내리꽂혔다. 얇은 천 틈새로 무저갱 같은 희끄무레한 동공이 물었다.

“나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인가.”

감히 내 앞에서 그따위 의심이 가당키나 하냐고. 냉혈한 눈에 뼛속 깊이 오만함이 엿보였다.

“아, 아뇨.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물론, 현감은 믿었다. 이자에게 의지하는 것 외에 달리 방도가 없기도 하고 애당초 그는 괴물이니 뭐니 무지한 대리인일 뿐이다. 그러나 저 오만방자하고 교활하기까지 한 어투가 백성을 굽어보지 않음은 명백했다.

달리 말하면 한 가지 뜻이었다. 내 소임은 요귀를 퇴치하는 것. 그 과정에서 마을 사람들 몇십이 목숨을 잃건 해를 입건 전혀 상관치 않겠다.

‘무녀란 족속들은 다 그러한가.’

현감은 주먹 쥔 손을 무릎에 문질렀다.

‘뭐, 나야 일만 처리하면 장땡이니.’

연고 없는 마을에서 몇이 죽어 나던 나라님 명만 이행하면 되는 것을. 입술만 달싹이는 현감을 지켜보던 무녀가 픽, 조소를 뱉었다. 의자의 등받이에 기댄 채 외로 꼰 다리가 협탁 아래 긴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진원. 내 이름이오.”

느닷없는 통성명이었다. 과연 무릿매골까지 오는 사흘 동안 이 무녀의 함자도 모르고 있었다.

“놈을 잡지 못하거든 사왕에게 고하시던지.”

혹 자신이 실수하거든 지체 말고 상부에 찌르라. 하나 그런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이니. 끝까지 오연한 자태였다.

“자네는 이장에게 은자나 두둑이 챙겨 두라 이르시오.”

“예, 예…….”

“한데 마을에 사이한 기운이 그것 말고 또 있는 듯한데. 확인해서 나쁠 것은 없겠지. 최근 마을에 이주한 자들이 있던가.”

“이장을 시켜 알아 오도록 하겠습니다.”

“명부를 내오시오.”

무녀의 등 뒤로 천을 덧댄 너울이 스륵 흘러내렸다. 마침내 온전히 드러난 얼굴은 가히 사왕의 무녀들은 절세미인이라는 세간의 소문을 입증하듯 몹시도 묘려했다. 그러나 현감이 놀란 것은 그 때문이 아니었다.

무녀의 눈두덩부터 눈꺼풀 위까지 촘촘히 수놓인 붉은 자수.

사왕을 뜻하는 붉은 난 문양이었다. 핏줄기 같은 붉은 실이 눈 주변에 난자되어 있어 보는 이도 고통에 눈살 찌푸려지는 건 둘째 치고, 앞이나 제대로 볼 성싶었다.

진원은 맥을 못 추리는 상대를 비웃듯 유리알처럼 투명한 동공을 접어 웃었다.

“봉마식 전까지 명령한 바를 제대로 이행해야 할 것이오.”

현감은 정신없이 고개만 까딱였다. 아까 말했던 사이한 기운이 무엇인지 자세히 물으려 했건만 저 끔찍스런 눈알을 보니 머리 바깥으로 휘발되어 버린 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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