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우리는 강의 하류를 따라 계속 내려갔다. 홀딱 젖어 마을 입구에 도착했을 땐 강의 수심이 부쩍 높아져 있었다. 당장에라도 마을을 집어삼킬 것처럼 무섭게 넘실거린다.
마을 어귀에 당도하자마자 거짓말처럼 비가 그치고, 맑게 갠 하늘로 희미한 햇빛이 휘장처럼 쏟아지는 와중에, 이대로 조금만 더 몸 붙이고 있으면 하는 망상을 하였다.
“비가 올 때는 어디 나돌아다니지 말고 집에 있으랬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어머니의 꾸중을 한 바가지 퍼먹었다.
“다리는 왜 절어?”
“급하게 오다 넘어졌어요.”
“가서 씻어라.”
의심 없이 믿는 어머니를 뒤로하고 목간으로 향했다. 목간통에 따뜻한 물이 그득 담겨 있었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뜨거운 물 속에 발가락을 담갔다. 뱃놀이부터 미심쩍은 관리들, 사당에 들렀던 일, 도령에게 덜렁 업혀 산을 내려온 일까지. 양 무릎에 턱을 괴고 닳도록 하루를 곱씹었다.
‘사혜야, 아무것도 남겨 두지 마라. 너는 떠날 사람이니.’
그래, 어머니 말씀이 맞다. 이대로 헤어지면 아마 죽을 때까지 도령, 기운혁과 만날 일이 없을 테지. 나의 주제를 알았다. 매일같이 거리를 좀 둬야겠다고 마음먹으면서도, 하루도 못 가 흩어질 다짐이란 것 역시 알았다.
“…….”
그러다 문득 수면에 비친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염료가 빠져나간 머리카락 끄트머리가 한 움큼 정도 붉었다.
또륵.
물이 가득 담긴 목간통에 물방울 구르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시선이 제 색을 입은 머리카락에 정지했다.
‘언제부터 이런 상태였지? 이동하는 도중 삿갓이 들려 뒷머리로 빗줄기가 들이찼나.’
주의 깊게 살피지 않으면 모를 티끌만 한 변화였다. 혹여나 해서 벗어 둔 옷가지도 살펴봤는데 상의 어깨 부분에 검은 얼룩이 점점이 묻어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색이 변한 머리카락 끝부분을 한참 매만지다가 목간을 빠져나왔다.
* * *
비님이 염치도 모르고 오늘까지 심술을 부렸다. 도령은 제집 뒤뜰의 누각에, 나는 비에 젖은 지우산을 털며 누각의 기둥에 기댄 채였다.
도령의 시종 노릇을 관둔 뒤로 세 번째 찾는 그의 집이건만 도둑처럼 숨어드는 꼴은 변함없었다. 대감님은 이장과 함께 가까운 관아로 일을 보러 가느라 출타하셨단다. 작일, 내가 이장님께 보고한 건을 조사하러 가신 것이다.
귀찮은 티를 팍팍 내며 어기적어기적 가마에 오르는 꼴이 사건을 알아보기보단 떡 상이나 얻어먹으러 가는 심보였다지만.
도령이 입 단도리를 어떻게 시켰는지는 모르겠으나 누각은 한적했다.
“이 서신을 나한테?”
도령은 커진 눈으로 난간에 팔을 기대고 날 내려다보았다. 나는 도령에게 준비한 것을 막 건넨 참이었다.
“도령이 글을 가르쳐 주었으니 한번 써 보았습니다. 별 내용은 없으니 기대는 마세요.”
“네가 전날 받았던 연서 같은 것이야?”
“그런 걸 왜 도령에게 보냅니까?”
나는 오해 말라며 주먹을 쥐었다. 감정을 밟아 다지는 꼴이었다.
도령에 대한 마음가짐이며 태도며 날마다 들쑥날쑥해, 나는 갈피를 잡기 힘들었다. 하나 주기적으로 짓밟아 줘야 이별할 때 번민이 덜하리란 건 확실히 알았다.
“여하튼 그건 조용히 혼자 계실 때 읽어 보시고, 여기서 뭘 하십니까?”
“비가 오니 바깥으로 나가 말을 타지는 못하겠고 장기는 지겨우니. 이리 무료할 수가 없어.”
도령은 입에 지루함을 가득 물고 있었다. 난간 밖으로 이마를 젖히고 비를 맞는 모습이 화폭에서 튀어나온 선인 못잖게 요요하다. 그는 그러고 나를 보고 있었다. 들뜨기 싫어서, 나는 성난 사람처럼 시선을 비틀었다.
“할래?”
내가 눈길을 피하니 그가 바로 앉았다.
“애먼 종들 붙잡고 지금껏 실컷 이겨 먹었잖아요. 물린다면서요.”
“너랑 하는 거잖아.”
귓가에 이슬처럼 고이는 목소리에 마른침을 삼켰다. 욕이라도 씹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결국 신을 벗고 또 끌려가듯 그의 맞은편에 앉혀졌다.
도령이 장기판을 끌어왔다. 나는 그 길쭉한 사내의 손가락을 훔쳐보다가, 거칠거칠한 내 손바닥을 꽉 쥐었다. 사내 손마디가 저리 수선화처럼 고울 건 또 무언가.
“제가 바둑에 재주가 없다는 걸 기억하시네요.”
혼잣말처럼 도령에게 여러 이야기를 쏟아 내던 시절, 섞여 든 것 중 하나였다. 그 사소한 것을 기억하고 일부러 장기판을 가져오셨을까.
도령은 턱을 괸 채로 대답이 없었다. 집중을 하는 것인지, 아까까지 화사했던 얼굴이 무표정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처음엔 불편했던 그 간극마저 콩깍지가 쓰이니 잘난 사내의 다채로운 면면으로 보였다. 그때 돌연 그가 입을 벌렸다.
“그건 뭐지.”
내 품에서 살짝 빠져나온 종이를 시선으로 가리킨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윤후인지 무언지 아직도 쫓아다니나?”
도령의 눈썹이 삐딱하게 치솟았다. 아무래도 연서로 오인한 모양이었다. 물론 내가 여인이란 걸 알고부터 윤후가 말로 할 것을 굳이 글로 안부를 묻고, 내색은 안 하지만 그날의 대답을 바라는 내용을 은근히 돌려 말하기도 하였으나 이 종이는 그게 아니라 어머니가 신청해 둔 통행패였다.
내가 떠나는 것을 원치 않는 도령을 배려해 말 돌린 것인데 애먼 오해만 받았다.
“어느 댁 자제야. 네가 여인인 걸 아는 이가 또 있어?”
“도령도 대낮에 팔각정 한번 순차하시면, 이다음 날부터 수레째로 연서가 날아들 거예요. 그리고 이거 연서 아닙니다.”
“팔각정.”
“예.”
“내가 거길 가길 바라는 것처럼 말하네.”
“왜 아니겠습니까? 혼기가 차셨으니 도령 댁에도 곧 매파가 올 겁니다.”
도령이 낯모르는 여인이랑 노닥거리면 남 일인 척 목만 빼고 구경하기는 힘들 것 같지만 말이다.
“혼기?”
“예.”
“나는 네가 좋다고 몇 번을 말해 줘야 해, 버들아.”
“그런 말씀…….”
해로우니 하지 말라고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난 소중한 벗과 오래오래 함께하고 싶으니 혼기니 무어니 그런 실없는 소리는 하지 마.”
소중한 벗.
맞는 말인데도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내심 기대를 하였나 보다. 사심 없이 웃는 도령을 보고 맞장구쳐 줄 수가 없을 만큼 실망이 큰 걸 보니.
하기야 세상 밖으로 나온 지 얼마 안 된 도령이 혼인이니 뭐니 관심 있을 리 없다. 하물며 그의 쾌유를 축하하는 잔칫날에도 제 여식만 디미는 양반들만 질리게 관람하지 않았던가. 그러하니 나한테 엉겨 붙는 것도 별다른 연유 없이 그저 처음 사귄 친우라서겠지…….
나는 크게 숨을 마신 뒤 화두를 돌렸다.
“한 수만 물러 주면 안됩니까?”
“그럴까.”
그는 어김없이 내게 승리를 양보했다. 목숨을 구명받은 나의 차(莗)는 기세를 회복하고 도령의 왕을 장기판 바깥으로 떨궜다.
“그보다 버들아, 알려 줄 생각 없어?”
“무얼요?”
“네 진명. 버들이 말고.”
한순간 홍사혜라고 답할 뻔한 충동을 지그시 가라앉혔다. 나는 부러 부산스럽게 다 끝난 장기판을 치우며 중얼거렸다.
“진명 같은 것 없습니다. 버들. 버들이에요.”
“아쉬워.”
침묵 속에서 그는 난간 기둥을 손톱 끝으로 툭툭 두드렸다.
쏴아아.
천장에 부딪히는 빗방울 소리가 파도처럼 시끄러웠다. 차라리 비라도 시원히 퍼다 부어 다행이지. 그렇지 않으면 이 정적을 메꿀 길이 없었을 테니.
학처럼 매끈한 사내의 목이 시야로 비쳤다. 떨어질 듯 말 듯 동글게 맺힌 빗방울이 턱을 따라 흘러 튀어나온 목젖에 고여 있었다. 대놓고 그걸 바라보다가 기습적으로 시선이 엇갈렸다.
“줄 게 있어.”
여길 온 목적도 접때 도령이 내게 선물하고자 하는 물건을 받기 위함이었다.
“가져.”
도령이 건넨 것은 내 눈동자 색과 똑 닮은 귀한 홍보옥이었다.
“왜 이런 걸 제게 주는 겁니까?”
“어울릴 듯해서. 네가 푸른 연등을 사 주었으니 답례야.”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값어치부터 몇십 배 차이가 나는 것을. 자세히 보니 보옥에 금이 가 있고, 벌어진 틈새는 표면보다 더 영롱한 옅은 붉은빛의 결정체가 석류알처럼 자글자글 일어나 있었다.
대게 흠이 난 보석은 값어치가 떨어지나 이 같은 경우엔 달랐다. 특이하고 아름다운 모양에 장신구로서의 값어치가 몇 배를 호가한다.
“답례라면 충분히 받았습니다. 제게 글도 알려 주시고, 또…….”
“네 거야, 버들아.”
저런 걸 받아 보았자 함께 갖춰 입을 의관도 없는데.
거절하려 했으나 도령은 내민 손을 거두지 않았다. 외려 더 가까이 들며 팔 아픈 시늉을 했다.
“받아.”
요지부동이었다. 마치 애초부터 그것의 주인이 나인 마냥, 받지 않으면 받을 때까지 나를 누각에 묶어 둘 태세였다.
그때 도령의 전각에 상주하고 있던 시종 하나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나의 시선이 그리로 쏠린 틈을 타 도령이 내 바지 주머니로 빠르게 홍보옥을 굴려 넣었다. 그 뒤에 태연히 시종에게 돌아섰다.
찜찜하게 볼록 튀어나온 바지 주머니만 매만지는데.
“사왕?”
시종에게 귀엣말을 전해 들은 도령이 눈썹을 찌푸렸다. 사왕. 귀에 똑똑히 박히는 이름에 내 손길도 동시에 멎었다.
“이곳으로 온다고. 확실한 건가?”
“예, 방금 바깥에서 전해 듣고 오는 길입니다요.”
벌떡 몸이 솟구쳤다.
“버들아.”
종과 대거리하던 도령이 무슨 일이냐는 듯 내게 눈짓으로 물었다.
사왕. 홍운영의 후손이라는 이유만으로 나의 오라버니를 잡아간 사람.
차마 그리 설명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굳어 버린 정신을 녹인 것은 어깨에 부드럽게 닿은 사내의 손길이었다. 이 온기에 허우적대다가 맞닥뜨린 현실은 날갯죽지가 얼어붙을 만큼 찼다.
나는 비틀대다가, 인사도 잊고 그 길로 집까지 내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