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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27/86)

27화

우기(雨氣)를 품은 바람이 강하게 불어닥쳤다. 사당의 기와 아래 매달린 붉은 부적들이 매섭게 흔들렸다. 향 피워 줄 이가 없을 텐데, 재가 섞인 씁쓰름한 냇내까지 함께 맡아지는 기분이다.

“인적 드문 산중의 폐허치고 기운이 음습하지 않은 것이 없다던데.”

도령은 안을 구경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나는 말릴까 하다가 호기롭게 앞서 걷는 도령을 따라 사당 문턱에 발을 들이밀었다. 거기엔 얼룩덜룩한 화강암을 깎아 만든 물고기의 반신상이 흉물스럽게 세워져 있었다.

“소루강의 신을 봉안하는 사당인 모양입니다.”

과거엔 이 같은 물고기 석상을 신줏단지처럼 모셔 둔 사당이 무릿매골 곳곳에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어째서인지 기씨 대감이 정례 제의를 하는 강 하류에 딱 하나 남은 상태고, 연등제 수레 위에 올려진 것은 싸구려 돌을 깎아 만든 모사상이었다.

한데 이것은 ‘진짜’였다.

“우리 그때 볶은 콩을 고기 입 안에 넣었잖습니까. 한데 모사상이라 가능한 일이고, 진짜배기에는 엽전을 넣고 제대로 빌어야 소원을 들어준답니다.”

“그래?”

“예. 그 입에서 엽전을 빼 가려던 도둑놈이 하나 있었는데, 안에 필히 들었어야 할 엽전은 없고 물만 가득 채워져 있었다더라고 하니, 신이 소원을 들어주는 대가로 돈을 챙긴 것일지도요.”

돈 밝히는 신이라니. 가느스름하게 눈을 뜨고 안을 들여다보자 쿰쿰한 물이 일렁이는 게 보였다. 오래 고여 있어 썩은 내가 진동한다.

퐁―

수면이 일렁이는 맑은 소리가 귀에 떨어졌다. 도령이 엽전을 물고기의 입 안에 떨어뜨린 것이다.

“방금 나도 소원을 빌었어.”

그러니 너도 원하는 게 있으면 빌라며, 내게도 하나 내주었다.

꺼림칙하긴 하나, 신당까지 왔는데 공양도 않고 내빼는 것은 가뜩이나 무녀 피가 흐르는 나로서 예의가 아닌 것 같기에 옜다 먹어라, 엽전을 떨궜다. 볶은 콩이나 던져 댔을 때와 느낌부터가 달랐다. 이유 없이 으스스하다.

나는 어머니와 무사히 무릿매골을 벗어나 다음에 정착할 곳에서도 편히 살게 해 주십사, 동전이 가라앉기 전 재빠르게 빌었다. 그리고 하나 더.

이번에는 목이 쉬이 열리지 않았다. 소원을 두 개씩이나 빌면 욕심 많다며 괘씸히 여기실까.

‘기운혁. 저 이가 건강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래도록 살아서, 나이가 차면 혼인도 하고, 자식들과 지어미 끼고 오순도순 남들 사는 만큼 장수했으면 좋겠어요.’

어머니의 예언과 상반되는 염원을 마음을 담아 빌었다.

시린 바람이 목덜미에 달라붙었다. 여름 바람이 한겨울의 그것처럼 어깨를 바짝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사당 안의 기온이 바깥보다 낮고 습해서일까. 싸늘한 한기에 몸을 떨자 그 순간 미적지근한 손바닥이 내 어깨에 누르듯 얹혔다.

“무슨 소원 빌었어?”

“입 밖으로 내면 신께서 듣지 못한다잖아요.”

딸랑, 딸랑. 스산한 방울 소리가 바람과 화음을 자아낸다. 나는 석상의 눈높이에 맞게 굽혔던 무릎을 펴고 상체를 일으켰다.

족히 100년은 되어 보이는 사당의 기둥을 지탱한 초석이 흙 위에까지 드러나 있었다. 벗겨지고 부식된 석상의 눈에는 눅눅한 이끼가 껴있고, 관리가 되지 않은 천장에는 구멍이 뚫려 있었다. 썩은 나무판자처럼 변한 제단을 보며 소원이 아닌 저주를 입는 건 아닐까 하는 노파심이 들었다.

이끼 낀 물고기의 눈이 꼭 나를 향해 교활히 웃는 것 같아, 괜한 짓을 했나 오싹함마저 드는 때에.

쿠르릉!

반갑지 않은 우레 소리가 내리꽂혔다. 그사이 더욱 짙어진 잿빛의 먹구름이 하늘 위에 잔뜩 고여 있었다. 사그락, 바깥의 부적들이 촉새의 날갯짓처럼 다시금 매섭게 팔랑거린다.

“본격적으로 비가 퍼붓기 전에 어서 돌아갑시다.”

도령은 제단에 다리를 걸친 채 소루강 신의 아가미를 쓰다듬으며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

“버들아, 네 소원이 궁금해. 말을 해야 신께서 들어주지. 안 그래?”

사아악, 거칠거칠한 석단 위로 비단 쓰는 소리가 들렸다.

“소원은 가슴 속에 품다 신에게 전하는 것이에요. 안 그럼 달아나 버릴 테니까.”

어머니의 가르침 아래 자라온 나는 일생을 그렇게 믿고 살아왔다. 괜히 입 밖에 내었다가 밉보여서 불행이 굴러 들어오면 어쩌나. 나의 경험담에 근거한 것이었다.

유랑 생활을 하면서도 우리 모녀는 꼬박꼬박 각지의 사당에 들렀는데, 뭣 모르고 어머니에게 안기고 싶다며 소리 내어 빈 적이 있다. 소원이 사람 귀로 들어간 탓에 신께서 듣지 못하셨나 보다. 아직까지 내가 어머니의 품속 온기를 모르고 살아온 걸 보면.

그러는 도령은 무엇을 빌었을까. 나처럼 무심한 부모와 다복하게 지내게 해 달라 빌었을까. 혹은 나와 관련된 것일까. 입이 근질근질하였으나 참았다.

사당을 빠져나오자마자 빗방울이 떨어졌다. 나는 얼른 삿갓을 머리에 썼다. 한데 금방 산을 빠져나가리란 예상과 다르게 길이 험했고, 들찬 빗발은 갈수록 굵어졌다.

이러다가 머리에 쓴 것도 무용지물이 될까 싶어 초조하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도 문제지만 아직 병세가 호전되지 않은 도령이 더 문제였다.

차라리 사당에서 비를 그치기를 기다리는 게 나을까. 저 음침한 곳에 더 머물고 싶지 않아 서두른 것인데. 돌아가기엔 꽤나 먼 거리인데다 산길이 보이질 않는다. 서두를수록 숲 안을 빙글빙글 도는 듯한 착각이 오싹하게 척추를 타 넘었다.

“길을 잃은 것 같아.”

헐떡이며 팔등으로 인중을 닦고 있으니 간지러운 말소리가 귀에 붙는다. 이제 어쩔 것이냐고 묻듯이, 도령은 얌전히 내 다음 행보를 기다렸다. 이 상황에 재미라도 느끼는 건가. 입꼬리가 살며시 찌그러진 채였다.

“이쪽으로 건너오세요. 저기 자작나무 보이십니까? 우선 저 아래로 가서 비부터 피한 다음…….”

다그치기도 전에 삽시간에 땅바닥이 흙탕물로 진탕이 되었다. 퍼붓는 비를 헤치고 정신없이 그를 잡아끌던 찰나였다. 뚜둑, 잔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울리더니 발밑이 훅 꺼졌다.

“악!”

산짐승을 잡기 위해 파둔 구덩이였다.

아래로 추락하려는 내 몸을 도령이 반사적으로 붙들었다. 하나 워낙 경황없이 일어난 탓에 힘이 충분치 않았다. 빗물로 미끄러운 손아귀가 순식간에 빠져나가고, 나는 그대로 비탈을 굴러 흉하게 엎어졌다.

“아으…….”

접질린 발목이 눈물을 쏙 빼놓았다. 발목을 부여잡으며 끙끙대고 있으니 도령이 한달음에 달려 내려왔다. 그는 주저앉은 나를 따라 허리를 숙이고 새파랗게 부은 발목을 살폈다.

“이러면 걸을 수 없겠어.”

“그렇다고 여기서 넋 놓고 주저앉을 순 없잖습니까. 부축만 해 주시면 어떻게든 걸을 수 있으니까…….”

“그러다가 몸이 더 상하면 어쩌려고?”

도리가 있습니까? 반문하려는데 내 허리를 채가는 손이 더 빨랐다.

“……저기, 도령.”

“부축으로 되겠어? 아파서 얼굴도 못 펴잖아 지금.”

내 발목을 살피는 눈은 화가 나 있었다. 나는 황망히 눈을 뜬 채로 도령의 너른 어깨에 짐짝처럼 올려졌다. 정신을 차려 보니 그러했다.

기운혁의 완력이 이리 좋았던가. 내가 덜 자라 아무리 키가 작다곤 하지만 이리 쉽게 둘러메는 걸 보면 병자여도 사내는 사내인가 보다.

“비가 그칠 것 같지 않으니 이대로 하산하자.”

“이런…… 이런 꼴로요?”

“하면?”

“죄송합니다.”

“무엇이.”

“그냥…… 도령도 미령하신데 이 많은 비를 맞으며 저까지 업고 가시느라 고생하잖아요.”

“고마운 건 고맙다고 해.”

“……고맙습니다.”

그는 쌀 포대처럼 나를 소중히 들쳐 안고 큰 보폭으로 숲길을 따라 걸었다. 우스꽝스러운 몰골로 품에 얹혀 있는데도 마치 어머니의 무릎처럼 기묘한 안정감을 느꼈다.

‘따스해서 그러한가.’

나도 모르게 편한 자리를 찾기 위해 꿈틀거리며 팔로 그의 젖은 목을 감싸 안았다. 기억도 나지 않는 유년 시절을 제하곤 누군가에게 이리 안기는 게 처음이라 참 별스런 것이 다 생소하고 떨렸다.

손바닥으로 살짝 더듬어 본 어깨는 단단하면서 부드러웠다. 비단옷에 가려진 가슴팍은 보기보다 넓어서 보듬어 품기에 딱 좋겠다 싶었고.

사내라고 시위하듯 툭 튀어나온 울대뼈까지 팔등 밑으로 세세하게 느껴지자, 나는 어지럽게 뛰는 심장을 무시하기 위해 윤후의 귀여운 쌍둥이 여동생을 떠올렸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 패배할 싸움이었다.

“불편해?”

덥석 그의 옷깃을 움켜쥐자 발걸음이 늦춰진다. 차라리 그가 나를 보지 못해 다행이었다. 면경에 비춰 보지 않아도 내 꼴이 어떨지 짐작이 되었으니까.

이렇게 좋다는 티를 내서야 둔치라도 알아챌 것이다. 들키기 싫은 한편 알아주었으면 싶었다. 이 사람이 내 마음을 눈치채 주었으면 좋겠어. 나는 간질거리는 입술을 꾹 사리물고 더듬더듬 물었다.

“안 무겁습니까?”

“너도 밥 제때 안 먹지?”

“생활고까지 까발려진 마당에 더 숨길 것도 없어서 하는 말인데요, 안 먹는 게 아니라 못 먹는 것이랍니다.”

“우리 집 오면 배불리 먹여 준다니까. 지금은 이게 살인지 뼈인지.”

“만지지 마세요.”

그림 좋게 업고 가든지 하시지. 누가 보면 납치라도 당하는 행색이다. 하기야 마을 다 와 가는데 사내끼리 다정히 업힌 꼬락서니를 보이면 그것대로 난감하겠지만…….

나는 도령의 목에 꼭 매달려 감처럼 익은 뺨을 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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