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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26/86)

26화

신기하기도 하지. 1년 전만 해도 약 한 사발 갖고 죽네 마네, 눈만 마주치면 시비를 걸고 들들 볶고 오만 짜증은 다 쏟아 내던 도령과 단짝패가 될 줄은.

그가 나를 의지하고 있음을 안다. 그리고 나 역시 들어 주는 이 없는 속마음을 도령의 방문 앞에서 줄기차게 게워 낼 때부터 그에게 등을 기댔는지도 모르겠다.

이름을 받아먹은 도령은 몹시 기분이 좋아 보였다. 운혁, 운혁, 연분홍 입술이 수줍게 벌어지고 다물린다. 혀는 그 안에서 음미하듯 제 이름을 굴리는 중이었다.

그는 허리를 기울이고 내 손을 붙잡아 살며시 제 뺨에 가져다 댔다. 꼭 그래야 하는 것처럼 가만히 눈을 감았다.

“도령.”

“고마워서.”

자꾸 이러지 마셨으면 좋겠는데. 함부로 잡지 마시라고. 그러다가 내가 막무가내로 당신한테 마음을 줘 버리면 어쩌냐고.

절반 이상은 넘어간 마음이나 나는 꿋꿋하게 외면했다. 하지만 부드러운 사내의 피부가 손등에 문질러질 동안 떨쳐 내지 못했다. 보기 좋은 눈꼬리가 날 보고 휘어질 때는, 설렌 것은 둘째고 아픈 것처럼 가슴 한편이 짜르르했다.

나는 어린 소년 소녀들이 겪는 첫 연모 따위 평생 모르고 살 줄 알았다. 당연한 것들이 내게는 당연하지 못할 때가 많았으니까. 결국 인정하니 후련은 했다. 더불어 무던함을 가장하려는 노력이 아무짝에도 쓸모없게 되었다. 별수 없이 귓등에 열기가 꼬여 드는데, 그 뜨거움마저 기꺼웠다.

나는 그에게 붙잡힌 손을 떨면서 목소리나마 뻣뻣하게 다렸다.

“한 가지만 약조해 주세요. 제가 떠나고서도, 그 요귀들과 손을 잡지 않겠다고요. 도령이 외로울 때 다가와 줄 사람은 저 말고도 많을 겁니다.”

“지금도 돈을 바라고 몰려들긴 하지.”

“아니요, 진정으로 마음을 나눌 벗이, 정인이 어딘가에서 꼭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한데 도령은 말이지요, 오래 부대끼지 않으면 오해받기 쉬운 인상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다해 웃으세요.”

“네가 없는데 웃을 일이 있을까.”

“저한테 할 때처럼 거짓 웃음 억지 미소 걸지 말고, 마음을 다해 상대를 대하면 위선 없이 도령을 따르는 자들이 분명 있을 겁니다.”

매가리 없는 그의 손을 잡아다 가락지처럼 단단히 얽었다. 그는 물끄러미 겹쳐진 손을 보다가 예의 미소를 띠고 물었다.

“내가 가짜로 웃는 듯해?”

“눈만 휘고 입은 굳었는걸요.”

말을 뱉자마자 부자연스럽게 끌어 올라간 입술이 허물어졌다. 껍데기 같은 무표정한 시선이 다음으로 내 얼굴에 달라붙었다. 내가 이름을 지어 주겠다 하였을 때처럼 그는 눈꺼풀도 떨지 않고 죽은 듯 그렇게 나를 응시했다.

“모를 줄 알았지요? 저처럼 매일을 사람 틈바구니에 섞여 살면 대강 눈에 보입니다.”

“사람.”

“보세요, 이렇게.”

충동적으로 손을 뻗고 말았다. 한일자로 굳어 버린 그의 입꼬리를 엄지로 조심스레 당겨 어여쁜 호를 그려 주었다. 고하자면 사심을 섞은 몸짓이었다.

하나 그는 알고도 모르는 것처럼, 부끄러울 정도로 빤히 내 눈만 들여다보았다. 꼭 그 안에서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도령은 무례하다며 털어 내는 대신 양손으로 내 손목을 붙잡았다.

“내가 진심으로 너를 대해 주었으면 좋겠어?”

“그리 말하니 섭섭합니다. 그간 장난처럼 대했다고 실토하라는 뜻이 아니었는데.”

나는 툴툴거리는 척 손을 빼려 했으나 찐득한 아귀힘이 놓아주지 않았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

“예?”

기분 탓일까. 도령을 감싸고 있던 공기가 한순간 싸늘해진 것은. 잡힌 손목이 슬슬 아파 왔다. 내가 눈을 찡그리자 그는 곧바로 힘을 떼어 냈다.

“……여하튼, 제가 가더라도 건강하시고, 잔병치레도 말고, 도령 댁 잘난 형제들처럼 대접받으면서 떵떵거리며 사시라구요. 귀한 분이니까. 아셨지요?”

“말했잖아. 네가 없는데 무슨 소용이냐고.”

“오해하니까 그런 말은 삼가시고요!”

“난 너만 있으면 되는데. 거짓말처럼 들려?”

“도령……!”

미칠 노릇이다. 내 이향 소식을 전해 들은 뒤부터 기세가 묘하다 했더니 작정하고 날 묶으려 든다. 내가 여인임을 알고서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던 사람이.

눈칫밥을 잔뜩 주었으나, 이대로 가다간 조동아리가 사달을 낼 것 같았다. 왜 제게 그런 말을 하시냐고, 다정한 말씨를 들을 때마다 몹쓸 마음이 돋아나는 걸 아시냐고.

질끈 눈을 감았을 때였다.

“……버들아, 저기 누군가 있어.”

파스락.

멀지 않은 곳에서 인기척이 났다. 지금 우리가 배를 정박한 곳은 강가를 따라 우거진 숲의 어느 지점이었는데, 그 끝에 수상한 차림을 한 사람과 장정 두엇이 보였다.

방갓을 눌러쓴 긴 검은 머리칼의 여인. 이 바닥에서 생판 처음 보는 옆얼굴이었다. 검은 천으로 온몸을 감싼 여인이 병 안에 든 액체를 강물로 쏟아붓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쓰는 강물에다 무얼 하는 거지?’

강물을 은빛으로 물들인 액체는 곧 물살에 섞여 흔적을 감추었다.

“도령, 저들은…….”

피잉!

말을 끝맺기도 전에 도령과 몸을 숨긴 곳으로 화살이 날아와 꽂혔다.

“읍!”

튀어나오려는 비명을 커다란 손이 덥석 눌렀다. 그 직후 순식간에 잡아채인 몸이 다부진 품속으로 굴러떨어졌다. 도령이 내 입을 틀어막고 검지를 제 입술에 올렸다.

“관아에서 파견한 관리들이야.”

“……관리?”

어머니와 나를 쫓는 추노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등줄기로 쫙 소름이 끼쳤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 붙은 벽보도 그렇고. 저들이 다녀간 걸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한데 대체 강둑에서 무얼 하는…….”

“우선은.”

그가 내 등을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며 멀리서 서성대는 관리들을 건너다보았다.

“저들이 화살을 회수하러 오기 전에 숲 쪽으로 빠져나가는 게 좋겠어. 들켜 봤자 좋은 꼴은 못 볼 테니.”

“백성을 공격하는 관리는 듣도 보도 못했습니다. 왜, 왜 저희가 숨어야 하지요?”

“버들아. 이 화살촉, 독이 묻었어.”

“예……?”

그가 턱짓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로 코앞의 나무를 쩍 꿰뚫은 화살촉의 표면이 푸르스름하게 녹슬어 있었다. 나는 숨을 삼키며 도령의 팔을 붙들었다. 그가 나를 홱 당겨 숨겨 주지 않았다면 그 길로 황천행일 뻔하였다.

아니, 그 이전에 백성을 위해 일하는 관리들이 느닷없이 활부터 겨눌 이유는 무엇인가.

“도령, 고, 고맙습니다.”

심장이 정신 사납게 뛰었다. 죽음의 공포는 숱하게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은 것이었다. 새롭게 두렵고, 끔찍스럽게 무서웠다.

“곧 비가 올 것 같아.”

그럼 우리의 발자국도 묻히겠지.

그가 사납게 떠는 내 어깨를 보듬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다 돌연 가깝게 고개를 숙였다.

“지금은 어때.”

“무슨…….”

“널 대하는 태도가 진심으로 느껴져?”

이 상황에서 아까의 대화를 끄집어내는 도령의 간담이 대단하였다. 내가 말을 잃으니, 사내의 입꼬리가 시원스럽게 휘어졌다. 새뜻한 미소에 날벼락 맞은 심장이 진정되었으니, 긴장을 풀어 주려는 의도라면 성공이었다.

도령은 괴인의 동향을 힐끗 확인한 뒤 손을 내밀었다.

“버들아, 이쪽으로.”

나는 그를 따라 덤불에 가려진 숲길로 피신했다.

“이대로 괜찮은 걸까요?”

“저쪽도 사정이 급박해 보이니 우릴 쫓진 않을 테지.”

나를 달래려는 말인지 진심인지는 모르겠다. 그런 걸 도령이 어찌 아냐고 따져 물을 기운도 없었다. 긴장으로 와들와들 떨려 제대로 보행하기도 힘들었으니까.

우리는 교란을 위해 덤불을 헤집으며 더 깊은 숲속으로 이동했다. 쫓아오는 이가 없단 걸 확인하고서야 땀 젖은 몸을 널브러뜨릴 수 있었다.

“관리라는 자들이 남의 마을까지 와서 무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장 이장님께 알려야겠어요.”

“그 노인네라고 무얼 알까. 별일 아니라며 돌아서서 까먹겠지.”

“그래두요.”

관리의 복장은 맞으나 그치들 하는 짓이 딱 들통난 밀렵꾼이지 않나. 이상한 병을 강에 뿌린 것도, 확인도 않고 대뜸 우릴 공격한 것도. 나는 찝찝함을 삼키며 화살이 꽂힐 뻔한 목덜미를 매만졌다.

그가 내 옆에 털썩 몸을 붙이고 얼굴을 쓸었다.

“네가 신분을 속이고 옮겨 다니는 까닭도 저런 자들과 관련이 있겠지. 한 번 떠난 곳은 다시 오지 않겠고.”

“보통은 그렇지요.”

기운을 차린 내가 이마를 문지르며 답했다.

“한데 도령은 내가 왜 쫓겨 다니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물으면 답해 줄 건가?”

나는 왜 그때 한순간 갈등했을까. 목숨을 구해 주었다고, 달곰한 몇 마디를 속삭여 주었다고 그새 간이고 쓸개고 빼다 바칠 은인쯤으로 여기고 있나.

역적의 자손이오, 풍림의 무녀요, 내 이름은 버들이가 아니고 홍사혜요.

정말 어쩌란 건지, 간특한 마음에다 대고 윽박지르고 싶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도령은 그럴 줄 예상했다는 듯 의문을 물고 늘어지지 않았다.

“도령의 말대로 곧 비가 오려나 봅니다.”

빽빽한 잎사귀 너머로 먹구름이 구물거렸다.

“여기가 어딘지 모르니 문제지만, 가다 보면 길이 나올 겁니다.”

“그래.”

한숨 돌리고 나서 우리는 나뭇가지를 치우며 걸어갔다. 오래전 사람의 발길이 끊어졌는지 정돈되지 않은 길뿐이었다.

얼마 안 가서는 낡은 사당을 발견했다.

“왜 여기에 사당이 지어졌는지 모르겠지만, 여기까지 사람이 드나들었다는 증거니 내려가는 길도 분명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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