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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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분을 만나셨군요.”
“흠이라면 무모하단 점일까. 아직도 나는 그자가 남긴 말이 생생해.”
“어떤 말입니까?”
“나보고 가엽고, 딱하다고 하였던가.”
“그분은 어쩌다 도령을 가르치기를 그만둔 겁니까?”
“내 아버지께서 무언가 마음에 안 찬 모양이겠지.”
“흠, 그러십니까.”
나는 가볍게 대꾸하고 풀밭에 드러누웠다. 아침 일찍부터 점심나절까지 체력을 기를 겸 뒷산으로 나가 도령과 약초를 캐러 다녔더니 전신이 찜탕에라도 들어갔다 나온 마냥 땀범벅이었다.
뼛골부터 양반인 도령은 한량처럼 숲의 정취를 즐기며 내 뒤를 따랐으나 내게는 생업이 걸린 문제라 움직임이 바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고로 지금의 나는 채 마르지 않은 찝찝한 땀을 흘리며 땡볕 아래 말라가는 중이었다.
“씻을까?”
“아니요.”
“사내끼리 뭐 어때. 보는 사람도 없고.”
그는 내가 여인임을 숨기고 다닌 걸 알고 난 뒤부터 이런 식으로 놀리길 즐겼다. 뻔히 아는 사람이 사내끼리는 무슨.
“도령께서는 양반집 자제라는 사실을 간간이 잊고 계신 모양입니다. 보는 눈이 이리 많은데. 꽁꽁 싸매도 모자랄 판인 것을.”
도령은 눈을 깜빡이다 내 어깨 너머를 스윽 건너다보았다. 이상한 소리로 웃길래 왜 그러는가 싶어 뒤를 돌아보니 옹기종기 수박씨를 뱉던 노인들이 죄 일터로 돌아간 뒤였다.
“저기 나룻배가 있어. 뱃놀이라도 할까?”
손끝이 가리킨 곳에 주인 없이 버려진 배가 접시처럼 떠다녔다.
흥이 동한 도령은 어여쁜 눈을 빛내며 나를 보았다. 눈은 집중하고, 뺨은 복숭앗빛이 되고, 입술은 연실처럼 휘고. 연등제 때도 저리 미혹된 표정이었지. 쏟아지는 빛 아래에서 싱그럽게 웃는 그의 얼굴은 내게 인처럼 각인되어 도무지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남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어쩌자고 이런 사소한 것 하나하나 생각이 나는지.
“오후에 비가 온다더랍니다.”
해서 이만 집으로 돌아가자 하려고 했는데 좋아하는 도령을 보니 마음이 속절없이 흔들렸다. 목에 맨 삿갓의 끈을 만지작거리며 배를 끌고 오는 도령을 바라보았다.
“잠깐만 타다 가자. 어떠해.”
“음.”
강가에 빠져 죽을 뻔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근자에 요귀의 출몰이 전무하다지만…….’
혹시 모를 일에 걱정이 되었으나 늘 호기심이 앞서 있는 도령은 개의치 않아 했다.
“올라와.”
나의 갈등을 귀신같이 짚고 배를 내 앞으로 떠밀기까지 한다. 버선코처럼 앞뒤가 곡선이고 밑이 판판한, 사람 두셋은 너끈히 얹힐 배의 고물 귀퉁이에 햇볕을 가리는 작은 지붕 같은 것이 세워져 있었다.
저 은근한 목소리도 그렇고, 또 내 발목을 살살 잡아당겨 대니 더는 버텨 낼 재간이 없었다. 거절할 핑곗거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못 이기는 척 배에 엉덩이를 걸쳤다. 오르는 요령이 부족해 기우뚱 넘어갈 뻔한 걸 도령이 붙잡아 주었다. 도령은 내 허리를 감은 제 팔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러다가 이상한 장난이 동했는지 의뭉스럽게 웃더니, 아예 양팔로 내 허리를 뒤에서 슬몃 끌어안았다가 놔주는 게 아닌가.
“장난치지 마세요.”
병을 앓아서 몸도 비리비리할 줄 알았는데, 사내라고 허리에 닿은 팔뚝이 단단했다. 아직 키가 덜 자랐는데도 내 머리 꼭대기에 그의 시선이 있었고, 희롱하는 입꼬리는 장난기 빼면 시체였다.
대뜸 안겼다 풀려난 난 편치 못한 얼굴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실실 웃는 얼굴이 몇 마디 더 쏴붙이려던 내 입을 막았다.
그 뒤로 도령은 유유자적 풍경 구경에 여념이 없는데, 나는 어쩐지 잘 집중이 되질 않아 애먼 배 밑창만 흘겨보았다. 물론 그간 놀다가 가벼운 접촉은 일상이었으나 그때에는 도령이 날 사내로 알아서였고. 방금은 무어라고 해야 할까. 조금…….
“버들아 저길 봐.”
도령이 아래에 처박힌 내 턱을 검지로 살짝 밀어 옆을 보게 했다. 곱게 갈린 햇볕이 설탕 가루처럼 뿌려진 소루강에 덩달아 입이 벌어졌다.
이리 절경일 줄은 처음 알았다. 해괴한 전설, 께름칙한 소문에 가려져 항상 음침하게만 보아 왔던 강인 것을.
“아름다워요.”
새삼 뱃놀이가 처음이란 것 역시 깨달았다. 한 달 후 도곡에 도착해 질리게 배를 탈 예정이었으나 그때 보는 것은 이런 풍경이 아닐 테지.
나는 턱을 괴고 잔잔히 율동하는 물살과 은빛 비늘을 두른 물고기들이 쏜살같이 헤엄치는 광경을 구경했다. 앞에서는 물풀 향을 풍기는 사내가 노를 젓다 말고 날 보고 있었고.
“물이 두렵지는 않습니까?”
물에 빠져 죽을 뻔한 고비를 두 번이나 넘긴 도령이었다. 그 일의 후유증으로 매병까지 앓았으니 강을 두려워할 법한데 말이다.
‘나는 자다가 작은 소리만 들려도, 잠결에 문밖에서 희미한 불빛만 어른거려도 어머니와 나를 뒤쫓는 추노꾼일까 봐 벌떡 놀라 깨는데.’
실제로 그런 일을 몇 번 겪다 보니 굳어진 버릇이었다.
“물 따위가 무서운 게 아니지.”
작게 뇌까린 그가 노를 내려놓았다. 경치 좋은 둑에 배를 대고 매끈한 손을 내민다.
“너도 알지 않아?”
“무엇을 말입니까?”
“사람. 무섭잖아.”
도령은 가끔 이해 못 할 말을 하였다.
나는 도령의 손을 붙잡고 천천히 배에서 내렸다. 나무배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발밑에서 작게 울린다. 나는 그가 적당한 나무에 노끈을 둘러매는 동안 도령이 남기고 간 청량한 물풀 향을 맡다가 민망해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언젠가 너도 무릿매골을 떠나겠지.”
“왜, 여기서 평생 살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한 해 전 어머니와 함께 이곳에 왔을 때처럼, 머지않아 어딘가로 떠나겠지. 네가 신원을 숨기며 살아가는 이유와 관련이 있겠고.”
묻는 것도 아닌 확신이었다.
“이장에게 들었어. 네 어머니가 통행패를 요청하였다고.”
“아.”
“언제야.”
“…….”
“언제 나를 떠나?”
고요한 눈동자로, 그가 물었다. 통행패도 보았으니 거짓말도 막혔고, 나중에 알려 봤자 실망만 커질 테니 차라리 솔직해지는 게 낫겠다.
“아직 모르겠습니다. 날이 추워지기 전에는 떠나야겠지요.”
당초 도령에게 따로 작별 인사를 할 생각은 없었다. 비단 이 사내뿐일까. 무릿매골에서 나와 짧게나마 추억을 남긴 누구와도 떠난다는 말을 않고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질 작정이었다. 비록 소식이 빠른 권력가의 공자에게 들켜 버렸으나.
“언제가 될지 모른다고?”
“예.”
“그럼 떠나서도 날 잊지 마.”
그는 엉뚱한 말을 하고 웃었다. 여전히 우린 손을 잡은 채였다. 누군가에게 이런 낯간지러운 말을 들은 것은 처음이라 나의 반응이 느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잊겠지. 하면 어찌해야 네가 날 오래 기억할 수 있을까.”
그는 진지하게 궁리하기 시작했다. 함께한 시간이 암만 길어도 눈에서 멀어지면 쉽게 잊히지 않느냐며. 그는 포개있던 내 손을 놓아준 뒤, 정강이까지 웃자란 풀을 헤치고 강둑 위로 걸어 오르기 시작했다.
저 너머에 내가 와 보지 않은 솔숲이 펼쳐져 있었다. 무릿매골에 살면서 단 한 번도 와 본 적 없는 낯선 숲. 배를 타고 어디까지 흘러왔는지 모르겠지만 육안으로 저 멀리서 초가집 능선이 보이니 돌아가는 길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기억하는 방법. 알아요.”
무의식적으로 입이 열렸다.
“도령의 이름. 내가 지어 주고 떠나도 됩니까?”
그의 얼굴에서 일순간 표정이 사라졌다. 그리 파격적인 방법이 아닌데도, 그는 마치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 바람이 멈춘 것처럼 서 있었다.
시리도록 차가운 눈. 이런 반응은 나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싫어할까.’
나처럼 신분도 불분명한 부랑자가, 아비 잃고 남을 속이며 사내 행색이나 해 대는 평민이 이름을 지어 준다고 큰소리쳐서 불쾌하였나.
“정 없이 도령 할 게 아니라 부르는 이름이라도 있으면 사이가 더 도탑지 않으렵니까.”
변명처럼 덧붙이는 나를 보고도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해서 도령의 기세가 차가운지 뜨거운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할퀴는 시선은 본 적 없이 싸늘한데, 그 안에 뛰쳐나오기 직전인 으슥한 열기가 웅크리고 있었다.
“도령.”
“있었어, 이름.”
“참말요? 무엇입니까?”
“잊어버렸지.”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칩거 생활을 오래 해 불러 주는 이가 없게 되었다는 은유인가.
그는 내 눈을 피했다. 자세한 대답도 피했다. 습기를 품은 바람이 두 뺨에 미지근한 기운을 흩뿌리고 달아났다. 땀은 다 식어 버렸고, 끈적한 몸에서는 눅지근한 강바람 내음이 묻어 있었다.
사그락.
도령의 얼굴에 드리운 얼룩덜룩한 나뭇잎 그림자가 바람이 부는 대로 일그러지고 흩어졌다.
“저는 지금껏 도령이 이름도 없는 줄 알고 살았는데.”
“맞아.”
아까는 있었다면서, 또 저 영문 모를 소리.
발끝에 스치듯 닿은 도령의 신을 툭툭 긁으면서 재촉하니, 그가 무표정으로 입술을 움직였다.
“이젠 내겐 없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버들아, 네가 줘.”
쉼 없이 불러 주는 저 이름이 홍사혜였으면 차라리 기쁠 텐데.
우스운 일이었다. 그가 내 기억 속에 남고 싶어 하듯 나 역시 오래도록 그의 기억 귀퉁이를 차지할 수 있기를 바라는 처지니.
무릿매골에 무엇도 가져가지 말라고 하셨던 어머니의 당부가 서글프게 맴돌았다. 그의 것을 하나라도 더 주워 가고 싶은 미련한 심보를 달랬다.
나는 하나뿐인 기회 앞에서 오래 고민했다. 옅은 물비린내와 쌉싸름한 풀 향 속에서 무심코 고개를 젖히니 망망대해 같은 하늘을 떠다니는 흰 구름이 보였다.
“운혁.”
“운혁?”
“운은 구름을 땄고, 혁은 사내아이 돌림자로 많이 쓰이니까요. 거창한 뜻은…… 없습니다. 그저 도령이 건강해져서, 지금보다 자유롭기를 바라서요.”
그뿐일까. 바람 끝에 구름이 딸려오는 법이니 내가 어딜 가던 마음 한구석에 그가 남기를 바라는, 내비치지 못할 속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