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속사포처럼 중얼대는 소리는 들리지 않은 지 오래였다.
두 달. 두 달 전부터 내 정체를 눈치채고 있었다고. 빼도 박도 못하게 들켰다. 그래서 내가 여인이란 걸 알아서 마음에 품고 날 볼 때마다 얼굴을 붉혔구나. 자기 식구 먹을 것도 부족한 마당에 꼬박꼬박 나를 챙겨 주고.
“너 약조했지.”
“응, 버들아.”
“함부로 떠들고 다니면.”
더 박박 우기기보다 빠르게 인정하고 놈을 입막음하는 편이 낫겠다.
뒷말은 잇지 않았다. 그럼에도 마음 놓으라는 듯 윤후는 비장한 얼굴이었다.
“이만 가. 어머니 오실 때 되었으니까.”
“응, 당장 대답 안 해 줘도 돼.”
나는 윤후를 두고 그 자리를 뛰쳐나왔다.
말도 안 돼. 1년을 꽁꽁 숨겨 왔는데 이리 허망하게 들킨다고?
태연한 척했지만 일신이 걸린 중대한 문제였다.
어머니께 말씀을 드려야 할까. 당장 말해도 통행패가 나올 때까지 무릿매골을 떠날 수 없는 데다 윤후가 입 다물고 있겠다 했으니 우선은 어머니 걱정시키지 말고 지켜볼까.
그대로 집 모퉁이를 돌아 부엌으로 가려던 차. 나의 발길이 우뚝 멎었다. 눈을 의심하고 말았다.
“도령?”
모퉁이 너머, 그가 담장에 손바닥을 댄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서늘한 눈이 정수리로 떨어졌다가 다시 느리게 움직이며 달려 나가는 윤후에게로 미끄러진다.
“……놓고 가신 물건이라도 있습니까?”
설마 다 듣고 있었나.
“사우(四友) 중에 빠진 게 있어서.”
“그렇다면 얼른 가져가시질 않고…….”
“한데 버들아, 내가 방금 이상한 걸 들은 것 같아.”
일시에 머리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속내는 요동치게 내버려 두고 겉으론 태연함을 가장했으나 이미 깨진 평정이었다.
그는 얼굴 절반을 잡아먹은 그림자 안에서 기묘하게 눈을 빛내고 있었다. 불쑥, 턱 끝에 차가운 감촉이 닿아 왔다.
“사내인 줄 알았던 네가 사실은 여인이라네.”
“도령.”
“너와 함께한 시간이 1년하고도 이제 반년이 더 되었나.”
까만 눈동자가 기이하게 일렁대고 있었다. 마치 그날, 물보라에서 마주친 눈처럼.
“버들아.”
나는 그가 말을 하기 전에 다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양 손바닥을 그의 입술에 붙이고 벽에 밀어 넣자마자 거칠게 모래 밟는 소리가 울렸다.
“얘는 또 어디로 갔어? 쌀 씻어 두라고 그리 일렀건만 두 번 말해 줘도 잊지.”
어머니가 내 진명을 부르지 않음이 천만다행이었다. 이사를 가기 전 미리 액땜하는 것인가. 하루 동안 터진 일이 두 건. 내가 여인임을 알게 된 사내가 두 명.
한 명은 절대 누설하지 않겠다 다짐했으나 연모하던 여인이 제게 관심이 없는 것을 눈치채면 어찌 뒤통수를 칠지 모르고, 한 명은 내 검무까지 본 자였다.
윤후는 어리바리해도 입은 무거우니 함부로 입방아를 찧을 만큼 몰상식한 애가 아니라 해도, 도령은? 예측할 수 없으니 더 위험했다.
생각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는 한동안 움직이질 못했다.
“버들이는 숨기는 것도 많지.”
살며시 손을 붙잡아 내린 그가 내 장단에 맞춰 주겠다는 듯이 낮게 속삭였다.
“평범한 무당 아들인 줄로 알았는데.”
역시 들었구나. 여인임을 들켰을 때 관아에 끌려가 늘어놓을 변명은 어머니와 옛적에 입을 맞춰 놓았기에 기를 쓰면 빠져나올 구멍은 있을 테지만, 성가실 일이 뒤따르리라 생각하니 아찔해졌다.
“고향은 남부의 희백산 근처냐고 물었었잖아. 결국 다 들킬 거면서.”
“방금 무어라고 하셨습니까?”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지 못해 고개를 쳐들었다. 사내의 길쭉이 올라간 입꼬리가 영 불안했다.
“아무것도.”
“하아.”
나는 골백번은 죽었다 살아난 심정이 되어 주저앉았다. 내일이면 동네방네 소문이 다 퍼지려나. 무당집 아들이 실은 딸이었다며. 흉악한 과거를 숨기고 무릿매골에 정박했는지도 모른다면서 수군덕대다가 쫓아내려나.
차라리 일찍 무릿매골을 떠나는 게 이로울지도 모르겠다.
“이름도 거짓이겠고.”
그는 무릎을 굽혀 쭈그려 앉은 나와 시선을 같이했다. 그러더니 미끄러진 내 손을 붙잡고 다시 제 입가로 가져다 댔다.
“버들아. 윤후에게 무어라 말했어?”
“무슨.”
“네가 좋다잖아. 하여 넌 걔한테 어떤 대답을 들려주었냐고.”
이 판국에 그게 궁금한가? 행여나 어머니에게 이 꼴을 들킬까 봐 내 심장은 타들어 가는데.
기다려도 내가 대답을 안 하니 그가 제 뺨에 내 손을 슬몃 문지르며 답을 종용하였다.
“소리를 내면 이쪽으로 네 어머니가 오실 텐데.”
“하지 마세요.”
“윤후에게 어쨌어?”
“나에 대해 온 동네에 소문이라도 뿌리고 다닐 겁니까?”
“내가 왜?”
그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럼…….”
“내가 왜 그럴 거라고 생각해? 섭섭하게.”
도령이 내게서 손을 거두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네게도 숨기며 살아온 이유가 있지 않겠어.”
“하면 입 다물고 계신단 말이지요?”
도령이 염려 말라는 듯 웃었다. 왜 남장을 하는지 이유도 묻지 않았다. 마치 내가 던져두고 도망쳐 온 과거를 이해한다는 듯이.
이상한 것은, 심란한 한편 윤후에게 들켰을 때보다 착잡한 동시에 이유 모르게 후련해지는 마음이었다. 12년 만인가. 누군가 홍사혜가 여인임을 알아준 것이. 한데 그 누군가가 도령이라서 마음이 편해진 이유는 무얼까. 나도 모르겠다. 그저 내가 정신을 덜 차렸다고밖에.
그날, 어머니에게 말 못 할 또 다른 비밀이 생겼다. 점점 불어나는 비밀에 밤잠을 설치며 이부자리에서 뒤척이다가, 나는 새벽 어스름이 깔릴 때가 되어서야 눈을 붙일 수 있었다.
* * *
사흘 동안 아프다는 핑계로 이불을 뒤집어쓰고 칩거했다. 그 사흘 동안 내가 염려하던 어떠한 구설수도 퍼지지 않았고, 정확히 닷새째 되는 날 확신을 얻은 나는 바지를 입고 마을 일을 거들러 나갈 수 있었다.
희색으로 반기는 윤후에게 그날 일이 없던 것처럼 인사해 주고, 열심히 내 할 일을 했다. 윤후는 차라리 속이 시원한 모양인지 나와 둘만 자리할 때는 평소와 달리 퍽 적극적으로 굴었다.
“어머니. 저희 떠날 날은 정해졌습니까?”
“한 달 내로 떠날 생각이다.”
조만간 이장에게 전출 신고를 하고 통행패를 받을 거라 한다. 그러면 무역항이 있는 도곡으로 가서 배를 타고 아라한으로 가면 되는데……. 어째 어머니는 쇳가루라도 씹어 넘긴 표정이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마을에 이상한 병이 도는 것 같다길래. 약도 들어먹질 않는다더라.”
알면서도 다들 쉬쉬하는 분위기라며, 어머니는 찝찝함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재수 없는 마을, 쯧. 빨리 떠야겠다.”
* * *
8월의 여름. 농번기가 지나고 한결 여유로워진 마을 사람들이 우물가나 시냇가에 자리를 잡고 너나들이 몸을 식히고 있었다.
“세상이 어찌 되려고 이 모양인지 모르겄어.”
그늘진 평상에 드러누워 수박씨를 퉤 뱉는 노인은 나도 알고 모두가 아는 조씨 영감이었다. 마을에 사건이 터졌다 하면 가장 먼저 기웃거려서 ‘빼꼼’이란 별칭으로 부른다지.
“제삿날 그 난리가 난 뒤로 곳곳에서 요귀 둥지가 자주 보인다고 하더만. 발견하는 즉시 태워 버리는데 알의 수가 점점 늘어나 자체 방역만으로 힘들다고 하더군.”
“무릿매골 뿐인가? 안 그래도 나라 전체가 그 문제로 골머리를 썩이는데. 듣자 하니 왕께서 지방 관리를 파견한다는 말이 나돌아.”
“그렇다면 곧 해결을 보겠구만. 그보다 소문 들었나? 엊그제 이장님 어머니께서 뒤뜰에 주저앉아 흙을 파먹고 있었다면서. 그 왜, 두 이레 전에는 정가네 열둘 먹은 아들이 게거품 물고 졸도했다잖아. 간신히 정신을 차리니 지 애비 애미 얼굴도 못 알아먹는다 하더라고. 또 보름 전에는 차주 댁 영감이 글쎄…….”
크흠, 흠. 소리 높여 떠들던 영감들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헛기침을 했다. 말세여, 말세. 따라붙는 소리에 깊은 한숨이 눌어붙는다.
“소루강 신의 영기가 다하신 게지.”
“이 사람. 어딜 망측한 소릴 함부로 뱉어? 대감님께 쌀 다섯 말은 퍼 간 놈이. 우리가 누구 덕택에 흉작 버텨 가며 입에 풀칠하는지 모르고 지껄이는 겐가?”
“누군 이런 소릴 하고 싶어 이래? 대감 댁에 요귀가 출몰한 뒤로 미치광이가 셋이나 나오니 그렇지.”
나와 도령은 왁자한 소리로부터 멀리 떨어진, 나루터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요즘 마을 사람들은 모였다 하면 같은 주제로 토론을 했다.
바람을 타고 흘러드는 영감들의 말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마을에 떠도는 괴이한 병, 늘어나는 요귀 둥지. 이런 것들 모두 죄다 상관없다는 양, 도령의 반응은 심드렁하다 못해 무덤덤했다.
“도령께서는 무릿매골 토박이잖습니까.”
발목으로 물을 튀기는 도령에게 물었다.
앞으로 어찌 대해야 하나 고민한 게 무색하게도 그의 태도는 내가 여인이건 사내건 변함이 없었다. 원체 무심한 사내라 그러한가. 왜 내가 이 꼴로 사는지도 일체 궁금해하지 않아 차라리 다행이었다.
“한데?”
“보통 강의 이름은 인근 지명을 따 붙이는데 어째서 이 강의 이름은 무릿매강이 아닌 소루강이 되었는지 아십니까?”
“들은 바로는 옛적에 사람 이름이라고 하였어.”
“이름을 강에 붙일 정도면 아주 대단한 사람이었나 봅니다.”
“글쎄. 뭐가 됐던 너무 오래되어 기억해 주는 이도 없을걸.”
“도령께서 기억하시잖습니까.”
“내 스승한테 들었지.”
또 임영인가.
“그 스승이란 분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오래 가르치지 못하고 떠났다는 말만 들었습니다.”
“나의 스승은…….”
그가 강가에 둔 시선을 설핏 찌푸렸다. 무릎 옆에 둔 손으로 사그락사그락 풀 쪼가리를 어루만진다.
“지나치게 많은 것을 알고.”
“…….”
“남들은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줄 아는 영민한 자였지.”
그가 뜯어낸 풀을 엄지로 가만히 쓸었다. 거친 풀잎에 쓸린 살갗에 핏방울이 둥글게 맺혀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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