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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23/86)

23화

‘가져 봤자 읽지도 못하는 거.’

꼴에 자존심은 남았다. 한 줄도 못 읽겠다고 실토하기를 거부하는 콧대 높은 입이었다. 이 비싼 책 구경해 보는 게 어딘가. 몇 가지 아는 글자들과 삽화를 살펴보니 밀국의 설화나 그보다 더 옛적의 시를 풀어놓은 내용 같았다.

하루만 빌려서 그림이나 구경할까 하다가 도로 마음을 접었다. 닳도록 봐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텐데 무슨 소용일까 싶어진 것이다.

“버들아.”

그는 턱을 괴고 갈등하는 날 즐겁게 관조했다.

“못 읽어?”

아니라고 답하는 것보다 그가 한발 더 빨랐다.

“내가 가르쳐 줄까?”

“도령께서 저를요?”

“그럼.”

쥐뿔도 없는 자존심이 아닌가. 공으로 가르쳐 주겠다는데 마다할까. 나는 먹을 것 앞에서보다 더 홀렸다. 부끄럽다고 아닌 체하는 몇 분 전의 나는 어디로 갔는지.

무를세라 냉큼 고개를 끄덕이니, 도령이 흡족히 웃으며 벽에 기대앉은 내 곁으로 가깝게 몸을 붙였다. 나란히 앉아서 내 손에서 책을 빼가, 단정한 목소리로 내가 그토록 궁금해하던 시의 한 구절을 조용히 읊기 시작했다.

“정인을 잃은 어미였군요.”

이제야 석양을 등진 가련한 여인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꼭 일찍이 지아비를 떠나보낸 우리 엄마 생각이 나 코를 훔치며 책을 가까이 당기자 도령은 그런 내가 웃기다는 듯 손등을 턱에 붙이고 실소했다.

참으로 애달픈 시인데, 무심결에 훔쳐본 도령은 아름다운 목소리로 구음하듯 시를 부르면서도 정작 감정을 모르는 얼굴을 하고서 감정에 호소한다.

“해서요?”

“무얼.”

“이 여인은 어찌 되었습니까? 아이를 되찾고 행복하게 살았더랍니까?”

“알 게 뭐야.”

도령은 어깨를 으쓱이며 책을 덮어 버렸다.

내가 아는 이야기라고는 아주 어렸을 적, 어머니가 잠투정 부리는 내게 으스스한 요귀 이야기를 들려준 게 고작이었다. 남녀상열지사에 관심이 지대한 걸 보면 나도 속 알맹이는 어쩔 수 없는 그 나이대 여인인가 보지.

이 작은 책에 침이 꼴깍 넘어가는 이야기가 넘쳐흘렀다. 나는 거기서 웃고 아파하고, 새 삶을 꿈꾸는 용기 있는 자들의 삶을 엿보았다. 내가 꿈꿨던, 혹은 갖지 못했던 것들을.

“이건 어찌 읽는 겁니까?”

“조총(鳥銃) 뒤집어 놓은 것. 거기다 버들가지를 붙이면 사, 갓 쓴 선비에다 붙이면 하― 아래에 점을 놓으면 읽는 법이 달라져. 표기법에 따라 뜻도 다르지. 이렇게.”

그대로 순식간에 두 시진이 홀딱 넘어갔다. 나는 도령이 하던 대로 부들부들 떨리는 손끝으로 붓을 집어 글씨를 써 내려갔다. 도령은 눈알이 빠지도록 집중하는 날 재밌다는 듯 보았다. 금방 질려 할 줄 알았더니, 주머니 끈이 짧아 헤매는 날 의외로 느긋이 기다려 줬다.

도령이 돌아가기 전, 모처럼 내가 먼저 붙잡고 말했다.

“나와 약속 하나 해요. 글방은 꼬박꼬박 다니는 것으로.”

“음.”

“건너뛰지도 말고, 중간에 도망치지도 말아야 합니다.”

이래야 내가 좀 죄책감을 덜 것 같다.

“가르치려거든 아는 것이 많아야 제대로 된 스승 노릇 하지요.”

도령은 약속 하나만큼은 꼬박꼬박 지켰다. 그 날의 공부를 마치면 제법 스승 티를 내며 뒷짐을 지고 사박사박 우리 집 마당으로 걸어 들어오는데, 내가 글씨를 연습 중이던 종이를 안고 튀어 나가면 그는 좋아했다.

때론 양손에 귀한 간식을 들고 왔는데, 나와 어머니 사는 꼬락서니를 본 것이다. 도령은 한 입도 대지 않고 전부 다 내 차지였다. 아무리 내가 못 먹고 자랐다지만 옆에 사람을 놔두고 채신머리없이 다 욱여넣지는 않았다. 해서 나는 꾸준히 함께 먹자며 디미는데 도무지 먹질 않았다.

단지 먹고, 글을 쓰고, 책을 읽는 날 기묘한 것 보듯 보다가 드물게 홍소할 때가 있었는데, 그러면 그 밤은 잠들기 전까지 방울처럼 맑은 웃음소리가 귀를 맴돌았다.

“아무리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 하지만. 도령께서는 특히나 곤란해요.”

“곤란해?”

살짝 찌푸려진 눈썹이 곧고 유려하다. 고생을 모르는 얼굴은 요철 없이 매끄러운 도자기였다.

이 사내는 눈은 찬데 웃음은 보기보다 헤펐다. 전생에 고생만 하느라 못 웃고 저승길을 밟았는지, 아님 두골에 둥지 튼 기생충이 입가를 죽죽 끌어올리는지. 사내가 저리 간살스레 웃어서는.

그 미소를 마주하노라면 당연한 생리 현상처럼 귓가부터 뜨거워지고 갈팡질팡하던 눈길은 그의 얼굴에 온통 달라붙는다.

“온 동네 여인과 염문을 뿌릴 게 아니면 그리 웃지 말아야지요.”

“날 보고 얼굴 붉히는 사내는 너밖에 없을걸.”

“티가 났습니까?”

“나도 눈이 있는데.”

그는 내가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는 듯 흥미를 보였다.

“내일 우리 집으로 와. 네게 주고 싶은 것이 있어서.”

“대감께서 제 방문을 마뜩잖아 하실 텐데요.”

“괜히 오라고 했겠어? 출타하시니 그렇지.”

어쩌다 상황이 이 지경으로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이제 도령이 부재한 하루를 떠올리는 게 낯설었다. 장소만 바뀌었다 뿐, 1년 동안 그를 돌보던 때로 돌아간 듯하였다.

두어 달 뒤 무릿매골을 떠나야 하는데. 미리 말하는 게 좋을까.

“버들아, 잠깐 시간 좀 내주어.”

도령이 떠난 뒤로 생각을 곱씹던 차, 낯익은 목소리가 귀를 두드렸다. 언제 온 것인지 윤후가 마당에 진을 치고 있었다.

요즘 통 못 만났는데 걱정이 되어 찾아왔나. 엊그제 나와 어머니 모두 출타 중일 때, 누군가 집에 찾아온 흔적이 있었다는데 그것도 윤후가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요즘 어떻게 지내는가 해서. 들었어. 일전에 연등제도 나 말고 다른 이와 갔단 거. 혹시 기 도령이야?”

“왜, 대감에게 가서 고자질하려고?”

“아, 아니. 그럴 리가. 혹시 도령도 알고 있어?”

“알다니, 무얼?”

“아…… 아무 것도 아니야.”

내가 이맛살을 찌푸리자 윤후가 고개를 털며 곰살궂게 웃었다.

“그러지 말고 내일은 나랑 약초 캐러 가자. 도령과 함께 가도 좋아.”

“너 맨날 도령 앞에만 서면 졸아들잖아.”

“내, 내가 언제! 그건 그렇고 사실 긴히 할 말이 있어 왔어.”

윤후의 목적은 같이 약초나 캐러 가자는 것 외에 더 있는 듯싶었다. 익은 숯불처럼 시뻘겋게 귀를 붉히고서 양손을 꼼지락대는데. 왜 저러나 싶다가 불현듯 스친 생각에 긴장이 되었다.

설마 이 자식, 실은 사내가 취향이고, 하여 나를 연모하게 되었다고 고백이라도 할 셈인가.

최근까지 내 앞에서 보인 윤후의 태도를 보면 무리한 추측도 아니었다.

“어머니 오시기 전에 쌀 얹어 둬야 하는데.”

“잠깐이면 돼! 우리 나름 오래 알고 지내 왔잖아. 그러니 이제는…….”

말할 때가 된 것 같다고?

나는 팔짱을 끼고 윤후 앞에 섰다. 그래,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사내를 향한 너의 연정을 받아줄 수 없다고 얼른 말하는 게 좋겠지. 윤후가 나를 보고 안달복달한 지 벌써 두 달째인데 그 정도면 적당히 참은 건가.

뭐가 됐던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니 얼른 거절해야겠다. 진즉 떨쳐 내지 못한 내가 죄고 윤후는 잘못이 없었다. 사내가 사내를 연모한다는데 그게 무어 죽을죄라고.

“그래, 해.”

윤후가 붉은 코끝을 어루만졌다. 주위를 두리번대다가 결심이 섰는지 나를 외진 뒤뜰로 끌고 간다. 목울대가 크게 넘어가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렸다.

긴장되겠지. 마을에서 쫓겨날지도 모르는 사안이니. 자칫 가족과 연을 끊어야 할지도 모르고.

소문이 퍼질지도 모르는 두려움을 누르고 용기를 낸 윤후가 대단한 한편 안타까웠다. 너는 어쩌다가 사내를 마음에 품어서는.

“버들아.”

그가 잘게 떨리는 눈을 감았다. 나는 흙벽에 등을 기댄 채 낮게 침음했다.

“너를 오래전부터 연모해 왔어.”

이토록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고백이라니. 준비된 대사를 쏟기 위해 입을 열려던 차.

“네 비밀, 평생 지켜 줄게.”

“비밀이라니?”

“나 두 달 전부터 네가 여인이란 것 알고 있었어. 하지만 걱정 마.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입 하나 벙긋할 생각 없으니까.”

“…….”

잘 불던 바람이 내 머리카락을 훑다 말고 뚝 끊어졌다. 얘가 지금 뭐라고 한 거지?

“다시 말해 봐.”

“그때 네가 치마 입은 모습을…….”

“헛것을 보았겠지.”

“어?”

사납게 일그러진 눈초리에 당황한 윤후가 주춤 뒷걸음질 쳤으나 절반 이상 확신한 눈빛이었다. 더듬거리는 것도 잠시, 나조차 기억나지 않던 그날의 치마 색이며, 나의 사소한 행동까지 낱낱이 읊는데, 그만 눈앞이 새하얘졌다.

“네가 어머니와 포목점을 지나가는 걸 보았어.”

포목점이라면 오라버니의 기일. 비가 쏟아지던 날이었다. 개나리색 옷감을 들고 뛰어가는 여자애를 눈으로 좇았던 기억이 난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하려 했는데, 네가 집으로 들어가 버려서.”

그 뒤로 윤후는 어쩐지 말을 잇지 못했다. 아까보다 더 얼굴이 익은 고추가 되어 있었다.

“맹세코! 보려던 건 아니었어. 그냥 갈까, 거기까지 갔는데 인사라도 하고 돌아갈까 고민하다가.”

나는 꽉 눈을 감았다. 치마 지어 입을 생각에 신이나 뛰어가던 여자애. 그 하잘것없는 장면이 무어라고 뇌리에 잊히질 않아 어머니가 한창 저녁을 준비하실 때 몰래 어머니 치마를 입고 슬쩍 바깥으로 나온 적이 있었다.

늘 꽁꽁 싸매야 하는 가슴께도 홀가분했고, 몸을 휘감는 치맛자락도 마음을 울렁이게 하였다. 하여 좁아터진 방 말고 앞뜰이라도 거닐고 싶어 그리한 것인데. 그랬던 나를 윤후 이 자식이 보고 있었다고.

“나한테까지 숨길 필요 없어. 말 못 할 사연이 있어 신원을 감추고 무릿매골에 머물다 간 사람들이 예전에도 몇몇 있었으니까. 하지만 난 정말 누구에게도 네 비밀을 말할 생각이 없어 버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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