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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22/86)

22화

“조상신.”

낮게 읊조린 사내가 구부린 허리를 느긋이 폈다. 고운 얼굴에 발라진 달빛이 아름답기보다 괴괴한 기운을 풍겼다. 사내의 눈동자가 일순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가 아기보살의 목덜미를 놓아주자마자, 귀신은 몸을 버리고 달음박질쳤다. 오래전부터 육신을 뺏긴 아이는 귀신이 떠나가자마자 싸늘한 주검으로 변하였다.

마침내 편히 눈 감은 아이의 시체를 고요한 시선이 훑었다. 사내는 손톱 끝에 맺힌 핏방울을 털어 내곤 미련 없이 신당을 떠났다.

* * *

“버들아, 밖에 좀 나가 봐라! 윤후가 너 찾는다.”

“예에…….”

한동안 도령은 날 찾아오지 않았다. 더불어 사고 이후로 요귀도 어디 숨어 제 부러진 손목이라도 접붙이는지 잠적해 버렸다. 나는 도령에게 애먼 관심이 한 뼘 자라날 때마다 가위질을 했다. 더 바쁘게 살아야겠다. 몸이 고생하면 잡생각도 덜 들 테고.

일찍이 윤후를 불러 풀이나 캐러 가자고 하니 녀석은 좋다며 냉큼 튀어나왔다. 마당 싸리문을 나서자마자 본 낯익은 얼굴만 아니었으면, 나는 강가에서의 일을 여전히 꿈이라고 믿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저, 버들아.”

해가 머리 꼭대기에 있었다. 윤후는 싸늘히 낯을 굳히고 앞서가는 내 뒤를 엄벙덤벙 쫓아왔다.

“있지, 아까부터 뒤에…….”

“알아. 내버려 둬. 눈길도 주지 말고.”

한껏 미간을 모으고 윤후에게 못 박았다.

우리를 쫓는 걸음의 주인은 기 도령이었다. 대낮부터 가야 할 서당은 안 가고 우리 뒤를 대놓고 밟고 있었다. 덩달아 나와 도령 사이에 끼게 된 윤후는 땀을 심하게 흘렸다. 침묵 속에서 바짝 탄 목만 축이는 소리가 났다.

“버들아, 내가 도와줄게.”

노랫가락처럼 맑은 목소리가 멀어졌다 가까워졌다가.

“약초를 캐러 가?”

“…….”

“아니면 덫을 놓으러?”

무시로 일관해도 상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기로 말을 붙여 온다. 나는 끝까지 참다가 뒤를 돌았다. 여름 햇볕도 무지를 뜨거운 눈길로 도령이 내 주위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넌 저쪽으로 가.”

똥 마려운 개처럼 안절부절못하는 윤후를 갈림길 왼편으로 보냈다. 걱정스러운 듯 날 보다가, ‘그럼 한 시진 뒤에 봐.’하면서 윤후는 기다렸다는 듯 후다닥 멀어졌다. 녀석이 사라지자마자 도령에게 눈을 치떴다.

“가서 그 잘난 요귀와 죽마고우 흉내라도 내시오.”

“화가 났어?”

“…….”

“왜?”

같잖은 물음에 나는 손을 휘젓고 걸었다. 따라오든 말든 저놈의 행동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는 내 눈치를 보는 기색도 없이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 따라왔다. 꼭 내 뒤통수에 눈이라도 달려 마주 보고 걷는 것마냥.

내가 덫을 숨긴 곳은 소루강 근처라 찰박찰박 물소리가 올라왔다. 첫 번째 덫을 집자마자 장소를 잘못 선택했다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회수하는 덫마다 토끼는커녕 재수 없게 바닥에 내려앉은 참새며 지나가던 뱀도 잡히질 않았다.

‘윤후는 잘만 쏙쏙 골라잡던데.’

오늘도 제 몫을 나눠 억지로 내 손에 들려 줄게 뻔한 윤후에게 미안함과 부담스러운 마음이 동시에 들던 때에.

“버들아.”

목뒤로 향기로운 숨결이 달라붙었다. 방심하던 나는 펄쩍 뛸 뻔했다. 가라는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지! 도령은 느긋이 내 곁에 다가와 초라한 빈손을 잡아 펴더니, 슬며시 웃었다.

“내가 도와줄게. 내일은 나랑 가자.”

윤후인지 뭔지는 놔두고.

손톱달 같은 눈이 어여쁘게 휘어졌다. 지난날 그렇게 화를 냈는데도 그는 그날의 다툼이 없던 마냥 더 친근하게 굴고 있었다.

이다음부턴 무시해도 잠깐뿐이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싸리문 밖에 심은 커다란 나무 밑에서 그는 쭈그려 앉아, 내가 나와서 알은 척을 해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으니.

보다 못한 내가 싸늘히 물었다.

“글방도 때려치우려고요, 이제는?”

“아무도 모르게 빠져나왔어.”

그게 무어 자랑이라고 키득대며 속닥이는지. 비딱한 내 태도에 기가 죽을 도령이 아니었다. 그는 뻔뻔스럽게 내 어망을 가져가 살펴보았다.

떼어 내려도 무소용이다. 상대해 주지 않으면 내가 저를 볼 때까지 마당 앞에서 죽치고 앉을 위인이고, 어머니께 이 꼬락서니를 들켰다간 나의 목숨이 위태로웠다. 아직도 저놈과 어울리느냐며 너까지 불운이 옮겨붙으려면 어쩔래, 하며 등짝부터 후려치실 게다.

쌍으로 모가지가 따일 일을 방지하기 위해 나는 그를 후닥닥 달고 강가까지 와 버렸다.

“도와주겠다고 했잖아.”

“물고기 모는 법은 아시고?”

“나를 믿어.”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기를 쓰고 무시하려던 다짐이 죽었다. 종일 기다리고 득달같이 따라오니 피할 길이 없었다.

도령은 작은 주머니를 꺼내더니, 물가에 앉아 그 안에 든 것을 곡식처럼 멀리 뿌리기 시작했다. 그러면 나는 도령이 시키는 대로 어망을 넓게 펼쳤다.

반신반의하며 그러고 있기를 한참, 강물이 먹구름이라도 드리운 마냥 짙어졌다. 거대한 그림자가 물 밑에서 일렁이는 걸 지켜보는데 그만 쥐고 있던 어망을 떨어뜨릴 뻔했다. 마구 밀쳐지고 잡아당겨지는 어망을 놓칠세라 바짝 당겼다. 묵직한 무게감이 손끝에 걸린 것은 그때였다.

“무얼 하신 겁니까?”

“내 스승이 물고기 꾀는 먹이를 알려 줬어.”

끌고 나온 어망 안에는 통통한 물고기들 열댓 마리가 탐스럽게 묶여 있었다.

“스승이라면, 글방?”

“아니.”

또 임영 그 치인가. 이쯤 되니 그 스승이란 자의 정체가 몹시도 궁금해졌다. 나는 팔딱이는 물고기의 개수를 세며 침을 닦았다. 오늘은 포식이겠구나. 도와준다는 게 마냥 헛소리는 아닌 모양이지.

“그 먹이란 게 뭐요?”

내 물음에 도령은 그저 의뭉스럽게 웃을 뿐이었다.

“윤후보다 내가 쓸모 있지 않아?”

과연 쓸모로 치면 확실히 도령이 한 수 위지만…….

물고기에 널뛰었던 기분이 금세 가라앉았다. 인정과 별개로 그날의 앙금이 풀리지 않은 나는 퉁명스럽게 ‘고맙습니다’ 한 마디만 흘리고 돌아섰다. 부러 차갑게 굴었는데도 도령은 무엇이 그리도 뿌듯한지 착실히 내 등을 쫓아왔다.

죽어도 상관없다며 뱃심이나 품고 사는 주제에.

누군가 내 속마음을 엿듣는다면 어차피 네 일도 아닌데 성을 낸다고 어처구니없어 할지도 모르겠지마는, 내게는 중했다. 그를 살리는 일이 중요했고, 누군가가 내 앞에서 죽지 않기를 바랐다.

“버들아, 다시는 안 그럴게.”

그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이전의 장난치는 낯짝이 아니었다.

“무엇을요.”

“내 생각이 짧았어.”

그러니 너마저 나를 등지지 말라고 저 눈이 호소를 담이 말하는 것 같았다.

“다시는 요귀와 어울리는 일 없을 거야.”

매정히 대하지 말라는 듯 내 손을 붙들었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높은 사내가 허리를 굽히고 내 뒷덜미에 뺨을 치덕대니, 나의 앙금은 녹아 버린 봄눈만도 못하게 되었다.

게다가 녹은 자리에 난데없이 열이 번지고, 놀란 심장이 목 뒤로 옮겨가 쿵쿵 뛰었다.

“이제 네가 있으니까.”

떨쳐 내야 하는데. 그렇게 쌀쌀맞게 티를 낸 게 조금 전인데, 배알이라곤 쥐뿔도 없는 몸이 말을 듣지 않고 그를 떨쳐 내기를 거부한다.

언젠가 어머니가 내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우리네 삶은 정박하지 못하고 방랑할 운명이니 떠나갈 때 무엇도 남기지 말고 무엇도 탐내지 말라고. 사람이 발 디딜 땅이 있어야 주변도 돌아보고 내 몫도 챙기는 법인데, 그럴 일은 평생 요원할 거라고 하셨다.

문득 저 사내가 죽은 뒤 나는 아무렇잖게 이곳을 떠날 수 있을까 염려가 되었다. 전부 다 없던 일처럼 묻고 갈 수 있을까. 진정으로?

처음엔 도령의 장례를 보고 떠났으면 싶었는데 이제는 차라리 내가 떠난 뒤 그가 죽기를 바라게 되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 * *

도령의 신비로운 재주 덕에 윤후는 버려졌다. 우애고 뭐고 내게 중한 건 엽전 한 푼이라도 더 버는 것이지 반 토막 난 생선 대가리가 아니었다.

윤후가 제 물고기 반쪽을 떼어 준들 한 끼 식사는 되겠으나 귀한 생선 없어도 나물 한 가지만 가지고도 밥에 물을 말아 먹고 연명할 수 있는 나와 어머니였다. 우리는 돈이 필요한데, 토막 난 생선을 어물전에 팔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나는 어딜 가던 늘 도령과 함께였고, 윤후는 죽상이 되었다. 배신감을 느꼈다나 뭐라나. 상황이 역전되어 이제 도령이 마을 사람들과 어머니 눈을 피해 내 집을 제집처럼 들락이는 중이었다.

귀신처럼 숨어드는 데 이골이 났다지만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니. 안 그래도 대감이 나와 어머니를 꺼려 하는데 들켰다가 피박 쓰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어머니 없는 틈을 타 방에 들어앉은 도령을 흘겨보았다.

“또 글공부는 던져두고 온 본새이신데.”

요즘 그가 나를 관찰하는 시간이 부쩍 늘었다. 지금도 시선을 떼지 않고 빙글거리며 책을 내미는데, 이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

“그때 보고 싶어 하는 것 같길래 가져왔지.”

그때라면 마지막으로 도령의 집을 찾아간 때였다.

“줄게.”

“이런 귀한 건 부담스러워서 못 받습니다.”

“그럼 빌려 가든지.”

나는 도령을 흘끗 보다 책을 감싼 보자기를 조심스레 들췄다.

책을 한 장 한 장 넘겨 가며 보았다. 처음 맡아 보는 오래된 종이 냄새. 책사를 지날 때마다 맡은 그 케케묵은 종이 내음이 좋았다. 비록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문장이 십분지 일도 되지 않았지만.

“도령도 내일 필요하실 텐데.”

“나도 빌리지.”

“빌려줄 친우는 있고요.”

“돈이 있는데 무어가 걱정이야. 시중에서 구하기 힘든 책이라 당장 네게 구해다 줄 순 없지만, 내가 쓴다고 하면 넙죽 가져다 바칠 놈들은 많거든.”

“그게 뭐람.”

도령의 자랑 아닌 자랑질에 나는 픽 웃고는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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