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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20/86)

20화

그래, 놀이는 놀이고 돈은 돈이지. 품삯을 주겠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나. 그가 나를 우습게 여기고 한 제안이 아니란 걸 알아서 기꺼이 응했다.

“시간은요?”

“두 시진.”

“그렇게나 오래요? 무어 할 일이 있다고.”

“약속한 값보다 더 넣었어.”

엽전 주머니가 두둑했다.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거래고 나는 을이니 고용주의 요구를 들어주는 수밖에.

“그래도 친우분들이 저보다 더 재밌고 유익한 장소를 많이 알 텐데요. 제가 오가는 곳이 밭이랑 시전 외에 더 있나요.”

“네 말만 믿고 다 쫓아냈대도.”

윽. 그 사람 같지도 않은 놈들 다섯 마리가 친구의 전부라고?

한숨짓는 내게 속살이 노란 잘 익은 참외가 내밀어졌다. 나는 사양 않고 도령의 옆에 주저앉아 단내나는 과일을 아삭아삭 베어 물었다. 눈도 귀도 입도 하늘에 달린 양반을 어디 데려다줘야 혼자서 잘 놀까.

‘그럴싸한 곳은 접때 연등제가 열린 팔각정의 구름다리인데 두 번 데려가기엔 좀 그렇고.’

고민하던 내가 결국 도령을 끌고 간 곳은 소루강의 강둑이었다. 이 날씨에 지글거리는 저잣거리를 밟다간 반 시진도 못되어 엎어질 테고 강바람이나 맞으며 머리나 식히면 좋겠다 싶었다.

엊그제의 벽보도 그러하고, 또 갑자기 사라진 요귀들의 행방도 거슬렸다. 어머니는 신경 끄고 무릿매골을 뜰 준비나 하라고 하시지만 그게 의지대로 떼어지는 것도 아니고.

새파란 강물을 거닐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어쩌다 보니 내가 양반처럼 앞서가고 도령이 강아지처럼 뒤를 따랐다. 나의 걸음은 늘 그렇듯 여유가 없는 반면, 도령은 느릿느릿 여유가 넘쳤기 때문이다.

“시원하지요? 여름에는 여기로 뱃놀이도 자주 오고, 낚싯대도 많이 드리웁니다.”

바람이 도령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헤집으며 훤한 이마가 드러났다. 검은 옥돌 같은 눈은 수면에 반사된 빛이 모여 있었다. 지나가던 바람이 시샘할 만큼 고운 사내임을 다시 실감했다.

“이런 곳밖에 못 데려 와서 김빠지셨겠지만.”

“그렇지 않아.”

도령을 보면서 생각했다. 예상대로 그에게 붙은 요귀의 출처는 누각에서 본 그것들인데, 왜 하필 다른 형제들은 제치고 도령에게만 잡귀가 옮겨붙었을까? 병약하다고 요귀들이 다 들붙는다면 이 세상에 멀쩡한 환자는 없을 터다.

“형제가 있다고 하셨죠.”

게다가 내가 알기로 도령의 두 형은 욕심이 더덕더덕 붙고 하는 짓마다 눈꼴신 망종 중의 망종인데.

“도령의 두 형님들은 어떤 분입니까? 사이는 좋았습니까?”

그는 강의 수평선을 바라보다가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큰형님인 남수 형님은 내가 열 살 때 공부하러 상경하였고, 작은형님은…… 잘 마주치는 법도 없고.”

형제라는 이름이 무색하다. 뭐, 도령의 전각에 코빼기도 안 비치는 꼬락서니를 보고 얼추 사이가 짐작되긴 했으나.

“지금도요?”

“지금이라고 다를까.”

왜 그런 걸 묻느냐는 듯 그가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버들이, 넌.”

“다섯 살 차이 나는 형이 한 명 있었는데,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릅니다. 한데 죽었을 겁니다.”

그가 작게 숨을 들이켰다. 내 슬픔을 가늠하듯 조심히 면면을 살피고 작게 인상을 찡그리기까지.

“괜한 걸 물었네.”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도 마찬가지고요.”

나는 오라버니와의 추억이 없어서인지 오라버니 얘기를 해도 별반 괴롭지 않았다. 물론 오라버니가 남기고 떠난 벌매듭을 볼 때마다 잡념이 들고, 어머니가 오열하는 제삿날 때는 덩달아 슬픔에 전염되곤 했지만 그뿐이었다.

“그러는 도령의 형제분들이 너무한 것 아닙니까? 있을 때 잘해야 한다지 않아요. 가까이에 붙어살 때 한마디라도 더 정답게 붙일 수 있고 가까운 아우의 처소에 인사하러 올 수 있는 것인데 얼마나 멀고 바쁘다고 한 번을 안 찾아옵니까? 아무리 못마땅해도 그렇지. 피를 나눈 형제 맞습니까?”

도령은 말을 돌리며 다닥다닥 쏘아 대는 날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러곤 웃는 듯 마는 듯 입술 끝을 이상하게 구부린다.

“내가 살면서 귀에 딱지가 얹도록 들은 말이 뭔지 알아?”

“무언데요?”

잠깐 걸음이 늦추어졌다. 이내 강물에 동동 떠다니는 나룻배를 한 번 보더니, 다시 도령이 내게 시선을 주었다.

“너 따위를 자식이라고 낳은 나는 무슨 죄냐며 어머니가 우셨고. 아버지는 사람 구실 못 할 거면 호적에서 파내겠다고 협박하였던가.”

“도령의 어머님께서 그러셨다고요?”

“오래된 일이라 잘은 기억 안 나.”

내 말에 자극조차 받지 않는 걸 보니 그리 살아온 세월이 익숙하여 상처에 무딘 것 같기도 하고. 나는 할 말이 없어졌다.

한데 문득 의아했다. 이는 도령이 매병을 앓기 전의 일인가, 병을 앓는 동안 들은 말인가.

나야 이곳에 정착한 지 1년밖에 안 되었으니 그 이전에 도령이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세세히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기 도령의 두 형이 그리 뛰어났던가. 둘 다 한 성깔 하는 파락호라고 들었는데. 오래 앓았다는 걸 제하면, 그 둘에 비해 부족함 없는 도령이었다.

그때 도령이 무언가를 톡 따서 내 앞에 들이밀었다. 살랑살랑 흔들며 뺨을 간지럽힌다. 뭔 놈의 짓인가 싶어 보았더니 뜯어낸 버들잎이었다.

“뭡니까?”

“네 친구들.”

실없는 소리까지 덧붙이며 킬킬거린다. 괴상한 농을 쳐 대며 애처럼 좋아라 하는 걸 어머니 된 심정으로 지켜보고자 했으나, 불행히도 그의 반달 진 손끝이 뺨을 스칠 때부터 마음이 찌르르 울었다.

그가 내 귀 뒤에 버들잎을 꽃줄기처럼 꽂았다. 우리는 서로를 사내로 아는데, 사내 둘이서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간지러워 몸을 비트니, 도령은 재미있다는 듯 더 몸을 흔들어 보라며 버들잎 하나를 반대편 귀에 꽂아 주었다. 별것도 아닌 일로 세상 즐거워했다. 고민 없이 평온해 보이는 얼굴을 따라 나도 옅게 웃고 말았다.

우리는 서로를 깊이 알지 못했다. 1년을 함께 했으나 아는 거라곤 그와 내가 동갑내기라는 것뿐. 다만 한 가지 바라는 건, 아마도 살면서 웃을 날이 없었을 그가 오래, 자주 웃었으면 하는 실없는 생각이 들었다.

시시각각 줄어드는 그의 생에 내가 작은 유희가 된다면 족했다. 기 도령이 아니더라도, 생이 얼마 남지 않는 누구라도 그러길 바랄 것이다. 나 때문에 오라버니가 죽었다고 믿었던 그날부로 계속.

나는 누군가의 즐거움이 되기를 바랐으나 가장 가까운 어머니마저 웃게 하지 못했다. 뱃속에서부터 불행이었고, 태어나니 역적의 후손에 살아 보니 애물단지가 되어 있었다. 그리 살아온 나는 도령이 친우를 필요로 하는 만큼 정다운 웃음 한 조각이 고팠기에.

“버들. 그거 네 진명이 아니지.”

딴생각에 젖어 들던 내 어깨를 가벼운 손길이 쓸었다. 나는 잠시 눈을 깜빡이다 답했다.

“맞습니다만.”

“참말?”

“예.”

그가 입술을 씰룩였다. 이웃집 강아지 이름 같다고 생각하려나. 뭐, 자주 들은 말이라 기분이 상하지도 않았다.

“성은 없고?”

그때 귀 뒤로 스산한 바람 한 줄기가 지나가며 강물 쪽으로 연기처럼 사라졌다. 자연스레 향한 시선 끝, 수면에 일렁이는 검은 그림자가 보였다.

버드나무의 그림자라고 믿었던 그것이 도령을 따라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이 강에 비친 도령의 그림자에 섞여 들었을 때는 오한이 돋았다.

“도……!”

소리쳐 불렀을 때는 이미 늦었다. 그가 의아하게 돌아보는 순간에 그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제 발목을 무지막지한 힘으로 잡아끄는 보이지 않는 힘에 떠밀려,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풍덩!

거센 물보라가 잦아들었을 때, 도령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

“도령!”

삽시간에 강물로 빨려 들어간 도령을 따라 강물로 몸을 던졌다. 햇볕으로 은은히 빛나던 수면의 아래는 목 뒤가 쭈뼛 설만큼 깊고 어두웠다.

검푸른 강으로 끝없이 추락하는 도령의 몸이 흐린 시야로 어른거렸다. 나는 손을 뻗었다. 마주 손을 뻗은 그의 손을 억세게 움켜쥐고, 다음으로 가라앉는 그의 몸을 힘껏 끌어안았다.

그의 손목, 발목을 감싸고 있는 검은 줄기가 보였다. 짐작대로 연등제 때부터 기회를 엿보던 요귀였다.

이런 때조차 무녀임을 숨길 수는 없었다. 벗어나야 했다. 파삭. 손목을 휘감은 검은 줄기부터 잘라 냈다. 힘없는 주인을 따라 신력도 사흘은 뱃가죽이 졸아붙은 것마냥 매가리가 없었다. 불러 모은 바람은 겨우 줄기 하나를 잘라 낸 뒤 스러질 뿐.

―어린 무녀야. 네 피는 강으로 범람해 바다에 묻힐 거야. 뼈는 아래로, 부푼 살점은 위로. 갈가리 찢긴 옷가지는 어미 품으로.

―제물을 다오. 우리를 불쌍히 여기거든 때 묻지 않은 영혼으로 주린 배를 채워 주렴.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깊은 울림, 천진하고 잔악한 목울음, 근원지에서부터 뻗어 나오는 어마무시한 악취와 요기.

피가 차갑게 식었다. 정면에서 요귀의 경고가 들려왔다. 원을 그리며 도는 그림자들이 새파란 물속에서 조롱하듯 일렁인다.

나는 도령의 어깨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치열하게 몸부림쳤다. 물 위로 떠오르려고 버둥대는 나를 검은 줄기가 두드렸다. 어느덧 사람 형상을 갖춘 요귀가 다가와 내 어깨에 가증스런 손을 올린 것이다. 방해하지 말라는 듯이.

역시 목표는 내가 아니었어. 할 수 있는 일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는데. 도령이 눈앞에서 죽는 꼴은 더욱이 볼 수 없다. 지금도 악몽에 시달리는데 매일 밤낮을 날 보며 눈물짓는 망령을 셋씩이나 견뎌 내라고?

일순 물이 솟구쳤다. 공기 없는 곳에서 공기의 흐름이 느껴지고 날카로운 바람이 요귀의 손목을 써걱 분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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