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밤이 늦었으니 얼른 들어가세요. 아까 일은 잊어버리시고. 별 잡스러운 것들이 도령 뒤를 따라다녀서 그런 거니까.”
떨어지면 사달이 날 것 같아 도령을 대문까지 바래다주었다. 도령은 그때까지 철부지처럼 어깨를 들썩이며 웃는 걸 멈추지 않았다, 슬슬 정신머리가 염려스러웠다.
“저 아기보살이란 거, 쓸 만하네.”
“예?”
“기력이 쓸 만하단 것이야.”
“도령, 혹시 열이 나십니까?”
찬바람을 맞으면 정신이 도로 아미타불 되는 것이 틀림없다. 나는 걱정스럽게 그의 하얀 이마를 짚었다. 다행히 열은 없고, 웃음기를 얹은 또랑한 눈동자도 그대로다.
도령은 이마에 얹힌 내 손을 잡으며 산뜻하게 말했다.
“매일이 오늘 같으면 좋을 텐데.”
“은근슬쩍 꾀지 마세요. 내일부터 저는 다시 바빠질 겁니다.”
아무래도 그는 오늘 하루 동안 감명을 받은 모양이었다.
“연등값을 치를게.”
“되었습니다. 선물인 셈 치세요.”
“왜? 돈 필요하잖아.”
“돈을 바라고 드린 게 아니에요.”
“나는 주고 싶은데."
내가 빈촌에서 궁색하게 살고 있음을 아는 도령의 눈에는 악의가 없었다. 나를 가엽고 딱히 여긴다거나 무시해서 돈을 주려는 게 아니라 정말 필요하지 않느냐고 묻고 있었다.
“도령은 탄생일에 선물받고 고맙다고 값을 치릅니까?”
“받아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는데.”
“받아 본 적 없어도 당연한…… 후, 그건 되었고, 혹시 모르니 이걸 방에 걸어 두세요.”
나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품에서 부적을 꺼냈다.
“도령도 이제는 알겠지만, 저 아기보살이 귀신을 봅니다. 역신이나 잡귀 따위도 걸러 낼 수 있고요. 아마 도령 근처에 붙어 있던 요귀를 보고 까무러친 모양인데, 부적이라도 걸어 두면 좀 나을 겁니다.”
“응.”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날 보다가 속눈썹을 슬쩍 내리깔았다. 훅 바람이 불어옴에 도령의 속눈썹에 별처럼 박힌 불그림자가 함께 흔들렸다.
“처음이었어.”
“무엇을 말입니까?”
그는 대답이 없었다. 대강 의미는 알았으나 오늘 우리가 함께한 일들이 너무 많아 정확히 무엇이 처음인지는 모르겠다.
“그럼 쉬세요.”
나는 인사한 뒤 달빛이 쏟아지는 거리를 뛰었다. 대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 보니 내가 떠나갈 때까지 지켜보고 있음이라.
연등제 따위 뭐 별거 있겠거니 하였는데, 역시 오길 잘한 듯싶었다. 비록 막바지에 아기보살에게 신경이 쏠려 시원찮게 파장이 났으나 그가 즐거웠으면 만족했다. 나도 무릿매골에서 추억 하나 가져갔고. 오늘 밤은 단꿈을 꾸었으면.
천천히 숨을 고르며 집으로 난 오솔길을 걸었다. 어둑한 밤하늘로 까마귀의 날갯짓 소리가 사납게 부딪혔다. 북적이는 장터를 조금만 벗어나도 인기척이 씻은 듯 사라진다.
그러다 문득 발걸음이 멎었다. 나의 눈은 무너지기 직전의 흙담, 거기에 붙은 대문짝만한 벽보를 향했다.
[밀국은 백성의 땅인가, 요귀의 둥지인가. 작금의 나라가 어지러운 데에는 응당한 이유가 있으니.
썩은 뿌리를 솎아 내야 이 땅에 평화가 도래할 것이며, 우리는 100년의 재앙을 끌고 온 역적의 후손을 단속해 마땅하다.]
사분오열된 단풍잎과 야차로 묘사된 붉은 머리칼의 무녀.
나는 다급히 방을 뜯어 살펴보았다. 대체 누가 이런 걸. 연등제의 녹녹한 여운은 사라지기도 전에 식은땀이 등골을 따라 주륵 떨어졌다.
역적 풍림의 후예. 누구를 꼬집는지는 불 보듯 훤했다. 홍운영의 자손을 잡아 관아에 바치면 포상금을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밀국의 사람들에겐 공통된 믿음이 자리 잡았는데, 날뛰는 요귀에게 홍운영의 핏줄을 잡아다 바치면 화를 면한다는 게 그것이었다.
‘한동안 수배망을 피하는가 싶었는데.’
홍운영의 자손을 제물로 바치자는 선동 수배지로, 왕이 직접 내린 성지가 틀림없었다.
그래도 무릿매골은 왕실의 눈을 피해 단속되지 않은 몇 없는 지역 중 하나라 한 해 동안 이런 벽보를 본 적이 없었다. 한데 변방의 시골 마을인 무릿매골까지 왕의 입김이 뻗쳐 든 것이다.
[가까운 관아로 신고할 것.]
그 아래 배곯은 농민들의 욕망을 부추길 거액의 포상금이 적혀 있었다. 뱃가죽이 등에 붙은 농민들 뿐일까. 가난한 양반이며 상인들도 눈을 빛내고 달려들 액수였다.
설마 무릿매골에 왕의 사자가 다녀갔나. 이웃에게 그 비슷한 소문을 들은 적도, 사자를 보았다는 말도 없었다. 몰래 시찰하고 갔다는 게 더 소름 끼쳤다. 차라리 관아의 관리면 한숨 덜었으나 만일 왕이 직접 파견한 ‘그자’들 이라면…….
목이 칼칼했다. 저만치 떨어진 담장에도 같은 내용의 방이 붙어 있었다. 나는 그것도 누가 볼 새라 가차 없이 떼어 냈다. 아무리 떼 내고 구기고 짓밟아도 담장을 따라 이어진 활자의 행렬은 끝을 모르고 이어져 있었다.
* * *
엊저녁 붙은 벽보를 보니 말도 못 하게 심란했다. 어머니는 더 썩은 표정이 되어 돌아와서는 안절부절못하다가 다 씻어 둔 쌀을 엎었고, 골무도 없이 바느질을 하다가 손가락에 구멍을 낼 뻔했다.
질그릇이 두엇 깨지고, 밤새 잠을 못 이루며 궁싯거리다 해가 뜨니 어머니와 나 모두 퀭한 얼굴로 나타났다.
떠날 날이 다가오는 와중에 내 신경을 들쑤시고 간 것은 또 있었다.
‘사람이 왜 저리 많지.’
한낮의 소란의 근원지는 마을의 작은 약방이었다.
“영감님, 이게 다 무어래요?”
“각다귀랑 전투라도 치렀는지. 가렵다고 약 달라며 바글바글 몰려든 지가 벌써 이틀째다.”
자세히 보니 마을 사람들의 팔뚝이며 볼에 붉은 점이 오돌토돌 솟아 있었다.
“아, 좀 기다려 봐! 약 제때 바르면 어련히 낫겠지. 그러니 잘 좀 씻고 다니랬잖아.”
“첨엔 가렵기만 하다가 어느 땐 헛구역질이 나고 머리가 핑글핑글 돈다니까!”
“영감님이 달여 준 약도 안 들어먹으니…….”
“그래서 이게 왜 이런 거요?”
약방에 돗자리 펴고 앉은 사람들의 흰자위가 불안으로 끔벅였다.
“그것 외에 증상은?”
“없는디.”
“아 그럼 더위 먹었나 보지. 일단 좀 지켜보자고.”
사람들의 팔등에 독버섯처럼 핀 붉은 반점을 유심히 뜯어보던 나는 무심결에 뒷목을 어루만졌다. 접때 요귀와 난투극을 벌였을 때 씹힌 자국과 상당히 비슷한 자국이었다.
확인이 필요했으나 없어진 반점이 되살아날 리 없었다. 그것도 못내 찝찝했다.
“일단 영감님이 주신 약이나 받아먹음서 기다려 보자고.”
사람들이 부산스럽게 떠나갔다.
연등제가 끝난 거리는 엊저녁의 활기가 모두 꿈인 것마냥 휑한 바람만 불었다. 특히 술시 이후에는 돌아다니는 사람을 코빼기도 마주칠 수 없었다. 사람들은 땅거미를 무서워하고 그 어둠 속에서 기어 나올 요귀들을 두려워했다.
‘수도와 바다 인근 마을은 전쟁통이라던데.’
문득 시선을 들었다. 나의 목적지, 태양을 기와에 인 장엄한 저택이 시선을 끌었다.
역병과 흉작으로 사람들이 배곯고 죽어 가는데도 기씨 댁은 여전히 풍족하고 건재했다. 대문 앞에 굴비처럼 엮어 선 비렁뱅이와 가난한 양반들의 행렬도 주는 법이 없었으니, 부의 크기가 가늠이 가질 않는다.
수십의 종, 노비들과 식솔들을 먹여 살릴 만큼 넉넉하니 저 많은 이들에게 퍼 주는 것이겠지.
한데 그만한 대부호가 계속해서 시골에 터를 잡는 것도 기이하긴 했다. 전생에 죄를 지어 봉사를 하나. 그래도 무릿매골 사람들은 기씨 영감 덕택에 배곯는 일은 없었으니 은인은 은인이었다.
그 은인의 집에 도착할 무렵에는 먹구름이 하늘에 얇게 깔리더니 가랑비가 쏟아져 내렸다. 여름의 기운이 짙어질수록 날씨도 자주 오락가락했다.
나는 등에 걸린 삿갓을 쓰고선 으리으리한 대문을 넘어, 너른 마당을 지나 초목이 무성한 뜰에 다다랐다. 이미 여기에 도령이 있다는 소식을 청지기에게 듣고 가는 참이었다.
습기를 가득 머금은 버들가지, 거대한 연꽃들이 그림처럼 핀 정원은 휑한 바깥세상과는 경치부터 달랐다. 지상 낙원이 달리 있나. 누각까지 이어진 석재 다리를 밟으며 나는 혀를 내둘렀다. 실은 이 연못 바닥이 흙이 아닌 금으로 만든 모래로 가득 채워진 건 아닐까?
자박자박 앞서가는 신발코가 누각 앞에 멈춰 섰다. 붉은 기둥에 늘어져라 기대앉은 한량이 부채를 달랑대며 깨나른한 목소리를 흘린다.
“약속 지켰네.”
연등제 일을 계기로 도령은 자신의 패를 알차게 쓰는 중이었다.
오늘은 7월 7일. 도령의 생일이었다. 그러니까 녀석은 자신의 생일을 특별하게 보내고 싶다며 나를 옭아맨 것이다.
그뿐일까. 틈이 생기면 날 제 옆에 앉혀 두고 뭘 하려 들었다. 아무래도 연등제에서 함께 놀았던 기억 때문이라. 포슬포슬한 제기를 차 보라고 손에 쥐여 주질 않나. 집까지 찾아와 잡초 뽑는 내 등을 지켜보며 언제 끝마치냐고 시비를 걸었다.
오다 주웠다는 구차한 변명을 하며 귀한 과실을 바구니째 내 머리에 얹어 두고 갈 때면 한숨이 나왔다. 점점 빨갛게 달아오르는 내 마음은 안중에도 없고 그저 저 좋을 대로였다.
“해서, 오늘은 어디로 갈까.”
“저 아는 데도 없어요.”
이 덥고 습한 날에 생일 핑계 대며 날 꾀어냈다. 마음이 심란해 거절하려 들었으나 와 주면 돈을 준다길래 그만 말문이 막혔다. 나를 놀리나 싶었는데 상대는 진심이었다. 그가 나를 꾀어내는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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