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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17/86)

17화

나는 숨을 죽이고 지켜보았다. 대감은 떨면서 같은 자리를 내처 파는가 싶다가, 무엇을 확인하고 다시 흙으로 덮어 봉분을 만들었다. 그러곤 다시 해괴한 누각으로 비틀대며 돌아가는 것이다.

나는 의아히 여기며 대감이 쌓은 흙무덤으로 다가갔다. 궁금해하지 말라고, 네가 나설 일이 아니라며 바람이 내 발뒤꿈치를 강아지처럼 물어 당겼다. 만약 신내림을 제때 받았다면 신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겠으나 무엇도 들리지 않았다. 하나 나를 염려하는 신께서 가지 못하게 막는 것을 알겠다.

정강이 높이도 닿지 않은 작은 묘였다. 수백 번 고민하다 흙의 표면을 조금 걷어 보다가 아예 파 버렸다. 안에 든 것을 확인한 눈이 굳었다.

‘무어지, 이게.’

아이 옷.

남색 깃에 금사를 엮은 소매는 분명 어린 사내아이가 글방을 다니기 시작할 무렵 입는 쾌자였다. 거기다 연푸른 저고리와 바지, 검은 복건까지.

왜 이런 것이 묻혀 있나. 혹 도령처럼 이름을 못 얻고 별이 된 손위 형제의 유품인가.

바깥에 알려지지 않은 양반 댁 사정이 있을 테니 그럴 수야 있겠다며 생각을 상식선으로 틀었다. 그럼에도 주인 잃은 아이 옷을 묻어 둔 구덩이가 찜찜하게 머릿속을 괴롭혔다. 수상하다. 구린내가 아주 심하게 풍겼다.

뻣뻣해진 손끝을 가까스로 움직여 봉분을 원상태로 돌리고 급히 그림자 속으로 피신할 때였다.

“게 누구 있느냐!”

쉰 목소리가 쩌렁 공기를 갈랐다.

“식아, 이리 와 봐라!”

자박자박 몰려오는 짚신 소리가 어지럽게 울렸다. 나는 몸을 말고 숨었다. 놀란 나머지 왼 발목을 접지를 뻔하였다.

“이상한 소리가 들렸는데.”

“제가 한번 살펴 보겠습니다, 대감마님.”

종이 담장 주변을 수색하는 동안에도 대감은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봉분을 노려보았다. 섬뜩히 내려앉은 침묵이 내 목을 조르는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없는데요, 대감마님?

“혹시 근처에 숨었을지 모르니 담장 바깥까지 샅샅이 살펴봐라!”

“예.”

대감이 침을 뱉고 누각 쪽으로 사라졌다. 나는 몸을 웅크린 채 떨다가 기척이 사라지자마자 도령의 전각으로 튀어 갔다.

야광주처럼 반짝이는 꽃들과 오붓한 누각, 향기로운 비파 음. 춤추는 누각이 노을을 삼켰다. 대감의 그림자가 주렴 위에 기이한 화초처럼 나풀거리고, 주위로 다른 그림자들이 출렁이며 여느 때처럼 흥을 돋운다.

저 안에서 뒤섞여 노니는 자들은 사람일까, 요귀일까. 만일 요귀라면 어머니가 모르지 않으셨을 텐데.

그러나 이 세상에는 인간이 손쓸 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은밀한 현상이 존재하는 법이니 날고뛰는 귀인이라도 한계는 있었다. 확인할 방법이 없으나, 기씨 댁에 남모르는 괴괴한 사정이 있다는 것 한 가지만 알겠다.

사색에 잠겨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니, 도령은 왼팔에 머리를 대고 잠든 채였다. 나는 자는 얼굴을 마뜩잖게 내려다보았다.

“추운 데 안에 들어가지 않고 왜 밖에 나와 주무시고 계십니까.”

깊이 잠들었는지 내 목소리에 꿈쩍을 안 한다. 망설이다 슬쩍 손을 뻗어 도령의 뺨에 대 보았다. 안 그래도 체온이 낮은 사람이 저렇게 목깃을 헤 벌리고 드러눕다니.

곱게 감긴 눈두덩에 노을이 묻어 있었다. 옆에는 읽다 만 책이 펴져 있고, 도령의 한 손엔 먹 묻은 붓이 들렸다. 세상 모르게 곯아떨어진 얼굴을 보니 매정하게 깨우진 못하겠다.

“찬 바닥에 누워 자면 입 비뚤어집니다. 그러면 아무리 도령이라고 해도 마냥 곱게 보이진 않을 거예요.”

한숨을 쉬며 종을 부르려고 할 때였다. 팔목에 부드러운 살이 휘감겼다.

“내일도 와.”

한쪽 눈만 가느다랗게 뜬 도령이었다. 잠결에 목소리가 살짝 쉬었다. 나는 내게 붙은 팔을 떼어다 도령의 목깃에 얹어 주며 말했다.

“옷도 똑바로 입으시고요. 몸도 약하신 분이 또 고뿔 들려고 이러십니까? 아직 완전히 나은 것도 아니잖습니까.”

“자주 와.”

“…….”

도령이 내 팔을 흔들며 눈꼬리를 접었다. 본의 아니게 그의 친우를 죄다 뺏어 버린 것도 모자라, 그가 하염없이 안채만 바라보던 모습이 떠올라서 그런가. 안된다는 말이 쉽사리 나오질 않았다.

도령이 잡은 손바닥을 엄지로 꾹 눌렀다. 대답 안 하면 안 놓아주겠다는 듯이. 녀석은 제 무기를 알고 있었다. 저가 웃으면 내 사고가 느려진단 걸 일찍이 깨닫고 수를 쓰는 거다.

비열한 도령 같으니라고. 나는 결국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 * *

당연한 말이지만, 도령을 자주 찾아뵈기란 힘들었다. 그는 아무 때고 밥 먹듯이 찾아갈 수 있는 위인이 아닌데다 내게도 일상이 있다.

6월은 1년 중 가장 바쁜 달인데, 밭일도 삭신이 쑤시는데 햇보리와 감자를 캐서 창고로 날라 주느라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도령도 글공부를 하느라 바쁘겠지.

윤후는 요새 내게 부쩍 다정하게 굴었다. 내 벌이가 시원찮으면 없는 제 것을 떼어서라도 내 손에 들려 주었다. 나눠 받기도 민망한 양인데 꼬박꼬박 쥐여 주니 저 배려심 넘치는 소년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운 한편 부담스럽기도 했다.

동생도 둘이나 있으면서. 군식구 한 입씩 떼어 주기도 버거울 텐데 나를 챙기다니. 윤후 앞에선 못 할 말이었으나 한번은 나를 좋아하는 줄로 오해할 뻔하였다.

“윤후야.”

“응?”

둥글둥글 웃으며 나를 돌아보는 순한 눈망울을 보니 도저히 물을 수 없었다. 하나 여인의 감으로 말하건대 저 녀석이 나를 대할 때 설명하기 힘든 묘한 구석이 있었다. 지나치게 챙겨 주는 건 둘째 치고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귀를 앵두처럼 물들이며 피하니.

녀석의 취향이 진정 사내라면 안타깝게 되었다.

“버들아. 이번 연등제 가면 먹을 것도 많다던데.”

자기 집으로 와서 저녁을 들고 가라길래 윤후의 방을 차지하던 차였다. 다섯 식구에 끼어 눈치 보며 밥을 먹고 싶지 않아 거절했는데, 윤후네 귀여운 쌍둥이 여동생들이 나의 마음을 쥐고 짤짤 흔들어 대니 못 이기는 척 갔다.

“벌써 시간이 그리됐나.”

“초하룻날마다 열리니까.”

그러고 보니 난희 아버지가 대량으로 연꽃 모양 등잔을 사들이는 것을 보았다. 아라도 부모님이 정해 주신 정혼자랑 꼼짝없이 연등제에 밀어 넣어질 위기라며 엊저녁에 내게 와 분을 터뜨리고 갔다.

“이번에 같이 갈래?”

녀석이 수줍게 귀를 붉혔다.

“사람 많은 데 가는 거. 어머니가 좋아하지 않으실 텐데.”

무릿매골에 온 첫 달, 딱 한 번 연등제란 것에 참석해 봤다. 그달에 태어난 아이들을 축하하고 성인이 되는 아이들을 축복하는 행사인데, 특히 금년 소루강 제삿날에 불미스러운 사태도 있고, 밀국을 도는 전염병 소문과 요귀의 습격으로 급격히 쳐진 마을 분위기를 쇄신하고자 이장이 신경을 많이 쏟았다고 한다.

“그럼 못 가는 거야?”

“어머니께 여쭤볼게.”

무릿매골을 떠나기까지 약 두 달이 남은 시점이다. 이번 연등제가 내게 마지막 행사가 될 테니 이런저런 이유를 대면 어머니께서도 딸의 마지막 유희를 마지못해 허락할 것 같았다.

배불리 먹은 뒤 윤후네 집을 나왔다. 억새풀이 쓰러진 오솔길을 돌아 집에 다다르니 돌담 옆 오동나무에 누군가 기대서 있었다. 미동 없이 선 장신의 신형이 그림자에 묻혔다. 일순 소름이 쭈뼛 돋을 정도로 빤한 시선.

순간 나와 어머니를 잡으러 온 추노꾼인 줄 알고 흠칫 놀랐는데.

“온다며. 또 약속 어기지.”

공부를 마치자마자 바로 여길 찾아왔는지 바닥에 책이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고, 도령이 나무에 비딱이 몸을 기대고 있었다.

“제가 여기 사는 건 어찌 알았습니까?”

“유모에게 물었어. 한데 말이야, 나는 네 말을 따라 친구도 다 버렸는데. 약속을 어기는 것은, 좀 너무하지 않아?”

“그러려던 게 아니고…….”

속으로 이 핑계 저 핑계 늘어놨지만, 나는 그날부로 도령과 눈 맞대기가 겸연쩍어진 것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도령 입장에선 허풍쟁이의 변명이겠지.

“쉽게 올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어. 이해해.”

“미안합니다.”

“그럼 나랑 연등제 가자.”

기다렸다는 듯 그가 불쑥 제안했다. 무릿매골 거민들은 어른이건 아이건 할 것 없이 달마다 돌아오는 작은 행사를 기대하며 서른 날을 버틴다지만 오늘 하루 동안 두 번이나 같은 청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기대를 품은 윤후의 눈동자가 얼핏 떠올랐다. 그러나 도령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안개처럼 덧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날 내가 변복을 할 테니, 넌 들킬까 염려하지 않아도 돼.”

나는 도령을 물끄러미 보았다. 사내의 눈에 햇빛 조각이 떠 있고, 입꼬리는 기울어져 있었다.

그와 어울리고 싶어 눈이 뒤집힌 이들의 머릿수가 꽤 될 텐데 왜 내게 못 붙어서 안달인지 모르겠다만,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나쁘지 않다 뿐일까, 아주 설레발을 치고 있었다.

주먹을 쥐락펴락했다. 조금 전까지도 의욕이 크게 나질 않았는데. 한 번 가 본 연등제,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다를까 하면서.

그래도 남들 다 축제 분위기인데 혼자만 무료히 누워 있고 싶지 않아 윤후의 청을 재고해 보겠다고 했는데, 지금은 반드시 어머니의 허락을 구해 내야 할 것만 같았다. 찾아가겠다고 약속해 놓고 일이 바빠 도령과 약속을 어긴 것도 미안했고 말이다.

“음, 그럴까요?”

윤후야, 정말 미안하다.

지금도 한껏 환해진 도령의 미소가 내 심장을 두들겨 패고 있었다. 만들어진 미소가 아닌 진실로 기꺼워 짓는 웃음이란 걸 이제는 조금 분별할 수 있었다.

도령은 그럼 그때 보자며 기분 좋게 떠났다. 나는 그길로 방향을 바꿔 윤후에게 돌아갔다.

“미안해, 윤후야.”

함께 갈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을 전하자 그 애는 소박이라도 맞은 표정을 지었다. 저러니 오해를 살 수밖에.

윤후의 취향에 대한 추측은 점차 확신이 되어 가고 있었다. 하나 나는 윤후가 원하는 사랑을 줄 수 없었으니 애석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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